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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둘러싼 거장과 신인의 싸움

‘검은구멍’ 이름 얻은 건 불과 40여년 전

블랙홀 상상도. 과학자들은 별을 삼킬때 발생하는 X선을 관측해 블랙홀존재 증거를 포착했다.


“우리 앞으로 ‘블랙홀’ 이라고 부릅시다. ‘중력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물체’ 라는 이름은 너무 길어요.” 1967년 미국 프린스턴대의 물리학자 존 휠러 박사는 뉴욕 암스테르담가의 우주물리학연구소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당시 블랙홀은 ‘얼어붙은 별’ (frozen star) 또는 ‘붕괴된 물체’ (collapsed object)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정확한 명칭이 없었던 만큼 그 존재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그 이름을 쉽게 부를 정도로 ‘유명인사’ 인 블랙홀이 불과 40여년 전에는 ‘무명인사’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2백년에 걸친 기존 과학이론과 새로운 이론의 대립, ‘거장’ 들과 ‘신인’ 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블랙홀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때는 1783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영국 지질학자 존 미첼은 왕립학회에 한편의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과 탈출속도를 이용해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만일 태양에 비해 지름이 5백배 크고 밀도는 동일한 행성이 있다면 이 행성에서 물체의 탈출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고, 이 때문에 이 행성에서는 빛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0여년 뒤인 1796년 프랑스 수학자 삐에르 시몽 라플라스 역시 ‘세계 시스템에 관한 해설’ 의 초판과 재판을 발행하면서 미첼과 비슷한 견해를 발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당시 과학계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빛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과학계에서는 빛이 입자라는 뉴턴식 사고대신 빛이 파동이라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빛이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결국 두 사람의 생각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이후 블랙홀은 과학자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블랙홀이 다시 과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로부터 1백20여년이 지나서였다. 여기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1915년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이듬해 당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독일 천문학자 칼 슈바르츠실트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이용해 블랙홀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밝혀냈다. 또 1930년 케임브리지에서 공부 중이던 20세의 ‘어린’ 과학자 수브라마냔 찬드라세카는 블랙홀이 이론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실체로도 존재할 수 있음을 밝혔다. 그는 백색왜성 문제를 다루던 중 태양 질량의 1.4배를 넘는 별들이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데 정작 블랙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아인슈타인과 중력에 의해 빛이 휘어진다는 것을 증명해 명성을 얻은 영국의 아써 스탠리 에딩턴 등 당시 내로라하는 과학계 ‘거장’ 들은 슈바르츠실트와 찬드라세카 등 신진 학자들의 블랙홀 이론에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블랙홀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블랙홀이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나섰다. 슈바르츠실트가 블랙홀의 이론적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구성한 별 모델이 몇가지 기술적인 측면에서 일반상대성이론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939년 수학연보에 ‘중력에 이끌리는 다체로 구성된 구상균형을 이룬 정지계에 대하여’ 라는 긴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슈바르츠실트가 이용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그의 이론을 반증하려고 했다.

에딩턴 역시 찬드라세카가 주장한 별의 무한붕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양자역학적 해석에 따르면 별이 무한히 수축되는 무한붕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이런 적극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젊은 과학자들의 블랙홀 연구는 계속됐다. 1939년 9월 1일 ‘피지컬 리뷰’ 지에 최초로 블랙홀의 생성과정을 밝혀주는 논문이 발표됐다. 저자는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더 유명해진 35세의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제자 하트랜드 스나이더와 함께 ‘연속적인 중력 수축에 관해’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이용해 태양보다 몇 배 무거운 별이 블랙홀로 운명을 종식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입증했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적용한 사례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계산에 필요한 기계식 컴퓨터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던 시절에 작성된 논문이었지만 오펜하이머의 증명은 블랙홀의 생성 원리에 아주 근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훌륭한 논문 한편으로 과학계 ‘대부’ 들의 완강한 반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들은 더 이상 블랙홀 연구에 매달릴 수 없게 됐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갔고, 아인슈타인 역시 전쟁을 거치면서 더 이상 블랙홀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거장과 신인의 ‘싸움’ 은 일단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 싸움은 신인들의 승리로 판명났다. 1960년대 펄서, 퀘이사 등 새로운 별들이 관측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해석하기 위해 블랙홀 이론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1939년 논문은 50년 후 이론적으로 틀렸음이 밝혀졌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블랙홀 연구를 중단시킨 장본인이지만 현대의 블랙홀 이론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전쟁 중 핵무기 개발과정에서 얻게 된 장비와 기술 덕분에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의 생성 과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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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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