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11월 24일 영국의 머레이 출판사는 뜻밖의 행운을 잡았다. 찰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1천2백50권이 발간 하루 만에 모조리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후 7년 만에 1만6천여권이 팔렸고, 스페인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보헤미아어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됐다. ‘종의 기원’은 당시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였고, 다윈은 일약 ‘스타’가 됐다.
하지만 유명세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과학계의 찬사와 종교계의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종의 기원’이 자연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 평가됐다. 진화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며,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고, 모든 생명들이 발생학적으로 서로 연관돼 있다는 다윈의 주장은 당시 과학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면 종교계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자연의 질서를 뒤흔드는 이론이라며 신도들을 총동원해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종의 기원’이 출판된 이듬해 대영학회가 주관한 대토론회에서 당시 교회를 대표하던 사교 윌버포스는 “우리가 원숭이 자손이라는 당신의 견해에 대해 질문하고자 합니다. 원숭이의 조상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대체 할아버지 쪽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입니까?”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이처럼 1859년은 ‘종의 기원’의 출판으로 세상을 뒤흔든 해였다. 하지만 원래 다윈의 계획대로라면 ‘종의 기원’은 좀더 늦게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런 그가 ‘종의 기원’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자신이 자연선택설의 창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다윈과 ‘종의 기원’의 인연은 1831년 10월 그가 25살의 젊은 나이로 탐사선 비글호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지질학과 자연사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던 그는 당시만 해도 목사가 돼 한가로운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할 계획이었지 30여년 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논쟁을 일으키는 과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비글호를 타고 5년 동안 각지를 돌며 다양한 지질 상태와 해양생물, 육지 동식물 등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면서 그는 차츰 진화론에 매달렸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완벽한 신의 작품인 종은 불변한다’는 교회의 주장과 자신이 경험한 자연세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자신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과 라마르크 등이 진화론을 발표했었지만 이들의 진화론은 자신이 발견한 현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했다.
탐사에서 돌아온 다윈은 1839년 ‘비글호 항해중의 조사일지’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종의 변화라는 점에서 진화를 입증해주는 증거들을 기록했다. 고립된 섬에서 발견된 종의 변종들, 대륙에서 발견된 화석들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각종 증거들을 자세히 서술했다. 그리고는 이들 증거들을 하나로 엮어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진화 이론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다윈은 ‘조사일지’ 발표 후인 1840년대 초에 이미 자신의 진화론의 윤곽을 잡았다. 하지만 출판을 서두르지 않았다. 1856년까지만 해도 그는 몇년의 여유를 갖고 실제로 발간된 ‘종의 기원’보다 훨씬 방대한 양으로 책을 집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1858년 말레이제도에 머물던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변종이 원시형에서 무한히 떨어져 가는 경향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다윈에게 보내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월리스의 이론이 자신의 것과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다급해진 다윈은 월리스의 동의를 얻어 1858년 린네협회에서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논문은 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다윈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자신이 20여년 전에 생각한 자연선택설을 단독으로 발표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후 다윈은 ‘종의 기원’을 서둘러 집필했다. 책이 발간돼야 그가 자연선택설이라는 새로운 진화론의 창시자로서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방대한 양의 집필 계획을 포기하고 13개월 만에 노작을 탈고했다. 이로써 1859년은 ‘종의 기원’을 발표한 해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됐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종교계의 반발은 거셌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진화론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과학 이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초기에 미국에서는 15개 주에서 진화론 수업을 법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 여름 테네시주 데이튼의 존 스포크라는 생물 교사가 진화론을 가르쳤고, 기독교인들이 그를 고소하자 그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열린 일명 ‘원숭이 재판’에서 반진화론자들이 패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진화론에 대한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당시 이 재판은 성경의 진위 여부에 관한 공방과 진화론 강의가 이어지면서 하루에 1천여명이 재판을 방청하고 라디오에 중계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사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떠오르던 기업가와 산업가 등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사회적 지지기반도 넓어졌다. 개인간의 경쟁을 우선하는 자유기업 정신의 논리가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에까지 통용되는 법칙으로 해석됐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사상가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을 위한 개인들 간의 극한투쟁을 사회 진보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사회 다윈주의’를 주장했다. 또 다윈의 이론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