d라이브러리









슈퍼컴퓨터로 우주 만들다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 우주 탄생

우주를 커다란 건물에 비유한다면 건물을 이루는 벽돌은 무엇일까. 흔히 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별이 수천억개나 모여 있는 은하다. 우주라는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성 벽돌인 은하를 잘 알아야 한다. 은하들이 어떻게 분포하는지, 어떻게 태어나고 진화해왔는지를 알아야 우주의 비밀을 제대로 파헤칠 수 있는 것이다.
 

새해 벽두에 한국 과학자들이 우주의 비밀을 푸는데 한걸음 더 다가갔다.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을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 우주’를 만들어 우주가 진화해온 과정을 속속들이 재현한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6일 한국고등과학원(KIAS) 물리학부의 박창범 교수와 김주한 박사는 거대한 정육면체의 가상공간에서 우주가 초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박창범 교수팀이 만들어낸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 우주'. 이 우주에서는 길이가 9억 광년이 넘는 거대구조가 발견된다. 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은하들이 대규모로 밀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속에서 개개 은하의 내부를 조사할 수도 있다.


일반컴퓨터로는 6만년 걸리는 계산

박 교수팀의 성공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설치돼 있는 슈퍼컴퓨터 ‘노벨’시리즈 4대의 900GB(기가바이트, 1GB=10억B) 주메모리와 중앙처리장치(CPU) 128개를 80일간 활용한 덕분이었다. 일반컴퓨터(펜티엄Ⅳ 2.4GHz)로 이 실험을 한다면 약 6만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연구팀은 한 변이 260억 광년인 정육면체에 질량을 가진 입자 86억개를 우주 생성 당시와 비슷하게 분포시킨 후 이들이 어떻게 은하나 은하 무리를 형성하는지 시뮬레이션했다. 1광년은 빛이 1년간 움직이는 거리로 9조km이고, 260억 광년은 우주 끝까지 거리의 절반을 넘는 엄청난 규모다. 또 한 변이 47억 광년인 정육면체에서 비슷한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번 시뮬레이션을 통해 우주 초기에 지극히 작은 정도로 불균일한 물질 분포가 137억년이 지난 현재의 은하 분포를 만들어냈음을 확인했다. 태초의 작은 씨앗이 꿈틀거려 은하라는 나무가 태어나고 은하들이 모여 우주거대구조라는 숲으로 성장한 셈이다.
 

시뮬레이션으로 얻어진 ‘가상 우주’에 대한 최종 자료는 CD 1만장 이상에 해당하는 9TB(테라바이트, 1TB=1조B) 분량이다. 연구팀은 ‘가상 우주’를 누비며 여행하는 1분 40초짜리 동영상(www.dongaScience.com 참고)도 만들어 공개했다.
 

이번 시뮬레이션의 장점은 수십만 광년 크기의 은하 하나에서 수십억 광년 크기의 우주거대구조까지 생성되는 과정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상 우주에서도 실제 우주에서처럼 은하와 우주거대구조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뜻이다.

1980년대 박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당시 알려진 우주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연구결과를 내놓아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우주 장성은 수십억 광년 길이

거대한 규모의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은 왜 하는 걸까.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나온 ‘가상 우주’의 모습과 실제 관측되는 우주의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양면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거대망원경으로 은하들의 분포를 넓고 깊게 관측하는 ‘우주 측량’을 하는 한편, 슈퍼컴퓨터로 현재까지 알려진 표준 우주 모형에 따라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의 결과와 실제 관측 결과를 비교해 우주의 진면목을 밝히려는 목적이다.
 

현재 하늘의 25%에 걸쳐 지구에서 대략 30억 광년 이내의 우주를 측량하는 ‘슬론 디지털 스카이 서베이’(SDSS)라는 세계 최대의 우주 측량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08년 8월까지 100만개의 은하에 대한 거리, 밝기, 모양 등을 측량할 계획이다. 2000년부터 미국, 독일, 일본 중심으로 운영돼 온 이 프로젝트에 한국은 지난해 7월부터 공식 참여하고 있다.

SDSS 한국측 대표인 박 교수는 이번 시뮬레이션 결과가 SDSS 관측 결과와 비교하기에 적합한 규모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SDSS 관측결과에 따르면 밝은 은하와 어두운 은하가 분포하는 양상이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밝은 은하는 무리를 지어 필라멘트나 성벽(wall) 같은 덩어리 구조를 형성하는 반면, 어두운 은하는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분포하는 가운데 텅빈 공간이 드문드문 포함된 거품 구조를 이룬다.
 

또 은하들은 밝기에 상관없이 대규모로 모여서 만리장성처럼 생긴 ‘우주 장성’(長城)이라는 거대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DSS 관측에서는 이전에 알려진 장성(Great Wall)보다 2배 이상 큰 18억 광년 길이의 새로운 장성이 발견됐다. 이 장성에는 SDSS에서 발견됐다는 의미로 ‘슬론 장성(Sloan Great Wall)’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박 교수팀은 최근 SDSS 관측 자료를 분석한 결과 ‘슬론 장성’보다 더 큰 32억 광년 길이의 거대한 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우주라는 거대한 건물을 구성하는 벽돌은 은하다. 사진은 나선은하의 모습.


새로운 우주 모형 필요할 듯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물질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보이는 물질보다 5배 더 많다. 또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정체불명의 ‘암흑에너지’가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해 현재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암흑에너지는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대항해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지금까지 관측결과를 잘 설명하는 표준 우주 모형에 따르면 암흑에너지가 전체의 70% 이상, 암흑물질과 눈에 보이는 물질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박 교수팀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 우주는 표준 우주 모형에 따른 것이다. 가상 우주에서는 SDSS 같은 측량을 수없이 할 수 있다.

박 교수는 “가상 우주에서의 측량 결과를 실제 SDSS 관측 결과와 비교함으로써 표준 우주 모형을 검증할 수 있다”며 “현재 예비 결과를 보면 가상 우주에서는 ‘슬론 장성’ 같은 거대구조가 발견될 확률이 매우 작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표준 우주 모형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관측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 모형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 박 교수는 은하의 생성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남녀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왜 어떤 은하는 타원은하로 태어나고 다른 은하는 나선은하로 태어나는지, 어디에 씨앗(우주 초기의 불균일한 물질 분포)을 주면 어떤 나무(은하)가 태어나는지 타원은하나 나선은하는 각각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 등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이를 규명하면 지구가 속한 나선은하인 우리은하의 탄생 비밀도 자연스레 풀릴지 모르겠다.
 

한편 박 교수팀이 이번 시뮬레이션을 수행한 지난해 여름 독일을 비롯한 5개국의 과학자 17명이 비슷한 우주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들이 한 시뮬레이션은 한 변이 23억 광년으로 크기가 박 교수팀보다 훨씬 작다. 다만 약 100억개의 입자를 사용해 입자 수에서는 박 교수팀보다 더 많아 작은 규모에서 더 자세히 연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관측 자료와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 우주 자료를 모두 갖고 있는 한국의 박 교수팀이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5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 진로 추천

  • 천문학
  • 물리학
  • 컴퓨터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