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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라기 공원에 운석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진화는 진보인가, 아닌가

어느덧 다윈의 식탁 넷째날이 밝았다. 내일 하루는 쉬고 그 다음날에는 굴드와 도킨스가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들의 최근 저서에 관한 공개 강연회를 갖고 곧바로 종합 토론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이 주제 토론으로서는 마지막이다. 예고된 대로 오늘은 ‘진화와 진보’, ‘생명의 미래’에 관한 쟁점들이 다뤄질 예정인데, 이는 그동안의 토론을 마무리 해볼 수 있는 적합한 주제처럼 보인다. 도킨스(D)팀에는 영국 서섹스 대학의 이론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 교수가 참여하며 굴드(G)팀에는 미국 산타페에서 복잡계를 연구하고 있는 다니엘 맥셰이 교수가 합세한다. 오늘은 첫째날 진행을 맡았던 엘리엇 소버 교수가 사회를 보며, 셋째날과 마찬가지로 마이클 루즈 교수가 특별 손님으로 참여할 것이다.

사회자(소버): 오늘은 다윈의 식탁 넷째날이며 주제 토론으로서는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의 주제 토론들을 아우르면서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생명은 진보하는가?”라는 큰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를 ‘진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맞는 이야기인가요?

굴드(G팀): 몇년 전 대중 강연 후의 질의응답 시간이었어요. 한 초등학생 꼬마가 손을 번쩍 들더니 “박사님, 조금 전에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동물원의 원숭이들은 언제 사람이 되나요? 그 광경을 보면 얼마나 멋질까요!”라고 질문하더군요. (모두 웃음) 이 꼬마에게 진화는 최정점인 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였던 겁니다. 사실 이 꼬마뿐이겠습니까? 생명이 아메바와 같이 간단한 생명체로부터 시작해 원숭이를 거쳐 결국 가장 복잡한 인간으로까지 진화해왔다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돼온 낯익은 시나리오입니다.

루즈(특별 손님): 옳은 지적입니다. 사실 진보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무생물로부터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천사들에 이르는 ‘존재의 대사슬’을 일직선상에 놓고 인간을 자연세계의 최고 정점에 올려놓았죠. 다윈 이전의 프랑스 진화론자 라마르크도 이런 일직선상의 진화가 크게 두 종류, 즉 동물의 진화선상과 식물의 진화선상으로 나뉘어 진행돼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라마르크를 비롯한 19세기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보를 진화의 핵심으로 봤어요. 또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부분의 사상가들도 생물의 변화를 진보와 동일시했구요(그림 1).
 

(그림1) 존재의 대사슬과 다윈 이후의 종분화 개념


굴드(G팀): 동의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기도 했던 스펜서는 다윈이 고심 끝에 쓴 ‘수정이 가해진 상속’이라는 용어를 ‘펼침’의 뜻이 담겨있는 ‘진화’라는 용어로 대체한 후에 결국 그 용어를 정착시키기까지 했죠. 적어도 다윈 이전의 사람들은 생명이 어떤 목표점을 향해 진화한다는 생각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생명의 진화는 마치 사다리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는 것과 유사하며 인간은 그 사다리의 맨끝에 위치한 생명체였던 셈이지요.

사회자: 그렇다면 다윈은 진보 개념을 진화 이론에서 축출한 사람이라고 보면 맞나요? 이 부분은 아무래도 최근에 ‘모나드에서 인간까지: 진화 자연주의에서 진보의 개념’이라는 책을 쓰신 루즈 교수님이 답해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루즈(특별 손님): 통념과는 달리 대답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혁명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이론이 인간을 진보적 진화의 꼭대기에서 끄집어 내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다윈 자신은 생명의 진보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생명의 진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때는 마치 생명의 진보가 필연적인 듯이 말을 하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왜 다윈마저도 진보에 그렇게 집착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도킨스(D팀): 글쎄요, ‘집착’이라…. 생명 역사의 파노라마를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다.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생명체는 35억년 된 암석에서 발견된 박테리아입니다. 박테리아들로만 우글거렸을 생명의 초창기는 벚나무, 개미, 고양이, 사람 등 온갖 종류의 생물체들로 가득한 오늘날과는 너무도 다르죠. 이런 생명의 역사를 떠올리고도 어찌 진보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의 생명이 35억년 전의 그것에 비해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생명의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건전한 상식일 것입니다.

굴드(G팀): 하지만 문제는 건전한 상식도 종종 틀린 것으로 판명난다는 점이지요.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해왔을 것이라는 상식적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윈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생명의 진보를 ‘복잡성의 증가’에서 찾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즉 생명의 진화는 복잡성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며, 이 복잡성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생명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이건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에는 그런 추세가 없습니다! 단지 변이의 폭만 증가했을 뿐입니다. 도킨스 교수의 말씀처럼, 최초의 생명체가 막 시작됐던 35억년 전보다 현재가 생물종의 다양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저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종 다양성의 증가를 진화의 추세로 해석하면 큰 오산이죠. 저는 이 문제에 천착해서 ‘풀하우스’를 쓰기도 했죠.

사회자: 왜 오산이라는 말씀이신지요?

굴드(G팀): ‘술꾼 모형’으로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화면을 한번 봐주세요. 술에 만취한 한 남자가 술집에서 비틀거리면서 나옵니다. 그가 인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도랑이 나오죠. 그 도랑에 떨어지면 그는 정신을 잃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인도를 그가 아무렇게나 비틀거리며 이동한다고 합시다. 단 이 남자는 술집 벽 쪽이나 도랑 쪽으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대답은 간단하죠. 도랑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볼까요. 우선, 도랑 쪽이나 술집 벽 쪽으로 비틀거릴 확률은 모두 0.5로 서로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술꾼이 한쪽에 있는 술집 벽에 부딪치면 그냥 거기 있다가 도랑 쪽으로 다시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도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 남자는 그저 아무렇게나 비틀거렸을 뿐인데 외견상으로는 도랑 쪽을 ‘향한’ 이동처럼 보입니다. 왼쪽 벽이 결과적으로 이동의 방향을 정해준 셈이지요. 생명의 진화가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진행된 듯이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명도 ‘가장 간단한 형태’로 왼쪽 벽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왼쪽 벽은 물리화학적으로 가장 간단한 생명체의 공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술꾼이 도랑을 ‘향해’ 이동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더 높은 복잡성을 ‘향해’ 변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메이너드 스미스(D팀): 하지만 35억년 전 존재했던 가장 복잡한 생명체와 현재 존재하는 가장 복잡한 생명체(인간)를 비교해봅시다. 후자의 복잡도가 훨씬 높지 않겠습니까?

굴드(G팀): 물론 그렇습니다. 복잡성에 있어서 ‘최대값’은 분명히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최대값의 증가와 변이 폭의 확대가 곧바로 ‘추세’로 해석돼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닥을 친 주가는 상승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박테리아의 지위에 대해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생명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의 독무대였습니다. 화석기록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형태들만 고려한다면 박테리아는 최소 복잡성의 왼쪽 벽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생명은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됐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박테리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즉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서 복잡성의 평균값은 증가했을 수 있지만 이처럼 몹시 기울어진 분포에서는 그 값이 중심 경향성을 대변해주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최빈값이 더 적합한 척도가 됩니다. 그 값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는 언제나 생명의 성공을 잘 대변해주죠. 따라서 진화 역사의 몸통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를 간과한 채 꼬리 끝에 붙은 한 움큼의 털에 불과한 인간만 보고, 복잡성 증가를 진화의 추세로 삼는 것은 꼬리로 몸통을 흔들려는 잘못된 시도입니다.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진행됐다는 믿음은 통계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사회자: 마치 박테리아 찬가를 부르시는 것 같군요. 굴드 교수님은 박테리아의 대변인 같습니다. (모두 웃음)

맥셰이(G팀): 저는 다른 측면에서 굴드 교수님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복잡성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제 결론은 진화의 추세를 크게 ‘(무엇인가에 의해) 조종된 추세’와 ‘수동적 추세’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물의 진화 역사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는 수동적 추세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됐습니다. 다음 화면(그림 2)을 보시죠.
 

(그림2) 진화의  수동적 추세와 조종된 추세


왼쪽 수동적 추세 그래프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체 변이의 폭이 증가하긴 했지만 변이들이 여전히 가운데 축 주변에 몰려 있습니다. 비록 최대값이 오른쪽 그래프의 경우와 비슷하긴 하지만 최빈값은 ‘0’에 가까운 셈입니다. 반면 오른쪽 조종된 추세 그래프에서는 최빈값과 최대값이 모두 가운데 축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즉 오른쪽을 향한 추세가 있는 셈이지요. 진화에 정말로 방향이 있다고 한다면 오른쪽 그래프처럼 그려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왼쪽 그래프의 수동적 추세는 방금 전에 굴드 교수님이 비유하신 술꾼 모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도킨스(D팀): 당신 모형에서 복잡성은 어떻게 측정됐나요?

맥셰이(G팀): 저는 복잡성을 형태적 측면에서 정의하고 척추동물의 척추에 붙어 있는 작은 뼈인 추골들이 갖는 복잡성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측정·비교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다양한 척추동물들의 추골의 길이, 높이, 폭, 그리고 신경의 높이, 길이, 각도 등을 잰 후에 복잡성의 측면에서 어떤 추세가 있는지를 살펴봤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복잡성은 척추동물마다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즉 그것이 수동적 추세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저는 진화에 방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실제로 무언가가 증가할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나 그 무언가가 과연 복잡성인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도킨스(D팀): 저는 진화의 추세를 강하게 거부하는 두분이 모두 진보를 복잡성의 측면에서만 바라봄으로써 여전히 인간 중심적 편견에서 갇혀 계신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복잡성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문제는 언제나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죠. 저는 이런 시각이 탈색된 진보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진보에 대한 적응주의적 견해인데, 진보를 복잡성이나 지능 등의 증가로 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의 성공적 적응에 기여하는 특성들이 축적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예컨대 여러 계통들에서 발생한 눈의 진화가 바로 진보적 진화 과정의 명백한 사례입니다. 사람이든 거미든 형태는 다를지라도 빛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을 진화시킨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진화가 가능하려면 각 계통들에서 시각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조건이 돼야 하죠. 물론 그렇게 되려면 환경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일정하게 유지돼야 하구요. 만일 영장류 계통에서 갑자기 작은 두뇌 크기가 유리한 상황으로 환경이 바뀌었다면, 그런 환경 변화에서 진화는 진보적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굴드(G팀): 그 보십쇼. 교수님도 진화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보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일 공룡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쥐라기에 소행성 충돌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때 쥐새끼 만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어쩌면 아직도 어두운 동굴 속에서 벌레나 잡아먹고 있을지 모릅니다.

도킨스(D팀): 말을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런 식의 진보가 길어야 수백만년 정도 지속될 뿐이라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갑자기 멸절이 일어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내용의 진보가 계속되곤 했을 겁니다. 공룡들의 천국인 쥐라기 공원에 떨어진 거대한 소행성이 바로 그런 계기를 만들었겠죠. 하지만 이것은 진보적 진화의 한가지 실체일 뿐입니다. 다른 유형의 진보도 가능합니다. 좀 어렵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화능력 자체가 진화함으로써 진보가 가능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최초의 복제자에서 염색체가 생기고, 이어서 원핵세포, 감수분열과 성, 진핵세포, 그리고 다세포 등이 출현했던 생명의 거대 파노라마를 떠올려 보세요. 지금 열거한 사건들은 진화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엄청난 대사건들입니다. 이런 대단한 사건들을 통해 진화능력 자체가 실제로 몇단계 상승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진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는 일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다세포 생명체 또는 체절을 가진 생명체가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후에, 진화는 그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몇차례의 대사건들이 생명의 진화에서 ‘비가역적인 진보적 혁신’을 몰고 왔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이너드 스미스(D팀): 도킨스 교수님이 방금 전에 분수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저도 생명의 진화에서 그런 분수령이 되는 사건들이 최소한 여덟차례 발생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와 헝가리 출신의 고등과학원 이론생물학자인 외르시 서트머리 교수가 쓴 ‘진화에서의 대전환’에 나와있는데요, 간단히 열거해보겠습니다. 첫째, 자기복제 분자에서 원시세포 속의 분자군으로, 둘째, 독립적 복제자에서 염색체로, 셋째, 유전자와 효소로서의 RNA에서 DNA와 단백질로, 넷째,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 다섯째, 무성생식적 클론에서 유생식식적 개체군으로, 여섯째, 원생생물에서 동식물과 균류로, 일곱째, 고독한 개체에서 군체로, 여덟째, 영장류 사회에서 인간 사회로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한번 전환이 일어나면 거의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다세포 생물은 단세포 자손을 가질 수 없으며 진핵생물은 원핵생물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식이죠. 이런 의미에서 굴드 교수님이 아까 비유하신 술꾼 모형은 생명의 진화 모형으로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전환 문턱을 넘기까지는 무작위적으로 비틀거릴 수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문턱을 넘어서서 생명의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되면 그 이전 과정으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자: 마치 왼쪽 벽에 해당하는 술집이 몇번의 전환기를 넘을 때마다 점점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는 주장처럼 들리는데요, 그런 말씀입니까?

도킨스와 메이너드 스미스(D팀): 예, 바로 그것입니다!

사회자: 이거 어쩌죠. 이제 시간이 채 2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굴드 교수님과 도킨스 교수님께 짧게 한마디씩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루즈 교수님께서 마무리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킨스(D팀): 진화의 역사에서 생명의 무한한 변이 공간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합니다.

굴드(G팀): 아직도 지구는 박테리아의 세상일뿐입니다.

루즈(특별 손님): 우리는 오늘 ‘생명이 특정한 추세를 보이며 진화해왔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논쟁을 대략적으로 살펴봤습니다. 다윈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했었고 다윈의 후예들은 주로 복잡성의 증가로 이 문제를 환원해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합의된 견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토론회에 참석하신 굴드 교수는 복잡성의 증가가 통계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계신 반면, 생명 진화의 분수령들에 주목하는 도킨스 교수는 어떤 의미에서 진화가 진보임을 받아들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진보적 진화를 열렬히 옹호해온 하버드 대학의 윌슨 교수는 최근에 한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하더군요. 그것은 ‘성공’과 ‘지배’를 구분해서 보자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성공은 어떤 종의 계통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돼왔는가로 정의되는 반면, 지배는 다른 계통들에 미치는 생태·진화적인 영향력으로 정의됩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성공한 종이라고 보긴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지배의 측면에서는 인간까지의 진화가 진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진화와 진보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진보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복잡성의 증가인지, 아니면 적응성의 증가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무엇인지….

사회자: 예, 잘 정리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다윈의 식탁 넷째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두분 교수님을 비롯해 지난 나흘 동안 토론자로 참여해주신 여러 교수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일 하루는 쉬고 그 다음날 런던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진화는 진보인가, 아닌가?’라는 물음 속에 이렇게 복잡한 논의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에놀랐다. 그동안 학생들에게“진화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단순 명료하게 가르쳐온 내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보와 진화의 관계에 관한 이런 치열한 논쟁이과연 경험의 법정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생명의 진화와 그 진화의 양상에 대해 의문을 달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정치∙경제∙문화 등 거의 모든측면에서 여전히 진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서있다는 생각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어떤 꼬마가 동물원의 원숭이는 언제 사람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듯이,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다윈 자신도 진보의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 했듯이, 현대의 과학자들도 어쩌면 이미 내면화된 진보관과 다양한 생물학 이론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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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정대익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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