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 통치가 한창이던 1927년 어느 늦은 겨울 경성 YMCA앞. 호기심 가득한 수백개의 눈망울들이 탁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에 집중돼 있다. 잠시후 몇시 정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작은 상자가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JODK’라는 아나운서의 말끄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여기저기서 ‘우와’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지게꾼들은 그저 서로 바라보며 놀란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뒤에서 팔짱낀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던 양반네들도 눈앞의 이 진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놀라운 소식은 팔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라디오 시대의 개막, 한국의 방송은 이렇게 경이와 탄성 속에 기지개를 켰다.
그로부터 80여년. 라디오에 이어 흑백 TV를 거쳐 컬러 TV의 시대가 차례로 열렸다. 지난 2002년부터는 고화질 디지털 TV방송이 시작됐다. 그 사이 위성 방송은 물론 케이블과 인터넷 방송이라는 새로운 매체들도 생겨났다. 휴대폰으로 방송을 보는 일이 이제는 더이상 새롭지 않은 시대다.
이런 가운데 방송의 기존 개념을 완전히 흔들어 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방송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꿈의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듣는 방송에서 보는 방송으로, 이제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방송의 시대다.
똑똑한 방송
DMB는 말그대로 움직이며 TV와 라디오, 멀티미디어 동영상 시청이 가능한 방송이다. 탁자 위 전화가 개인 휴대용품으로 발전했듯 TV수상기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고화질 TV 프로그램과 컴팩트디스크(CD)수준의 음질, 각종 멀티미디어 정보를 개인 휴대 단말기를 통해 시청한다는 것. 이것이 꿈의 방송 DMB시대의 일상이다.
DMB가 시작되면 아날로그 TV보다 더 선명한 화질의 동영상 방송과 CD음질을 능가하는 스테레오 음악 방송이 제공된다. 또 이들 방송과 함께 단계적으로 다양한 부가서비스들이 새로 선보인다. 대표적인 DMB 부가서비스로는 방송프로그램안내, 방송웹서비스, 교통·지리 정보 등이 손꼽힌다.
무엇보다 DMB의 경쟁력은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선명한 화질의 TV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자신의 휴대 단말기를 통해 좋아하는 방송을 언제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다. 산책 중에는 물론 시속 1백km로 달리는 차에서나 대표적인 난청지역으로 꼽히는 도심의 버스에서도 TV드라마 시청이 가능해진다. DMB가 ‘이동형 멀티미디어방송’이라는 또다른 별칭을 가진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DMB는 또 이동통신과 결합한 최초의 방송이다. 수신만 가능했던 기존 방송과 달리, 양방향 통신을 통해 설문 조사, 인기 투표나 즉석 퀴즈에 바로 참가할 수 있다. 전자상거래 기능을 이용할 경우 TV시청중에도 광고에 나온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또 여행중 자신의 위치에 맞는 길 안내를 받을 수도 있으며 목적지 정보를 얻기도 한다. 단말기로 방송웹사이트에 접속해 마치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듯 최신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아울러 DMB는 기존 방송을 혁신할 확실한 대안이다. 우선 기존 TV방송보다 더 나은 화질과 FM방송을 능가하는 음질을 제공함으로써 방송의 품질을 한차원 높이게 될 것이다. 또한 서로 다른 형식의 멀티미디어들이 하나로 통합된 새로운 방송의 출현도 예고한다. 음악을 들으며 스튜디오에 나온 게스트의 모습을 보거나 동시에 관련 웹사이트를 검색하는 방송은 얼마든지 출현 가능하다. 보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DMB의 또 개인을 겨냥한 방송이라는 점이다. DMB수신을 위해 앞으로는 누구나 휴대폰처럼 개인 휴대형 TV단말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가족끼리 리모콘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도 이제 얼마 뒤면 사라질 풍경이다.
미국식 유럽식 모두 거부한 독창적 방식
이렇듯 DMB는 기존 방송과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다. 단순히 FM라디오의 디지털 버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텔레비전 서비스와 같은 것도 결코 아니다. 한국의 DMB를 미국이나 유럽에서 실시하고 있는 고선명 방송(HD radio)이나 디지털오디오방송(DAB)과 비교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90년대 중반 유럽식 DAB를 도입하는 방안이 심도있게 논의됐었다. 그러나 DAB의 본산 유럽에서의 상용화가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도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 기존 FM방송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에 새로운 오디오 방송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결국 DAB를 능가하는 획기적인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방안이 고음질 라디오에 고화질 동영상 서비스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이를 완벽하게 구현할 기술이 준비돼 있지 못했다. 고화질 동영상 전송에 핵심인 압축기술이 개발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술인 MPEG-2만으로는 좋은 화질을 제공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 뒤 MPEG-4 AVC라는 새 압축 표준이 완성되면서 문제는 해결됐다. 이 압축기술은 MPEG-2보다 3-4배 압축률을 높였던 것이다. 선명한 음질과 화질을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도입 논의가 고개를 들었다. DMB란 새로운 용어가 생겨난 것도 이처럼 멀티미디어적인 측면이 강조됐기 때문이다. 결국 DMB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는 없는 새로운 형태의 방송을 일컫는 말로 자리잡았다.
지상파와 위성 두가지 방식
DMB는 지상 전송과 위성 중계 두가지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나는 보통의 방송처럼 방송국에서 쏘는 전파를 수신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위성에서 쏜 신호를 수신하는 방식이다. 두 방식은 서로 경쟁한다기 보다 상호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지상파 DMB는 일반 TV 주파수를 이용해 선명한 화질을 제공하는 일종의 디지털 TV방송이다. 탄생에는 이동성 수신 문제가 크게 고려됐다. 현재의 TV 전송 방식인 미국 NTSC방식은 달리는 차속에서 선명한 화질의 방송을 시청하지 못한다. 전파가 건물에 부딪히면서 발생한 반사파가 정상파 간의 차이로 화면 떨림이나 잔상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 추진 중에 있는 디지털 TV 전송 방식에서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게다가 가장 많이 보급돼 있는 휴대 전화는 비싼 통신료와 몇가지 기술적 문제로 아직까지 방송 수신용으로는 그리 적합하지 못한 형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편리한 통신 수단을 원하고 있다.
다양한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손쉽게 이용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지상파 DMB만이 이에 대한 명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방송과 통신의 특성을 한데 섞어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싼 가격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똑한 방송’’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등 지상파 DMB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다양한 것도 그리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한편 위성 DMB는 위성방송의 한종류로 생각하면 된다. 위성 DMB는 다시 위성안테나를 통해 직접 수신하는 방식과 위성 중계국의 중계를 통해 간접 수신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위성안테나는 휴대하기엔 너무 크기 때문에 직접 수신 방식은 아마도 차량이나 가정에서 채택될 확률이 크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지상 중계방식을 주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지상파 TV와 위성 TV간에 차이가 있듯 지상파 DMB와 위성 DMB 간에는 몇가지 차이가 있다. 우선 지상파 DMB는 일반 방송처럼 무료인 반면, 위성 DMB는 유료 서비스다. 위성 DMB설비를 갖추는데는 그만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또 지상파 방식은 방송 채널수가 한정돼 있는데 반해 위성 방식은 비교적 많은 채널로 방송을 내보낼 수가 있다. 서비스 범위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지상파 DMB가 FM라디오 수신 지역을 서비스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위성 DMB는 전국을 시청권에 둔다.
표준화가 숙제
DMB가 꿈의 방송이라 해도 실현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할 절차들이 남아있다. 그중 가장 까다로운 단계가 기술을 표준화하는 일이다. 국제적인 조약과 국내 법규에 제한을 받는 통신처럼 방송도 엄격한 규정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시작되는 방송인 만큼 우리 실정에 맞는 최적의 기술을 고르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일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현재 지상파 DMB의 표준은 유럽 표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레카-147이라고 불리는 이 표준안은 유럽연합(EU)이 추진했던 프로젝트 이름에서 따왔다. 멀티미디어 데이터의 압축 표준인 MPEG을 사용해서 오디오와 동영상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주요 목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국내 표준은 유럽 방식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최초의 멀티미디어 방송인 까닭에 그만큼 최신 기술들과 표준들이 적용됐다.
2002년 5월부터 시작된 지상파 DMB표준 초안 작업은 2003년 10월까지 진행됐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방송 표준 방식 및 방송 업무용 무선 설비의 기술 기준 개정을 위한 DMB 규정에 대한 초안’이다.
초안에 따르면 지상파 DMB는 오디오, 비디오, 그리고 데이터 서비스로 구성되며 FM라디오에서 쓰고 있는 초단파 대역을 방송 주파수로 사용한다. 또 최소 6개 채널을 통해 고화질 동영상과 고음질 오디오를 제공한다는 기준을 채택했다. 한편 위성 DMB의 경우 현재 일부 통신 회사들을 중심으로 기술 표준과 서비스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04년 첫전파 발사
예상처럼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올해 말 우리는 이 신선한 방송의 출현을 보게 된다. 또 2005년 1월에는 본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DMB사업의 막대한 성장 가능성이 있는 만큼 누가 이 방송을 서비스할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일 수밖에 없다. DMB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곳은 기존 방송사와 이동통신사를 비롯한 통신회사들이다.
지상파 DMB의 경우, 현재 KBS와 MBC, SBS 등 주요 방송사를 주축으로 연구와 서비스 개발이 한창이다. 방송제작에 필요한 제작과 송중계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사들은 동영상·라디오 등 기본 방송 외에도 교통정보안내나 방송웹서비스 등 부가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특히 높다. 위성 DMB쪽에서는 이동통신사와 통신회사들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 이동통신 설비나 초고속 인터넷 설비를 활용해 방송·통신 융합시대에 걸맞는 신규사업을 벌이려 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상파는 1개 주파수에 4-5개 채널, 위성의 경우 40여개의 채널이 준비되고 있다. 이들 채널을 통해 영화 음악 공연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방송과 멀티미디어 서비스가 제공될 계획이다.
한편 DMB를 수신하려면 전용 수신기가 있어야 한다. 수신기는 현재 PDA와 결합한 실험용 제품이나 일부 전용 단말기 시제품들이 나와 있다. 본격적인 보급형 수신기의 경우, 제품 소형화의 핵심인 시스템온칩(SoC)기술이 적용된 단말기들이 올해말 나올 예정이다. DMB단말기는 차량 탑재형이나 개인 휴대형, 가정 등 사용자에 따라 나뉘거나 노트북PC형, 휴대폰 결합형, 저장장치(PVR) 내장형 등 기능에 따라 나뉘기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수신기 가격 때문에 차량용이 주류를 이루겠지만 점차 휴대형 수신기가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개인이 하나쯤은 갖고 있는 휴대폰과 합쳐질 경우 DMB확산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물론 채널과 사용자가 늘어나면 그만큼 다양한 콘텐츠와 새로운 서비스가 나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세계 최초의 멀티미디어 방송
지상파 DMB사업은 두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먼저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DMB를 최초로 상용화하는 첫번째 나라가 된다. 비교적 디지털 방송을 일찍 시작한 유럽도 열차같은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 시험 서비스만을 실시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중국 일부 지역에서 지상파 DMB서비스를 개시한다는 얘기도 들려오고는 있지만, 우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형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마련된 지상파 DMB기술은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해 내놓은 최초의 표준안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의의를 가진다. 물론 각 부분별 표준은 국제 표준을 따르고는 있으나, 전체 시스템으로 보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디지털 방송 기술력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