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앞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9월 1일부터 ‘유럽인의 상상, 꼬레아’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정철(한국외국어대), 김인환(이화여대) 교수 부부가 평생을 모은 80여점의 옛 지도들이 이곳에서 선보이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고(古)지도 전시회다. 최근 중국·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북쪽 국경선, 독도, 동해 문제를 비롯해 당시 유럽인들이 바라본 세계와 그 속의 한국을 살펴볼 수 있다. 서 교수가 직접 주요 지도와 그 의미를 소개한다.
조선 국경이 북쪽으로 올라간 당빌의 지도
이번에 전시된 지도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1737년 만들어진 당빌(프랑스)의 ‘조선왕국전도’일 것이다. 당빌은 약 40여쪽으로 구성된 ‘신중국지도첩’을 만들었는데 12번째 지도가 조선왕국전도다.
지도에는 한국이 크게 8도로 이뤄진 나라로 돼 있고 한국의 각 지명이 중국식 음을 거쳐 프랑스어로 번역돼 있다. 이 지도는 지형, 산세, 강, 위도, 경도 등이 매우 정확해 18세기 유럽에 나온 동아시아 지도의 모델이 됐다. 다만 한양(서울)이 ‘kinkitao’(경기도를 뜻함)로 돼 있고 경상도가 ‘Tchousin’인 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당 지역의 정확한 발음이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를 보면 조선의 국경이 지금까지 알려진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쪽으로 그려져 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1712년 청과 조선의 국경을 정하라고 명령했다. 몇 년 뒤 임무를 받은 만주 총관 목극등이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관찰한 뒤 세운 비문에서 양국의 국경선이 두 강의 본류가 아니라 북쪽에 있는 발원지임을 명확히 했다.
1860년 중국은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면서 조선인을 간도 지방으로 쫓아냈고 조선의 대표였던 이중하는 1863년 당빌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일통여도를 증거로 제시했으나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9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중국과 야합해 압록강과 두만강 본류의 북쪽을 중국에 넘겼고, 북한은 1962년 비밀회담에서 중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원칙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중국 정부와 다시 국경선을 협상해야 한다. 이 때 당빌의 조선왕국 전도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발견한 조선 지도
내가 지도를 모으게 된 계기는 1966년 프랑스 유학 시절 베르사유 궁전을 견학할 때였다. 루이 14세가 쓰던 응접실에 오래된 지구의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한국을 찾아보니 동해가 ‘Mer Oriedtale’, 분명히 ‘동해’라고 적혀 있었다. 귀국해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기사가 실렸다. 그때 다른 신문이 확인해본 결과 그런 지도가 없다는 말이 들렸고 나는 다시 프랑스에 가서 확인하는 한편 고서적상을 뒤지다 마침내 3백년전 동아시아 관련 지도의 모델이 됐던 당빌의 조선왕국전도를 찾아냈다. 이 일을 계기로 크고 작은 고지도를 모으게 됐다.
내가 모은 지도 중에는 중국과 조선의 국경과 관련된 지도들이 몇 개 더 있다. 그중 ‘만주지도’는 프랑스 수학자 본이 만든 것으로 조선은 ‘꼬레’(Coree)로 적고 있고 형태와 지명이 매우 정확하다. 이 지도에서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북쪽으로 훨씬 올라가 있다. 독일인 하스와 뵈미우스가 그린 ‘아시아 지도’도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점선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 지도에도 ‘독도는 조선땅’
이번에 전시된 지도 중에는 독도와 관련된 중요한 지도가 있다. 1832년 독일계 동양학자 클라프로트는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쓴 ‘삼국통람도설’(1785년)을 번역했다. 번역한 책의 지도첩에는 하야시의 지도가 똑같이 들어 있다. 이 지도에는 동해에 울릉도와 독도로 추정되는 섬이 두 개 있는데 독도에는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가리킬 때 쓰는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적으면서 그 밑에 ‘이것은 조선 땅’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대개 섬은 색깔로 어느 나라의 것인지를 표시하는데 독도는 조선 영토와 같은 황색으로 칠했다. 이런 설명을 첨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데다 일본인 스스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이어서 한국에는 매우 유리한 자료이다.
‘동해’ 이름 문제도 여러 지도에서 발견된다. 프랑스 지리학자 드릴이 1781년 그린 인도·중국 지도에서 동해는 ‘동해’ 또는 ‘한국해’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저명한 지리학자였던 드릴의 권위와 영향력을 감안하면 이 지도는 동해 표기에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고지도 7개중 6개는 동해 표시
나는 지리를 좋아해서 무슨 지도를 보든 한국이 어떻게 표현됐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미군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에 동해가 ‘Sea of Japan’, 즉 일본해라고 표기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반도의 동쪽 바다를 동해라고 배웠고 다른 모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일본해로 표기됐기 때문이다.
동해는 16-17세기에는 중국해 등으로 표기되지만 18세기가 되면 그러한 오류는 사라지고 서양 지도 대부분에서 한국해 또는 동해로 통일된다. 1602년 네덜란드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곤여만국전도’라는 지도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으나 그 이름은 여러 나라의 고지도에 반영되지 못했다. 한국은 북에서 남쪽으로 비교적 곧게 뻗은 나라지만 일본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드러누운 자세이기 때문에 일본해라는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유럽 지리학자들은 판단한 것으로 본다. 18세기 서양 고지도에는 대개 6:1 이상으로 한국해 또는 동해라는 이름이 더 많다.
중국인도 ‘동해’라고 불러
일본 사람들은 동해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방위의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지적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1705년 드페르(프랑스)가 만든 아시아 지도에서 그는 “동해가 유럽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바다로서 만주족들이 그 바다를 동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해라는 이름을 한국뿐만 아니라 만주족(아마도 중국인들까지) 등이 사용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서양에서 제대로 된 지도의 역사는 5백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571년 두라도의 지도에 ‘꼼라이’(comrai)라는 지명이 나타나면서부터다. 1595년에는 반 랑그렌의 동인도지도에 한국이 둥근 섬으로 나타나고 ‘한국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더 널리 보급된 메르카토르의 1545년 아시아지도나 메르카토르 2세의 1595년 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은 있어도 한국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해 포르투갈인 테쎄라의 일본전도에는 한국이 ‘꼬레아 인슐라’(Corea Insula) 즉 섬나라 한국으로 나온다. 한국은 섬이고 그 복판에 꼬리(Cory)라고 표기가 있는데 도시명 같다. 조선 시대에 그린 지도들 중에도 우리나라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의해 대륙에서 분리된 섬나라로 그려진 지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한국을 섬나라로 그리지 않았나 추정한다. 13세기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한국을 섬나라로 묘사했다.
17세기 들어 섬에서 반도로
한국이 섬에서 반도로 인식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655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르티니가 중국을 다녀온 후 중국지도첩을 만들었다. 이 지도첩 속에 한국이 길쭉한 반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유럽인들은 이 지도첩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이 섬나라가 아니라 육지에 붙어 있는 반도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모른다.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실제 측량이 강화된 18세기 들어 한국도 제 모습을 서양인 앞에 드러냈고 대표적인 사례가 당빌의 지도였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지도에서 ‘꼬리’(Cory)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랍 상인들이 고려를 부르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랍 국가들은 한국을 꼬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가졌던 것은 아랍 상인이고 그들은 장보고의 청해진을 왕래하면서 한국을 금이 풍부한 섬나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을 서양에 처음 알린 것은 아랍상인이었다. 8세기부터 우리나라를 찾았던 그들은 남해안의 섬을 가리켜 해도에 ‘신라’(Sila)라고 썼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살기가 좋으며 금이 많이 나고 여섯 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그들을 동양에서 몰아낸 포르투갈 함대가 아랍 상인의 해도와 지도를 계속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포르투갈이 만든 지도에 꼬리라는 이름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후 포르투갈은 우리나라를 ‘꼬레이아’(Coreia)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포르투갈에 이어 지도 제작의 선봉에 나선 프랑스는 ‘꼬레’(Coree)라고 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지도 제작을 시작한 독일은 C대신 K를 썼고, 영국도 K를 좋아했다. 1900년대에 들어와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의 선교사들이 ‘코리아’(Korea)로 정했고 이것이 국호가 된 것이다. 고지도는 그런 과정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고지도는 역사의 산 증인
이번 전시회에는 아내가 기증한 한국 관련 옛 책들도 볼 수 있다. ‘예수회 신부들의 여행기’, 하멜의 표류를 담은 ‘핑커튼의 항해와 여행기’ ‘극동의 이미지’ ‘알세스트호 항해기’ 등이다. 알세스트호 항해기에는 한국 여행을 소개하며 장죽을 물고 큰 갓을 쓴 조선 사람들의 그림이 나오는데 외국인의 눈에는 상당히 특이하게 비친 모양이다. 예수회 신부들의 여행기는 산삼의 효능과 식별법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옛 지도를 모으면서 나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거의 매년 유럽을 방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카탈로그를 뒤지고 소더비를 비롯한 유명 경매회사의 경매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다 한가지 배운 것은 내가 교수로서 연구하기 위해 지도를 산다고 하면 한푼도 깎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지도를 사고 파는 상인이라고 말하면 10%를 할인해 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부랴부랴 가짜 명함을 만들었다. ‘Maphouse of Korea’라는 지도 회사의 대표라는 명함이었다.
나는 그동안 16-19세기에 걸친 다양한 지도를 모아왔다. 특히 18세기에 만든 고지도를 열심히 모았다. 18세기에는 그 이전의 지식들을 철저히 점검해 객관적으로 세계를 보고자 했고, 국가가 지도 제작을 후원하되 지도 작성은 지도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또 18세기 지도들이 모두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지도는 과학사에 속하고 종합과학의 성과이지만 역사를 떠나 생각할 수가 없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은 역사와 지리를 함께 교육하면서 고지도를 꼭 포함한다. 우리도 역사 교육에서 옛 지도를 더 활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