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한국 입자물리 연구의 원년이 될 것인가. 1967년 4월 29일 한국물리학회 입자물리분과가 창립된 이후 한국의 입자물리 연구는 약 50년간 격변을 이뤘다. 과거의 입자물리 연구가 대부분 해외 의존형이었던 것과 달리, 현재는 한국 과학자가 국제 공동연구를 주도하고 국내에서도 대형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7월에는 물리학 분야 최대 규모의 학술대회인 ‘국제고에너지물리학회(ICHEP)’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된다. 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 입자물리연구의 현재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 어떤 장(field)의 영향을 받는 입자가 미시적인 범위 안에서 운동하고 있을 때 그 운동 상태를 기술하는 방정식은 게이지(측도와 좌표) 변환에 불변이다 | 게이지 이론, 1972년, 제16회
# 지금까지 알려진 세 개의 쿼크(u, d, s) 이외에 질량이 훨씬 큰 네 번째 쿼크가 존재할 수 있다 | GIM 이론, 1974년, 제17회
# 쿼크 사이의 강한 상호작용(강력)이 글루온이라는 매개입자에 의해 전달된다 | 양자색역학, 1978년, 제19회
# 표준모형 내 다른 기본 입자들의 질량을 설명하는 힉스 보손을 발견했다 | 힉스, 2012년, 제36회
1950년에 시작해 올해로 39회째를 맞는 ‘국제고에너지물리학회(ICHEP)’의 역사는 입자물리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리코 페르미, 로버트 오펜하이머, 에르빈 슈뢰딩거, 로버트 마샥, 리처드 파인만, 볼프강 파울리, 이휘소 박사까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세상의 근원과 작동 원리를 찾는 연구를 ICHEP에서 처음 발표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표준모형이 완성됐고, 표준모형과 관련된 노벨상만 16개가 나왔다.
최신 논문 1100여 편, 한국에서 발표
“입자물리학계 최고의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은 한국의 물리학 연구 수준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4년 전 ICHEP 유치단장을 맡았던 최수용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는 ICHEP 개최의 의미를 이 같이 설명했다. 국제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능력과 각국의 연구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뒷받침 돼야 하기 때문이다. 7월 4∼1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ICHEP2018에는 55개국 1300여 명의 입자물리 전문가가 모인다. 핵·입자·천체물리 분야 논문이 1100편 가량 발표될 예정이다.
2013년 힉스, 2015년 중성미자, 2017년 중력파까지, 핵·입자·천체물리 분야에서는 근래 들어 2년마다 한 번씩 노벨상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과학계와 대중의 관심도 뜨겁다. 올해도 눈여겨 볼 주제들이 많다. △2012년 발견한 힉스가 1964년 처음 언급된 표준모형 내 힉스와 동일한 입자인가 △중성미자의 질량은 왜 다른 입자들에 비해 작은가 △반물질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중력파를 포함한 다중신호천문학으로 암흑우주를 연구할 수 있는가 등이다(자세한 내용은 68페이지 관전 포인트 참조).
한국은 이번 대회를 위해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였다. ICHEP은 ‘국제순수응용물리학연맹(IUPAP)’이 2년마다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을 돌며 개최하는데, 러시아와 인도도 도전장을 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입자물리 이론에 강한 나라이고, 인도는 빠른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의 입자물리 연구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이 입자물리 연구에서 1세대를 지나 새로운 세대로 진입해야하는 중요한 시기임을 어필한 것이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최 교수는 4년 전 스페인 발렌시아 ICHEP에서 유치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한국의 입자물리 연구비 규모가 어떻게 증가하는지 그래프를 제시했다. 가속기 건설비를 제외한 연구비가 2010년 약 800만 달러(약 88억 원)에서 2014년 약 5000만 달러(약 550억 원)로 6배 이상 늘었다.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또 그는 개최지로서 서울의 장점을 언급하며 “2018년은 서울에서 30년 만에 올림픽(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울 시기”라고 설명했다. IUPAP은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국제공동실험 대변인 배출
현재 한국 물리학자들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실험 등 국제공동연구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권영준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일본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KEK)가 운영하는 가속기 ‘켁비(KEKB)’의 국제공동연구 ‘벨(Belle)’ 실험을 이끄는 대변인(spokesman)으로 지난 4월 선출됐다.
대변인은 기업으로 치면 최고경영자(CEO)와 같다. 실험의 방향을 수정하고 논문의 품질을 최종적으로 관리한다. 벨 실2018험은 1999~2010년 데이터를 받아 현재 분석 연구를 진행 중이다. 작년 한해에만 국제학술지에 20편이 넘는 논문을 실었다. 벨 연구팀 인구의 20분의 1을 차지하는 한국 그룹(약 20명)이 논문의 10%를 내고 있다.
벨 실험의 주요 목표는 B중간자(B Meson)를 만들어 CP 대칭성 깨짐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물질과 반물질 사이에 심각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 탄생 초기에는 물질과 반물질이 쌍으로 동일한 양만큼 생성됐다. 이 이론대로라면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충돌해 빛을 내고 소멸하거나, 끊임없이 물질-반물질 쌍이 생성되는 현상이 일어나 현재의 우주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물질은 전부 사라지고 우주에는 물질들만 남아있다. 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존재하지만 반양성자, 반중성자, 양전자는 실험실에서만 겨우 존재한다. 이에 대해 옛 소련의 핵물리학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우주 생성 당시 물질과 반물질이 같은 양으로 만들어 졌더라도 몇 가지 조건(그중 하나가 CP 대칭성 깨짐)만 맞으면 점차 반물질이 없어지고 물질만 남을 수 있다’는 논문을 1967년 발표했다. CP 대칭성 깨짐을 설명할 수 있다면 물질과 반물질이 비대칭을 이루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벨 연구팀은 B중간자를 이용해 CP 대칭성 깨짐을 실험했다. 1973년 일본의 물리학자 고바야시 마코토와 마스카와 도시히데가 발표한 이론을 바탕으로 실험을 설계했다. 두 과학자는 6가지 쿼크 각각의 고유한 성질이 물질과 반물질의 약한 상호작용에 미묘한 차이를 유발해 비대칭이 생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벨 연구팀은 전자와 양전자를 서로 충돌시켜 800억 개 가량의 B중간자와 그 반입자를 만든 뒤 비교했다. 그 결과 두 입자의 붕괴 양상은 미묘하게 달랐다.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는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결과로는 현재와 같은 물질의 압도적인 비대칭을 설명하기 어렵다. 권 교수를 포함한 벨 연구팀은 ‘벨2’ 실험을 올해 4월부터 시작했다. 벨2는 켁비에 비해 성능이 40배 더 좋은 가속기인 ‘슈퍼 켁비(super KEKB)’로 진행된다. 본격적인 B중간자 검출 실험은 이르면 올해 말부터 들어간다.
권 교수는 “벨 실험 데이터에서 보지 못했던 특이한 현상들을 기대하고 있다”며 “‘암흑광자’라고 하는, 암흑물질끼리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의 흔적들도 찾고 싶다”고 말했다. 대칭성 깨짐이 왜 쿼크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지(입자의 ‘맛(flavor)’ 문제)도 추가로 밝혀낼 계획이다.
권 교수는 벨 실험의 강점으로 “꾸준히 자기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CP 대칭성 깨짐과 입자의 ‘맛(flavor)’ 문제를 연구하는 실험은 여러 개다. 미국 스탠퍼드선형가속기연구소(SLAC)에서는 ‘바바(BaBar)’ 실험을, CERN에서는 ‘LHCb’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양성자와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LHCb 실험은 빔 에너지가 높아 B중간자가 생성될 확률이 벨에 비해 10만 배가량 높다.
"68년 역사를 가진 입자물리학계 최고의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은 한국의 물리학 역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권 교수는 “그럼에도 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연구가 있다”며 “선택과 집중을 하기보다는 다양한 연구, 다양한 시도를 용인한 덕분에 벨 연구가 강점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한국의 입자물리 연구에도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것이 오히려 독자적인 연구를 주도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국내 자체 실험도 결과 속속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실험도 결과를 내기 시작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은 암흑물질 검출 실험 데이터를 분석해 이르면 이번 여름에 발표할 예정이다. 암흑물질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약 26.8%를 차지하고 있지만 관측이 되지 않고, 표준모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미스터리다.
연구팀이 찾고 있는 암흑물질은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 즉 ‘윔프(WIMP)’다. 윔프는 액시온, 비활성 중성미자와 함께 암흑물질의 강력한 후보로 꼽힌다. ‘무겁고, 전기적으로 중성이며, 다른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 안정된 입자’라는 암흑물질의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윔프에 대한 이론은 1977년 암흑물질의 존재가 물리학자들 사이에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 이휘소 박사와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의 초기 우주론 논문에서 나왔다.
지하실험연구단을 이끄는 김영덕 단장(ICHEP2018 공동조직위원장)은 2003년부터 강원 양양군 양수발전소 지하 700m에 검출기를 설치하고 실험을 해왔다. 실험실을 지하에 만든 이유는 윔프가 아닌 다른 입자가 검출기를 지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중력하고만 상호작용하는 윔프는 아주 드물게나마 검출기의 원자핵과 충돌할 것으로 추정된다.
김 단장은 “특히 이탈리아의 암흑물질 연구팀인 ‘다마(DA MA)’의 실험 결과를 재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암흑물질로 추정되는 신호를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연구팀이다. 지난 4월에도 20년 치의 검출기 데이터를 해석해 유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분석 결과만 보면 잘못된 신호라 보기 힘들지만, 다른 연구팀의 실험에서는 같은 신호가 재현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스페인, 미국 등 여러 나라가 검증에 뛰어들었다.
이현수 IBS 지하실험연구단 부단장이 책임자인 한국 그룹은 다마에서 사용하는 요오드화나트륨(NaI) 성분의 특수한 검67출기를 직접 제작해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다마팀의 실험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거나, 아니면 재현되지 않음을 직접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암흑물질 연구에 큰 진전을 이루게 된다. 김 단장은 “지하실험연구단뿐만 아니라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연구단, 순수물리 이론연구단 등이 생기면서 국내의 실험 규모나 연구자들의 ‘맨파워’가 비약적으로 커졌다”며 “새로운 입자,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는 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주·가속기 기술로 새로운 이론 발견
입자물리를 연구하는 한국 이론가들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박성찬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는 남극에 위치한 ‘아이스큐브(IceCube)’ 중성미자 관측소에서 관측된 새로운 중성미자가 암흑물질이 붕괴한 신호일 수 있다는 이론을 2015년 7월 ‘피지컬 리뷰 D’에 발표했다.
doi: 10.1103/PhysRevD.92.023529
아이스큐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km인 거대한 얼음 한 가운데에 검출기를 설치해 우리 은하 외부의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시스템이다. 박 교수는 “페타전자볼트(PeV·1000조eV) 수준의 중성미자 신호가 감지됐다”며 “기존에 알려진 중성미자 소스들로는 나올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아이스큐브 연구팀은 박 교수의 이론을 토대로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표준모형 연구는 2012년 힉스 발견으로 일단락됐다. 일각에서는 이론가들의 시대가 저무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박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공위성 기술과 가속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표준모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표준모형, 양자역학 역시도 기존 이론의 한계를 극복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주를 관측해 보면 표준모형으로는 전체 우주의 5%밖에 설명할 수 없다. 표준모형이 기본적으로 물질(쿼크와 렙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이론이다보니, 나머지 95%를 차지하는 우주의 암흑 성분이 무엇인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미 밝혀진 5%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는 앞으로 밝혀나가야 한다.
박 교수는 우주의 급팽창 원리를 연구하고 있다. 우주 성분의 약 68.3%가 암흑에너지이고, 암흑에너지 형태의 에너지가 있어 우주가 가속팽창하기 시작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암흑에너지의 양이 왜 이렇게 많은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이론가들의 예측과 관측 결과의 오차가 가장 큰 부분이 암흑에너지의 양이다.
박 교수팀은 초기 우주가 급팽창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소스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힉스장이 할 수 있다는 ‘힉스 인플레이션’ 이론을 발표했다. 힉스 입자의 성질을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힉스 입자가 초기 우주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 예측한 결과다. 연구결과는 ‘피지컬 리뷰 레터스’ 2014년 6월 16일자에 실렸다.
doi: 10.1103/PhysRevLett.112.241301
이론과 실험은 함께 발전한다. 힉스 인플레이션 이론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힉스 입자와 가장 밀접한 관계인 t쿼크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해야 한다. 현재 가속기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박 교수는 “일본에 건설 예정인 길이 30km의 ‘국제선형가속기(ILC)’나 중국과학원이 추진 중인 둘레가 100km에 이르는 ‘원형전자양전자가속기(CEPC)’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차세대 가속기 연구의 주도권이 이제는 아시아로 이동하는 추세”라며 “한국에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