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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물리학 고집한 현대물리학의 아버지

흑체복사 해결하면서 양자 개념 제시한 플랑크

플랑크는 과학의 중심 문제에 끝까지 매달려 작용양자 개념으로 현대물리학의 문을 열었다.


1900년 12월 14일 독일 베를린대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막스 플랑크는 독일물리학회에서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고전물리학에 작별을 고하고 양자물리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플랑크가 후대에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플랑크 본인은 자신이 고전물리학을 뒤흔들어놓을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지 몰랐다.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자연세계가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립한 역학은 완벽해 보였고, 물리학의 모든 현상을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뉴턴의 역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뉴턴의 역학 법칙 외에 맥스웰의 방정식이 따로 필요했다. 물리학자들은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물리학의 양대 기둥으로 삼으면 고전물리학이 완성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부상한 열역학이었다. 열역학은 역학이나 전자기학의 체계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열을 수많은 분자들의 운동을 합친 것으로 설명하려면 열역학 기본법칙 외에 통계역학과 확률이라는 개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학이나 전자기학처럼 연속적인 에너지 개념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열역학 문제 중에서도 특히 흑체복사가 골칫거리였다. 흑체복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체는 입사하는 모든 전자기 복사선을 완전히 흡수하는 물체다. 흑체는 복사선을 흡수한 후 특정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 형태로 이를 다시 방출하는데, 이것이 흑체복사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전기오븐이나 공동의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흑체복사를 설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1859년 독일의 물리학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최초로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키르히호프 법칙을 발표했다. 흑체복사를 분광기로 보면 각 파장에 해당하는 에너지 스펙트럼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스펙트럼의 에너지 분포가 흑체의 모양이나 종류에 상관없이 온도와 파장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온도와 파장의 범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면 키르히호프의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892년 플랑크가 베를린대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공식이 없었다. 플랑크는 특정한 물체나 물질에 상관없이 언제나 성립하는 일반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흥미가 있었다. 따라서 흑체복사 문제는 그에게 더 없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당장 오븐의 복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복사의 각 색깔에 해당하는 빛의 상대적 세기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그의 이론 연구를 자극하는 실험적 성과들까지 등장했다. 당시 독일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 Physikalisch-Technische Reichanstalt)는 전등을 개발하기 위해 필라멘트 스펙트럼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PTR의 물리학자였던 빌헬름 빈은 이 연구 과정에서 정밀한 실험을 토대로 새로운 복사 공식을 만들어냈다. 빈의 성공은 플랑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플랑크는 즉시 고전물리학과 열역학 기본법칙으로부터 빈의 공식을 이론적으로 유도해내려고 했다. 1897년부터 3년 동안 그는 5편의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 작업에만 몰두했다. 마침내 1899년 5월 18일 그는 전자기학과 열역학 제2 법칙을 토대로 빈의 공식을 일반적인 형태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플랑크가 흑체복사의 일반 공식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얼마 후 PTR의 오토 룸머와 베를린대 실험물리 조교수인 에른스트 프링스 하임이 실험을 통해 높은 온도의 긴 파장에서는 빈의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는 빈의 공식을 이론적으로 유도해낸 플랑크의 일반 공식이 틀렸다는 얘기였다.

결국 이듬해 3월 플랑크는 빈의 공식이 짧은 파장에서만 성립하는 공식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빌어 새로운 복사 법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현대물리학의 장을 열었다. 에너지를 작지만 일정한 크기로 나누면 계산상 편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작용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불연속적인 에너지 개념이 등장했다. 플랑크는 자신의 복사 공식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물리학적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연속적인 전자기학과 불연속적인 통계역학을 절충시켰던 것이다. 비로소 양자물리학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플랑크는 1906년까지도 자신의 작용양자가 갖는 혁명적 의미를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인해 원자 상수를 계산할 수 있게 됐고, 이 때문에 전자기학과 원자론의 관련성이 입증됐으므로 원자론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1907년과 1908년에 플랑크는 노벨상 후보에 올랐는데, 이는 작용양자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복사공식이 원자론에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1906년 이후 드디어 그는 자신의 작용양자 개념이 기존의 고전물리학을 무너뜨릴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수습하기에 바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기존의 고전물리학 체계 내에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1년에는 아예 고전물리학에 들어맞는 제2의 복사이론을 내놓았다. 결국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플랑크 자신은 자신의 변혁이 혁명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프로이센의 엄격한 학자 집안에서 자라면서 생긴 보수성 때문에 쉽게 고전물리학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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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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