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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대중화 시대 연 포드 '모델 T'

차 값은 3분의 1, 임금은 2배 늘린 컨베이어 벨트

 

포드자동차 설립자인 헨리 포드.


1908년 10월 미 포드사는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선보였다. 10년 후인 1918년 이 모델은 미국 전체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명실공히 자동차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실로 엄청난 성공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모델 T’.

모델 T는 기존 자동차에 비해 성능과 디자인이 향상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실 모델 T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은 자동차 생산 기술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방식을 도입해 짧은 시간 내에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실제로 ‘포디즘’으로까지 불리게 된 모델 T의 대량 생산 방식은 이후 자동차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미국 산업 전반과 전세계를 뒤바꿔 놓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한 기계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숨어 있었다.

포드사의 창립자 헨리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학으로 엔진 기술을 익혀 1896년 2개의 실린더가 장착된 4륜차 제작에 성공했다. 이 자동차에 관심을 보인 투자자들은 1899년 그에게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의 공장장을 맡겼고, 포드는 본격적으로 자동차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가 이후 포드사의 모태가 된다. 그는 1907년까지 모델 A, B, C, N, S 등 중간 가격의 자동차 모델을 선보이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개발하고 싶은 자동차는 따로 있었다. 그는 미국의 자동차 시장이 무한히 커질 수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새로운 모델은 곧 대중용 자동차를 의미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자동차가 생필품의 하나지만 당시만 해도 비쌌기 때문에 대중이 쉽게 살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가족이 모두 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으면서도 개인이 운전은 물론 정비까지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장 좋은 소재에, 가장 단순한 디자인을 가진 새로운 자동차를 원했다. 웬만큼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저렴한 가격으로 만드는 것 역시 필수였다.

1907년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의 경영 총책을 맡게 된 포드는 즉각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 공장의 일부를 새로운 모델 개발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해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동원했다. 이듬해 8월 드디어 모델 T가 모습을 드러냈다. 2단 속도 조절에 페달로 후진이 가능하면서 1천2백 파운드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차체에 20마력까지 속력을 낼 수 있는 획기적인 모델이었다. 가격 역시 다른 자동차의 약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견고하면서도 수리가 간편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포드의 예상대로였다. 모델 T의 시제품이 출시되자 공장에서 생산도 되기 전에 5천대의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포드는 모델 T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1910년 하이랜드 파크에 새로운 공장을 세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의 실험이 시작됐다. 다른 어떤 자동차 공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생산 공정을 도입하기로 했던 것.

모델 T에 들어가는 중요 부품들의 규격을 까다롭게 조사했고, 각 부품 하나만을 생산하는 전용 기계들을 조립 공정과 연결해 체계적으로 배치했다. 전용 기계들은 비숙련공들도 쉽게 작동시킬 수 있도록 개선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들 기계의 생산 속도에 따라 하루 작업 시간표가 결정됐고, 공장 전체가 이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1914년에는 마침내 4층짜리 새 공장의 1층부터 꼭대기까지 컨베이어 벨트가 하나로 연결된 이동식 조립 라인이 완성됐다.

이제 노동자들은 조립할 부품을 가지러 이동할 시간을 자동차 조립에 쓸 수 있었다. 모델 T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한대를 조립하는데 14시간이 걸렸지만 1914년에는 9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1910년 1만9천대가 생산되던 모델 T는 1913년 17만2백11대가 공장에서 출하돼 3년 만에 생산량이 10배 가까이 늘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가격도 덩달아 낮아졌다. 1908년 1천달러였던 자동차 가격이 1916년에는 3백60달러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모델 T의 성공에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자신의 주위에 몇 대의 기계를 배치해두고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던 숙련공의 역할을 점차 기계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 벨트와 기계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노동자는 점차 기계의 작동을 도와주는 기계 보조원으로 전락했다.

당연히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기계 작업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도 늘어나 1913년에는 포드사의 이직률이 전년보다 4배나 많았다. 외부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반복적으로 단순 작업을 되풀이하는 자동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결국 포드는 고심 끝에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던 하루 8시간 노동에 5달러 임금을 제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포드사의 주주들을 비롯해 동료 사업가들은 포드의 이런 제안을 미친 짓으로 치부했다. 하루 9시간 노동에 2.38달러를 지급했던 관행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하지만 포드는 주변의 얘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만족할만한 임금을 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생산력을 높여 기업에도 이윤을 남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포드사는 1914년 3천만달러에서 1916년에는 6천만달러로 이윤이 2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미국 중산층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전설적인 포드사의 5달러 정책은 이처럼 대량 생산으로 인해 심각해진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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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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