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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사건과 과학자의 양심 용기, 비열, 얼버무림

80년대 과학자의 양심을 도마위에 올려놓았던 사건은 어떤 것이 있어나?

다음 세대가 80년대 우리나라 과학을 평가한다면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둘까?

첨단과학기술분야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면서 우리나라도 바야흐로 세계적인 기술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던 지난 10년이었다. 컴퓨터 반도체 유전공학 신소재 등 첨단과학인력이 대량 배출되면서 정부출연연구소나 민간기업 연구소의 설립이 줄을 이은 양적팽창의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아라미드펄프' '리드프레임' '형상기억합금' '올림픽전산화' '4메가D램' 등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과학적 성과들이 잇달아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과학의 화려한 이면에는 우리 모두가 들춰내기를 꺼려하는 부끄러운 치부도 적지 않다. 정치사회적으로 암흑기였던 '5공시대'에 과학 또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성격과 기능이 전혀 다른 과학기술연구소와 과학원이 하루아침에 통폐합되어 과학기술원이 되고, 과기처장관과 각연구소의 책임자는 정치적인 배려에 의해 수시로 교체됐다. 첨단과학의 성과가 권력과 범죄집단에 의해 교묘하게 악용된 사례도 있었다. 컴퓨터범죄가 신종수법으로 등장하는가하면 안기부의 '전화도청'여부가 정치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도마위에 올랐던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문제야말로 80년대를 정리하면서 우리가 한번쯤 짚고 넘어갈만하다.

자연현상을 규명하여 객관적 진리를 찾는 과학자는 예로부터 사물에 대한 편견이 없는 '가치중립적'인 위치에 서도록 강조돼 왔다. 과학자는 때로는 권력의 위협에 의해 때로는 명예욕과 이해타산에 의해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중립적'이란 말그대로 가능한 것인가? 명백히 이해가 상반된 두가지 주장에 대해 객관적 진실을 밝혀내기가 어려울 경우 과학자가 숨는 '객관주의'의 함정은 아니었던가. 혹자는 과학자야말로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경직된 분위기가 지속됐던 80년대 우리사회는 덩이상 과학자들을 평온한 '무풍지대' 속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역사의 증언대에 '전문가'로 나선 과학자들은 때로는 권력에 굴복하거나 야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마침내는 진실을 당당하게 밝혀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발짝 전진시키기도 했다.

조선대 이철규군 변사사건 때 윤중진 굴립과학수사연구소장은 불검결과를 발표하면서 "과학은 '있다' '없다' '모른다' '안다'의 명쾌한 세계"라며 세간의 의혹을 일축하려 했고, 전화도청장치개발 여부로 국정감사에 불려나온 경상현 전자통신연구소장은 "과학기술은 물론 세상만사가 모두 양면성을 갖는다"며 얼버무리기도 했다.

또 경찰수뇌부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박종철군의 사인은 '고문치사'라고 감정서에 기입했던 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박사는 그의 일기장에서 "결심을 하기까지 며칠간 잠못이루며 양심과 타협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성기수 시스템공학센터소장은 82년 금융실명제와 관련 컴퓨터가 은행의 그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겠는지를 묻는 국회의원의 질의에 대해 "(가능하다고 신문지상에 밝힌) 소신은 변함이 없다"고 전제한 후 과기처에서 마련해 준 (불가능하다는)답변서를 그대로 읽었다.

이떤 사건들이 과학자의 '양심'을 실험대에 올려놓았던가?

「평화의 댐」-과학계 최대 오점

86년 10월 이규효 당시 건설부장관이 북한의 금강산댐건설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평화의 댐'사건은 80년대를 통틀어 과학계 최대의 오점으로 기록된 만하다. 건설부의 발표가 있자마자 과학자들은 연일 매스컴에 등장하여 '물폭탄'(水攻)의 가능성과 파괴효과, 생태계의 파괴가능성에 대해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대응댐건설을 위한 국민적인 모금운동이 시작됐고 마침내는 7백여억원의 국민성금과 국고 1천3백억원을 들여 87년초 평화의 댐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평화의 댐'건설은 '워싱턴포스트'지가 88년 8월 '불신과 낭비의 기념비적 공사'라고 폭로하면서 비로소 그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회건설위에서 치열한 찬반논쟁을 벌인 결과 금강산댐의 높이는 종전에 정부가 발표한 2백m 이상이 아니라 1백21m에 불과하고 저수량도 2백억t이 아니라 47억t임이 드러났다. 한 야당의원은 북한측이 수공을 감행할 경우 북한지역이 먼저 물바다가 되어벌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올림픽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정부의 판단과는 달리 북한측이 전혀 댐공사를 서두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불확실한 과학적 분석이 집권세력의 정권안보에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준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평화의 댐은 지난해 5월 1단계 공사를 끝으로 중단상태에 있다. 그러나 국민학교 코흘리개의 돈까지 긁어모은 7백억원의 돈은 어디로 갔는가? 또 당시 매스컴에 등장하여 '수리학적'으로 혹은 '생태계'적인 측면에서 위험성을 강조하던 과학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주장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금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평화의 댐은 두고두고 과학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열어 수공을 감행할 경우 서울예상침수도(당시 신문에서)
 

법의학의 위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를 뒤엎고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실을 밝혀내기까지에는 중대부속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씨와 법의학자 황적준박사 2명의 용기있는 결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박종철군의 사체를 처음 검안한 오연상씨는 당시 사체의 상태와 조사실의 현장상태를 정확히 증언함으로써 '물고문'사실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군의 사체부검을 맡았던 황박사는 경찰수뇌부의 갖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은폐하기를 거부했다. 황박사는 박종철사건 1주기를 앞두고 당시의 일기장을 공개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다 최근에 와서야 고대에서 법의학강좌를 맡게 됐다.

박종철사건은 이들 용기있는 의사들의 도움으로 진상이 밝졌지만 80년대에는 이밖에도 수많은 의문사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우종원군(85년 당시 23세·서울대4년) 김성수군(86년·18세·서울대 1년) 신호수군(86년·24세·근로자)사건이 그렇고 올해들어와 이철규군(조선대생) 이내창군(중앙대 안성분교 학생회장) 의 '의문의 죽음'이 또한 그러하다.

지난 4월 시위도중 부상당한 부산교대 이경현양의 부상원인을 두고 법의학자 이정빈교수(서울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간에는 팽팽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이교수는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았거나 넘어지면서 돌에 찧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 반면 인의협측은 경찰의 방패에 의한 상처로 봐야 한다고 상반된 견해를 폈다.

시국사건과 관련된 의문사의 경우 법의학자는 권력과 여론 양쪽의 압력에 밀려 소신을 펴기가 힘들었다. 이정빈교수도 그후 인의협주체 학술강연에서 "법의학자는 해방 이후 40여년 동안 권련의 압력으로 양심껏 소신을 발표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학문자체도 위축됐다"고 토로했다.
 

고뇌하는 과학자^박종철군 부검 당시의 일기장을 공개한 후 대검조사를 받기위해 출두한 황적준박사.
 

첨단과학의 뒷그늘-도청논쟁

근래에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강렬한 문제점을 던져준 사건은 소위 '블랙박스 도청'이라 불리운 전화도청장치의 개발여부였다. 안기부의 의뢰에 따라 전자통신연구소에서 개발한 이 장치가 전화도청에 쓰였는지에 국정감사의 초점이 모아졌고 온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연구소측은 46억원을 들여 은밀히 개발한 이 프로젝트가 국가 2급비밀에 속한다며 국회에 밝히기를 거부했다. 더구나 국회의원들이 과학기술에 무지한 점을 십분 이용, 어려운 용어와 복잡한 설명으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

안기부나 치안당국이 특정인물이나 단체의 전화를 도청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단지 이러한 장치가 첨단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컴퓨터의 힘을 빌어 보다 대뷰모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장치의 개발에 과학기술자들이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없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뿐이다.

지난 9월 전자통신연구소 국정감사에서 이 장치의 개발책임자로 알려진 강철희박사는 의원들이 연신 '블랙박스'를 거론하면 질의를 할 때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왜 진지하지 못하냐"고 묻자 그는 "'블랙박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모뎀의 일종인 '비음성통신용 전송품질 측정시스템'을 개발했을 뿐"이라며 이 문제에 쏠린 국민적 관심을 일부러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다. 반면 젊은 연구원들이 중심이 된 전자통신연구소 노동조합은 이와 관련한 성명서에서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을 방패삼아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계적인 과학기술자의 모습을 부정한다"고 천명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80년대 과학자의 양심을 테스트한 장본인 도청장치로 알려진 불랙박스
 

법정으로 비화된 왜곡발표

연구결과늘 실제보다 과대포장해서 마치 획기적인 성과인양 발표한 경우도 80년대 과학계를 뒤돌아보면 적지 않았다. 흔히 '국내 첫개발' 이니 '세계 몇번째'라는 수식어가 붙은 연구성과가 얼마 후에 '뻥튀기' 과장발표로 드러나 망신당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지난 4월 해외에서 상온핵융합실험에 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국내에도 윤경석박사팀(과학기술원) 이규호박사팀(화학연구소)이 각각 '폰즈·플레이시먼 방법'과 똑같은 결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어 열린 물리학회 학술발표에서 "핵융합의 결정적인 증거인 중성자가 검출되지 않았다"는 반론에 부딪혔고 내막을 알아본 결과 과기처의 긴급지시에 의한 졸속한 초보적인 실험에 불과했단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7월 과학기술원 김명환교수팀이 개발했다고 발표한 슈퍼컴퓨터도 과장발표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미·일에 이어 '세계 3번째로 개발됐고 노드(node)수를 증가시킬 경우 기존 슈퍼컴의 성능을 능가할 것"이라는 발표와는 달리 실제 성능은 중형컴퓨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단지 '하이퍼큐브방식'이라는 슈퍼컴연구의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이 특이한데 그조차도 해외에서 상용화된 사례가 없고 연구실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며 국내에도 포항공대 방승양교수팀이 연구한 바 있어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과장발표의 사례는 이외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없이 많다. 초보적인 실험성과에 불과한 항생제를 마치 당장 만병통치약으로 생산가능한 것처럼 선전하는가하면, 세계적으로 개발된지 오래된 신소재를 국내에서 단지 모방연구했으면서도 획기적인 연구결과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심지어 수년전 어느 컴퓨터전시회에는 외제 32비트 퍼스컴이 외양만 바꿔 마치 자사에서 개발한 것처럼 전시됐다가 들통나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과장해서 발표하는 원인은 대부분 명예욕과 연구비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기업간 과열경쟁 및 정책당국자의 '한건주의'식 실적위주의 사고도 이러한 현상을 빚어낸다. 또 언론의 무지에 의한 과장보도도 이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과장발표와는 다르지만 특정기업의 이익을 위해 과학자가 허위사실을 유표했다가 말썽을 빚은 사례도 있다. 식품포장재 랩에 대한 유해성 여부논쟁이 한창일 때 고영수교수(건양대 식품영양학과)는 89년 3워 '국내외 랩의 성부분석에 대한 보고회'를 거처 "PE(폴리에틸렌수지)랩에 발암물질인 산화방지제 DLTP가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가소제 첨가로 인해 열세에 놓여있던 PVC랩생산업체들은 PE랩에 대해 일대 반격을 폈다. 그후 PE랩 생산업체 크린랩측의 고소에 따라 검찰이 조사한 결과 고교수는 랩의 성분 분석실험을 직접 하지 않고 일본의 한 식품위생연구소에 의뢰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본연구소 쪽은 재질분석결과 DLTP가 검출되지 않았으며 산화방지제가 발암물질이라는 분석결과도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유난히 식품약품의 유해논란이 잦았던 80년대에 이 사건은 과학자의 자세에 대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우리시대 과학자의 자회상은?

2차대전 중 하버드대에서 네이팜탄을 개발한 화학자 '피저'는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된 이 폭탄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긴박한 기술적 문제를 연구했을 뿐, 그 결과는 알바가 아니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과학자의 가치중립성이 어차피 사회적 책임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과학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원자폭탄개발에 참여했던 아인슈타인 사하로프 등이 벌인 반핵운동이 그렇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젊은 과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환경·과학기술운동이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체르노빌참사 이후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에 대해 국내에도 비판적 여론이 높아가고 있지만 정작 목소리를 높이는 측은 비전문가들이고 내용을 아는 과학기술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미국의 통신개방압력으로 우리 산업의 '중추신경'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지만 전문가들은 정보통신의 '무국적(無國籍)성'을 거론하며 오히려 느긋하다.

수소폭탄제조에 가잔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역설했던 사하로프가 그의 저서에서 내린 다음과 같은 과학의 개념은 우리시대 과학자의 자화상과 관련, 깊이 음미할만하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편견이 없다는 전제와 공개토의와 결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사실과 견해를 깊숙히 분석하는데 바탕을 둔 방법이다."

자연과학과 가치중립

오늘날 과학기술자의 윤리적 갈등은 사회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과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진리의 탐구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면서 가장 존중돼야 할 가치있고 아름다운 일이라 여겨진다. 원래 자연의 비밀을 탐구한다는 뜻에서 시작된 '자연과학'의 방법은 다른 학문의 모범처럼 되어 다른 연구분야도 모두 '과학'임을 표방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인문과학'이니 '사회과학'이니 하는 말들이 '자연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른 것이다.

흔히 우리는 과학은 이렇게 값진 것이지만, 과학하는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객관적이어서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한다. '인문'과학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사회'과학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것과는 달리, '자연'과학은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발견하는 진리란 인간의 가치와는 상관이 없는 순수하게 객관적 진리이며,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방법 또한 인간의 가치문제를 떠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구로 발달되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 (자연)과학은 그 목적 대상 방법등이 모두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이다. 기초과학을 흔히 '순수'과학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진리는 인종 국가 민족을 초월한다

2천년 전 동양의 고전 '회남자'(淮南子)가 우주의 모습을 설명했을 때, 그리고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생명체의 분류를 시도했을 때, 그 동기는 '순수'했고 그 목적은 진리의 탐구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1609년 이탈리아의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만들어 달과 우주를 관찰하고 기록했을 때, 그리고 1610년 조선왕조의 허준(許浚)이 여러 해의 연구끝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을 때, 갈릴레오는 천문학과 허준의 의학은 모두 객관적 진실만을 밝히려는 순수한 것이었다. 도대체 '갈릴레오의 천문학'또는 '허준의 의학'이란 표현이 알맞지 않을 정도로 원래 과학의 내용은 그것을 발달시키는데 기여한 과학자의 냄새를 갖지 않는 법이었다. 일단 과학의 전당에 진리로 받아들여진 다음에는 그 진리는 인종 국가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것이라 인정되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진리의 탐구라는 과학의 모습은 19세기 이래 날로 바뀌어 가고 있다. 과학의 발달이 기술과 연결되어 막강한 힘의 원천으로 바뀌면서 그 모습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본래 순수했던 과학의 연구결과는 다음 순간 새로운 기술로 탈바꿈하여 이용되기 시작했다. 본래는 진리의 탐구 그 자체가 값진 것으로 여겨져 과학에 종사하던 아마추어 과학 대신에 직업으로서의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손을 잡게 되었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엄격히 구분하기는 점차 어렵게 되었다. 과학은 이제 인간사회의 윤리적 갈등 속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기술자와 윤리적 갈등의 문제는 이 때부터 점차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고대의 과학자에게도 윤리적인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프롤레마이오스는 관측 자료를 조작하여 자기 이론을 정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갈릴레오 또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실험을 한 것처럼 과장한 것으로 밝혀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고대 과학자의 윤리적 문제는 순전히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일 뿐이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과학자는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성실하다는 그릇된 믿음을 알고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 기술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볼 때 고대의 과학자가 그들의 세속적 명예를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고 남의 자료를 훔치는 일이 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나 오늘날 과학기술자의 윤리적 갈등은 그와 같은 개인의 도덕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18세기 이래 과학기술은 산업발달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사회에서 과학 기술자는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제공하여 그 대가를 얻어먹고 살게 되어 있다. 그 대신 그들의 지식은 정치 경제 행정 군사 지도층에 의하여 활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과학기술자와 윤리문제의 갈등의 첫째 핵심이 있다. 즉 과학기술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의 전문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식을 공급하는 자리에 만족하면 그뿐이지 그 지식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나라에 따라서는 과학기술자들의 행정 등의 참여가 높은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는 기본정책의 결정으로부터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어느 분야를 우선적으로 연구개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도 과학기술자들 자신들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정책적으로 좌우되는 수가 많다.

현대국가의 과학기술자들은 이런 국가적 정책에 따라 보다 많은 연구비가 배정된 분야에 뛰어들어 자기의 전문적 지식을 십분제공하여 실리를 취하면 그만이게 순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 속에서 과학기술자들은 적당한 정도의 무책임을 부르짖으며 '순수'연구에만 몰두할 수가 있다. 어차피 자기 연구는 순수한 과학기술상의 연구일 뿐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자기 밖의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자기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중성

과학기술자와 윤리문제의 두번재 핵심은 거대한 과학기술체제에 있다. 고도의 발달로 인하여 오늘의 과학기술자는 누구나 극히 미세한 작은 분야의 전문가로 훈련될 뿐이다. 게다가 효율성을 내세워 자꾸 공룡처럼 거대화해 온 정부 산업 군사 구조 속에서 과학기술자들의 위치란 실로 왜소하기 짝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오늘의 과학 기술자란 거대한 사회체제 속의 작은 부분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꼭 50년 전인 1939년 8월2일 루스벨트 당시 미국대통령에게 원자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무게있게 미국의 국방정책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무게가 미국국방부를 움직일 수 되었던 것은 서로의 이해가 일치할 때 뿐 일단 개발된 핵무기는 아인슈타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에서 실험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뜻과는 반대로 원자탄은 날로 발달해갔다. 소련과 프랑스 중국 등이 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핵폭탄 속에 파묻게 되었다.

현대판 중인계급

서양 여러 선진국 과학자들은 개인적으로나마 현대과학기술의 윤리적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여 50년대에는 핵무기반대운동, 60년대에는 월남전에서의 네이팜탄사용 반대운동, 70년대에는 공해추방운동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작은 부품으로서의 과학기술자들이 힘을 모으지 않아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인식속에 몇가지 규제적 운동을 포함한 적지 않은 과학기술자운동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아직 그들의 윤리의식, 또는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해 깊이 생각할 계기를 갖지 못한 채 잘 길들여진 체제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과학기술자란 양반지배체제 아래 봉사하여 물질적 안녕을 보장받는 중인(中人)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과학기술자들은 현대판 중인계층을 만들고 있음을 간파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윤리의식에 둔감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과학기술의 개발과 이용체계의 이중성(二重性)이 강할수록, 그리고 거대과학의 규모가 클수록, 과학기술자의 윤리의식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바로 그런 구조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교육은 과학을 사회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진리탐구라는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다. 최근 민주화 물결과 함께 청년 과학기술자들 사이에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그 나름의 윤리의식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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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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