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K군은 요즘 진로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이공계에 진학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어떤 학과에 지원해야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을지 감이 안잡히기 때문이다. K군의 꿈은 환경학자가 되는 것. 요즘 연일 환경호르몬이니 식수오염이니 해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내 대학의 학부 과정에서 ‘환경학’을 표방하고 있는 곳은 몇군데에 불과했다. 문제는 K군이 자신의 실력과 개인적인 선호도를 고려해서 가고 싶은 학교에는 ‘환경학’이 안보인다는 점. K군은 다른 이공계 학과에 입학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K군의 고민은 기우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연구는 이공계 학과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어느 특별한 과의 훈련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환경문제에 도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사례를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송어 폐기물 처치 작전
1996년 미국 유타주와 아이다호주의 송어가공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송어에서 먹을 부분만 떼어내고 남은 막대한 양의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의 처리 방식은 냉동을 통한 매립. 머리, 창자, 지느러미와 같은 송어 폐기물을 얼려서 ‘고체화’시키고 이를 땅 속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고체 폐기물은 별다른 처리를 거치지 않고 그냥 매립해도 된다는 것이 이전까지의 법규였다. 따라서 송어가공업계는 물이 줄줄 흐르는 폐기물을 고체로 둔갑시킴으로써 무사히 규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음이 그대로 보존될리 만무했다. 땅 속에서 녹은 송어 폐기물은 토양과 하천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대책에 나선 주정부는 우선 관련 법규를 강화시켰다. 25℃에서 15분간 촘촘한 쇠망에 넣었을 때 국물이 안생기면 매립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얼려진 송어 폐기물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더이상 얼음 폐기물을 매립하지 못하도록 만든 법규다. 하지만 영세한 송어가공업계로서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주정부는 시급하게 유타주립대학에 대안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그리고 1997년 말까지 연구가 진행된 결과 송어 폐기물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될 실마리가 잡혔다.
흥미로운 사실은 연구자들의 전공이 비단 환경공학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명공학, 식품공학, 자원공학, 기계공학, 그리고 경제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머리를 싸맨 덕분에 나온 결과였다. 연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분야만으로 환경 프로젝트를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환경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폭넓은 지식과 복합적인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연구팀이 세운 원칙은 ‘쓰레기는 최소화, 재활용은 최대화’였다. 그리고는 원칙에 두가지 해결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첫번째는 생선폐기물을 식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뼈를 제외한 창자, 지느러미, 그리고 남은 살점은 햄이나 소시지와 같은 가공식품의 훌륭한 재료다. 연구팀의 식품공학자는 영양가와 맛을 고려해 새로운 제품(kerapock)을 개발했다. 자원공학자는 이 제품을 팔 경우 수지가 제대로 맞을지 계산했다.
첫번째 시나리오는 성공적이었다. 현재 미국의 한 업체는 유타주립대로부터 제품의 로얄티를 사서 4개주의 판권을 확보한 상태다.
그러나 두번째 시나리오는 조금 문제였다. 송어 폐기물이 탄소(C)와 수소(H)를 다량 함유한 고농도의 유기폐기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이로부터 메탄(CH4) 가스를 뽑아낸다는 아이디어였다.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85%가 메탄인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구팀의 환경공학자는 메탄으로 활용한 뒤 남는 찌꺼기 문제를 지적했다. 아무리 잘 활용해도 20% 정도는 쓰레기로 남았기 때문이다. 돈버는 것도 좋지만 프로젝트의 중점사항인 환경문제는 여전히 골치거리였다.
연구팀은 두번째 시나리오를 첫번째 시나리오와 결합시킴으로써 탈출구를 마련했다. 가공식품을 만든다 해도 어차피 찌꺼기는 남게 마련이다. 여기서 메탄 가스를 추출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는가.
생물학 응용의 시대로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시나리오들이 과연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지 검증하는 일이었다. 연구팀은 식품가공기계를 갖춘 실험건물을 짓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공기계를 디자인하는 일은 생명공학자가 주도했다. 여기서는 주로 기계 안에서 각종 공정에 관여하는 미생물의 생장을 조절하는 일이 관건이다.
그런데 또다른 난관이 닥쳤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건물 내부의 온도가 35℃로 유지돼야 했다. 그러나 겨울에는 영하 20℃까지 떨어지는 기후 탓에 이를 대비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 보온 시설이 필요했다.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자원공학자가 열전달률이 매우 낮은 밀짚으로 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계공학자는 내부 기계가 발생하는 열과 밀짚의 보온효과를 합하면 겨울에도 기계가 작동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쳐졌다.
사실 환경공학이 태동하던 1960년대에는 이런 복합적인 학제간 협동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에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던 문제는 주로 수질 오염이었다. 해결책은 토목공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간단하게 제시됐다.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그곳으로 오염된 물을 흘려보내면, 웅덩이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분해해냈다. 또 모래를 채운 여과기를 만들어 물을 통과시킴으로써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방식도 제안됐다. 각종 건설과정에서 토목공학자들이 사용하던 물리적 처리 방식을 조금 응용한 형태였다.
그러나 오염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고 오염의 범위도 물에서 벗어나 생태계 자체로 넓혀지자 환경공학의 연구 방향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황석환 교수(포항공대 환경공학부)는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염물질의 양이 급속히 증가하자 환경공학의 연구 초점은 오염물질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많이 없애는데 모아졌다”고 설명한다. 바로 화학공학자의 주 전공 분야였다. 정수장이나 폐수처리장 전체 공정에서 화학물질을 적절히 투여해 오염도를 낮추거나, 대기에 떠도는 먼지와 독극물질을 화학적으로 제거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인공화합물은 오염물질을 확실하게 없애기는 했지만 처리가 끝난 후 자신이 새로운 오염원으로 작용하기 일쑤였다. 더욱이 생태계에 잔류하는 기간도 만만치 않았다.
만일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을 이용해 오염물질을 제거한다면 이런 2차오염의 폐해는 줄어들 것이다. 특히 생물은 화학물질과 달리 단기간 내에 자연적으로 사멸한다. 이런 생각에서 90년대에는 생명공학자들이 환경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주된 관심은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을 발견하고 이를 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60년대 이후 최근까지 환경공학은 새로운 이공계 분야가 하나씩 합류하면서 발전돼 왔다. 황교수는 “미국 생활하수처리장의 예를 보면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방식이 모두 동원되는데, 오염물질의 80% 정도는 미생물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식으로 분해된다”고 설명하고, “현재의 환경공학 연구는 이공계 전분야가 달려들어 가장 효과적인 대안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의 상황은 어떨까. 환경 분야에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높았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추진하는 경우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포항공대 대학원 과정에 마련된 환경공학부가 대표적인 사례다.
다른 학자와의 만남
포항공대 환경공학부는 몇년 전부터 10여개의 이공계학과 교수들을 겸임교수로 두고 구체적인 협동작업을 진행시켰다. 한 예로 류성호 교수(생명과학과)는 요즘 사회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환경호르몬의 하나인 다이옥신 검출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 류교수의 전공은 다이옥신이 세포에 어떤 충격을 가하는가에 대한 기초 연구. 즉 외부의 자극과 세포의 반응에 대한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을 추적해 왔다.
하지만 환경공학부의 겸임교수직을 맡은 후 새로운 아이템이 떠올랐다. 다이옥신의 양을 측정하는데 전문가인 환경공학부 교수를 접한 것이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였다.
다이옥신의 양을 측정하는 기존의 방식은 복잡한 화학분석법을 통해 이뤄져 왔다. 하지만 방법이 까다로운 탓에 검출 기간(2-3주)과 비용(1회 수백-수천만원)이 만만치 않았다. 또 다이옥신이 얼마나 대기중으로 노출되는지를 측정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생물에는 어느 정도로 직접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류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다이옥신을 검출하는데 생물학적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즉 다이옥신이 얼마나 강하게 세포 수용체와 결합하는지, 또는 다이옥신이 세포 내 유전자에 얼마나 많이 결합하는지, 그 결과 다이옥신 때문에 세포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운 단백질이 만들어지는지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다이옥신이 세포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류교수는 왜 이전에는 이런 연구에 매달리지 않았을까. 한가지 이유는 막상 다이옥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도 화학분석법으로 산출된 기초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연구에 손을 댈 엄두를 못낸 것이 사실이었다. 포항공대 환경공학부의 학제간 연구가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준 셈이다.
물론 화학분석법에 비해 정확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이 방법이 성공적으로 개발된다면, 몇천원 정도의 적은 비용을 들여 하루 정도면 하나의 샘플을 검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속도라면 한 실험실에서 1달 안에 수만군데의 다이옥신 오염도를 측정할 수 있다.
환경문제의 원인과 형태가 복잡해질수록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변모할 수밖에 없다. 비단 이공계뿐 아니라 철학, 문학, 사회학, 정치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에서 환경문제에 초점을 모으는 최근의 연구동향이 이를 반영해준다. 21세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관건의 하나인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바로 자신이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환경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