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새 지평을 연 아인슈타인 박사. 모든 과학자의 우상이며 20세기의 대표적인 위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도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지는 못했다. 사적으로는 평균이하(?)였던 아인슈타인의 삶이 집요한 추적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공개됐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인슈타인의 사생활' (동아일보사 출판부 간)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에 헌신한 세속화 시대의 성자! 이것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초상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과학의 기초를 뒤흔들었던 1905년 당시 아인슈타인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러나 그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모습은 그로부터 반세기 이후의 얼굴이다. 너무나 자주 등장하여 달리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으로, 헝클어진 머리는 길게 늘어져 신비한 후광을 풍기고 이마의 주름살은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도덕의 영역에서까지 일정한 경지에 이른 한 인간의 겸허하고 평온한 모습이다.
아들의 평가는 달라
그러나 이런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아들 한스가 알고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한스에게 아인슈타인은 공적으로 말하는 것과 사적으로 말하는 것이 다르고 밖으로 드러난 달관한 듯한 모습으로 내적인 혼란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육친이나 친지와 같은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참모습은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그의 편지들이 출간되면서 기존의 아인슈타인 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출간된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은 풍부한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가 과학자로서는 위대한 천재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부도덕하고 비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면 보통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나아가서 과학적 성과와는 별도로 '인간 아인슈타인'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이 이토록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일화로 보아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 책은 이른바 '아인슈타인 사도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아인슈타인 출판물의 저작권을 가진 유산집행인 헬렌 듀카스와 오토 나탄이 그의 명성에 흠이 되는 문서는 한사코 감추거나 심한 경우 폐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아인슈타인의 아들조차 이들의 소송 제기로 서한집의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이미 5년 전에 타계한 듀카스를 따라 나탄이 사망하자 아인슈타인 연구가들은 "모두가 기뻐했다"고 한다. 이들의 죽음으로 창고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기 시작했고, 보스턴대학 아인슈타인 문서사업단의 선구적인 노력으로 인간 아인슈타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출간도 이같은 일련의 아인슈타인 재평가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이 원래 기획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첫부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였다. 그러나 자료 수집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난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은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정도로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 그의 일생은 사생아 출산, 이혼과 재혼 그리고 끊임없는 여성편력, 자녀들과의 불화, 친구와 동료들과의 껄끄러운 관계로 점철되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그의 삶의 개인적인 측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로 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도덕성 문제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의 저작권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상대성이론의 윤곽을 처음 잡을 때 밀레바의 힘을 얼마나 빌렸는가 하는 문제이다. 초창기에 그는 상대성이론을 '우리들의 논문'이라 지칭했고 밀레바를 '나의 오른팔'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밀레바의 일정한 역할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상대성이론에 대한 밀레바의 공헌과 관련한 갖가지 논란을 소개하면서 그녀의 역할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하고 있다.
상대성이론 창안자
1990년 뉴올리언스에서 개최된 미국 과학발전협회 연차대회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세르비아의 전기작가 데산카 트르부호비치 - 기유리치는 "밀레바의 지혜가 논문의 각 줄마다 스며있다"고 주장 했다. 그는 1969년 세르비아에서 출간한 밀레바의 전기(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그늘 아래서)에서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다. 워크암연구소의 에반 헤리스 워크 박사도 "밀레바가 이 이론의 창안에 1등 공신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그녀를 변호하고 나섰다.
이런 주장에 대해 보스턴 대학의 존 스태철 교수는 공동연구의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워커 박사는 "아인슈타인은 이론의 종합적인 형식만을 제공했을 뿐이며 기본개념은 밀레바가 창안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언어학자인 센타 트뢰멜 - 플뢰츠 역시 "남자가 부인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아인슈타인도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워커 박사를 두둔하고 나섰다.
스태철 교수는 부인의 공을 가로채는 남자가 흔히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독일 천문학자 마리아 빈켈만이 1702년 혜성을 발견했을 때 처음 영예를 얻은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몇편은 누이동생 파니의 작품이었다. 또한 퀴리 부부와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긴스와 그의 아내 마가렛의 경우처럼 부부 공동연구의 사례도 풍부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밀레바가 공동연구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내 마누라가 내 수학"
1943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전비 마련을 위한 경매에 상대성이론 원본을 희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는 있으나 그의 성격으로 보아 단순히 수리계산을 위한 쪽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는 비서가 받아 적게 하여 경매용 논문을 다시 썼는데, 이 사실은 오직 그가 그것을 썼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대성이론의 탄생에 대한 밀레바의 공적을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밀레바는 창조력의 원천은 아니었다 해도 아인슈타인의 충실한 조력자이며 지지자였다는 것이 이 책 저자들의 주장이다. 밀레바는 횡설수설하는 아인슈타인의 독백을 들어주는 청중 역할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토론자로 나서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료 수집, 사실 검색 등 학창시절 하던 아인슈타인의 과학비서 노릇을 여전히 수행했다는 것이다.
"내 마누라가 나의 수학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친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손자 파울 아인슈타인에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한스를 인터뷰한 전기작가 피터 미첼모어가 내놓았다. 그는 한스의 증언을 기초로 상대성이론의 마지막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밀레바는 그가 수학문제를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신선한 개념의 흐름인 창조적 작업을 도울 수는 없었다.(중략)광범위한 이론적 개념을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형식으로 옮기는 것은 5주일을 잡아먹는 작업이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아인슈타인은 파김치가 되어 2주일 동안 잠만 잤다. 밀레바는 그 논문을 거듭 검토한 후 우송하였다."
이것은 밀레바가 아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는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남편이 상대성이론의 기본개념을 창안하고 집필에 전력을 다한 반면 자신은 잘못을 바로잡고 교정을 보는 것과 같은 미미한 일 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밀레바의 상대성이론 공동저작권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그녀가 한때 뛰어난 학생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덟살 때 이미 지식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밀레바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이른바 영재교육을 받게 된다. 결국 자그레브 왕립 인문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특별허가를 얻어냄으로써 소년들과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최초의 여자 고등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밀레바는 이 학교에서 남학생과 함께 물리학 수업을 받는 특별허가를 받아내기도 했다. 1930년대 빈에서 학창생활을 보낸 홀튼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입증해준다.
"나는 인문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물론 소년들만의 학교였다. 같은 반에서 여학생과 함께 공부하다니. 아니 그럴 수가 있는가. 기괴한 일이다. 더 나아가 물리학을 배우겠다고 나섰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밀레바는 최종 시험에서 수학과 물리학에서 최고상을 받는 영광을 차지했다.
밀레바는 마침내 19세기 초 유럽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받아들인 취리히대 의대에 진학해 한 학기를 마치고는 아인슈타인이 다니던 스위스 연방종합공대로 옮겼다. 당시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중앙유럽의 엘리트 코스인 기술학교에 여성이 입학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겨울학기를 마치고는 되돌아와 아인슈타인과 함께 계속 공부하게 된다.
어릴 때 정말 둔재였나?
한편 아인슈타인이 국민학교 시절 명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흥미로운 얘기이다. 그의 여동생 마야는 그가 사물에 대해 여러번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야 이해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멍청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사실 어머니 파울리네는 막 태어난 그의 머리가 유난히 크고 삼각형 모양이어서 기형아가 아닌가 하고 겁을 집어 먹었다. 말문이 늦게 열린 그는 일곱살 때까지 자신이 말한 문장을 한문장씩 조용히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지적 능력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그는 주위에 장래 훌륭한 교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도 그는 성적이 뛰어났다. 수학 성적은 언제나 우수했고 라틴어는 수석이었으며 그리스어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다만 권위적이고 기계적인 교수방법에 진저리를 쳤을 뿐이었다. 그리스어 선생은 그가 아무 것도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사실 오빠는 그리스어 문법을 결국 터득하지 못했다"고 마야는 회상했다. 열두살 때 그는 '성스러운 기하학 교과서'를 접하면서 순수한 논리의 힘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후 4년동안 미적분학을 포함한 기초 수학 분야에 열중하였다.
상대성이론에 창조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밀레바가 아니라 미셸 베소라는 증거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의 불변성 문제로 거의 1년을 허비하다가 베소와의 대화에서 갑자기 그 문제의 핵심을 깨달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베소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브라운 운동에 대해 토론했으며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을 연구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응용열역학을 연구, 아인슈타인이 통찰력을 갖도록 이끌어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후에 베소를 '유럽 최고의 반향판'이라고 지칭했다. 반향판이란 연사나 연주자 뒷편에 설치된 칸막이로 청중에게 더 힘있는 음향을 제공하는 장치다. 이것은 본래의 소리를 완전하게 재현하지만 자기 목소리는 없다. 그가 자신의 사고 집중에 도움을 주는 메아리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말은 밀레바에게 더 어울린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반향판은 발음체 가까이에 설치돼 있을수록 효과가 좋은데, 그녀가 바로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다. 밀레바의 공헌은 근본적으로 지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견해다. 기성 과학계에 도전하는 청년 아인슈타인에게는 함께 싸우는 동지가 아니라 그의 승리에 갈채를 보낼 동맹군이 필요했는데, 밀레바가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끝없는 여성 편력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상대성이론의 독창성 문제로 아인슈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그러나 이제 살펴볼 부단한 여성편력은 지금까지 형성돼온 그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만한 것이다. 학문적인 업적과 사생활은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던 '성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의 손녀 에블린이 '여자를 긁어모으는 바람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인슈타인은 한평생 여자를 따라다닌 인물이다. 그가 바람피우는 것은 가족들에게도 익숙한 일이 돼 버렸다. 타계하기 1개월 전 76세의 그는 베소의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한에 잠겨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 사람(베소)은 인생을 평온하게 살았으며 한 여성과 백년해로 하였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두번이나 실패하였다"고 털어놓았다.
아인슈타인은 보통 소년들처럼 17세 때 첫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마리 빈텔러라는 하숙집 딸이었다. 그러나 마리가 갖지 못한 지적 능력에 대한 갈증으로 시들해졌고, 20세 때 대학에서 만난 밀레바를 새로운 연인으로 선택하였다. 밀레바는 지성과 결단력을 갖춘 강렬한 눈빛의 재원으로 함께 공부하면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게 된다. 어머니 파울리네의 반대로 순탄하지는 않았으나 당장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밀레바가 시험을 앞두고 피를 말리고 있는 동안 가족들과 휴가를 즐기던 그는 투숙 호텔 주인의 처제인 안나 슈미트라는 17세 소녀와 친해져서 함께 도보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곳을 떠날 때 그는 안나의 앨범에 "작은 소녀, 예쁘고 앙증스런/여기 무엇을 당신을 위해 새기고 갈까?/만가지 생각이 오갑니다./당신의 작은 입술에/키스하는 것을 포함하여…"라는 시를 남겼다.
밀레바는 중요한 시험을 두달 앞둔 우울한 상황에서 임신 사실을 알았다. 아인슈타인이 졸업은 했으나 실업자 신세였고 그들의 결혼 역시 파울리네의 반대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과학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무성의함을 보여주었다. 두번째 시험에 실패하고 임신한 채 참담한 기분으로 고향에 돌아간 밀레바는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아인슈타인은 아버지 헤르만의 임종 자리에서 마침내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1903년 베른시칭 공회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르고 임시직이 아닌 특허청 공무원이 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1905년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된다. 여러 대학에서 초빙을 받아 교수가 된 그는 제네바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마침 이 기사를 본 안나 마이어 - 슈미트(이때 안나는 마이어와 결혼한 상태였다)가 축하 카드를 보내자 아인슈타인은 그들이 함께 했던 "사랑스런 날들을 안나보다 더 아름답게 기억한다"면서 연구소로 꼭 와 달라고 했다. 밀레바가 안나의 답장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남편에게 격렬한 항의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이 사건은 아인슈타인이 밀레바로부터 멀어져 연구작업, 여자친구, 학계 동료, 심지어는 과거의 여자까지 쫓아다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밀레바의 불안감과 소외감은 커져갔다. 점차 행복의 뒷전으로 밀려난 그녀는 공대 시절을 꿈꾸며 살려는 위험한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밀레바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던 1912년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을 방문하여 사촌 엘자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를 보는 순간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후 밀애 편지를 주고받는다.
사촌 엘자와의 결혼
그가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면서 1914년 아인슈타인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밀레바는 베를린 생활이 상상대로 끔찍하게 느껴지자 여름학기가 끝날 무렵 아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난 후 다시는 남편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별거의 시작이었고 이혼의 발단이었다. 1916년2월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이혼을 요구하여 밀레바를 아연실색케 하였다.
마지막 버팀목까지 사라진 밀레바는 결국 앓아눕고 말았는데 그는 꾀병이라고 비난했다. 그녀가 결핵성 수막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그는 베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가 회복되고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뇌결핵이 확실하다면 오래 앓으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빨리 끝을 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의 비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혼 후에도 밀레바에게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를 계속 보내주었다. 1922년 수상한 노벨상 상금도 애초의 약속대로 그녀에게 송금해 주었다.
어쨌든 1919년 2월 이혼이 성립되었다. 그해 6월 아인슈타인과 엘자는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여성과 더욱 뻔뻔스런 방식으로 일을 만들어 나갔다. 여자들은 자석에 쇳가루가 달라붙듯이 이 세계적인 인물에게 달라붙었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하품이 나는 주제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과학에 대한 미증유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여성이 각자 상대성이론에 대한 개인적 설명을 요구했는데, 위대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눈길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의 열정을 받아주면서 일련의 간통사건이 전개되었다. 밀레바의 질투심을 이제는 엘자가 느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흔히 평범하고 땀내 나는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꼈다고 알려져 있으나 물론 아름다운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이 땅에 허용된 짧은 인생살이가 생각나서 슬프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의 가정부 헤르타 발도브는 "그는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했고 반대로 그들은 그를 흠모했다"고 말하고 있다. 유태인 과부 토니 멘밀이나 에스텔라 카체넬렌보겐 부인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1931년 아인슈타인의 여름 별장을 매주 방문했던 금발의 마가레테 레바흐와 그가 즐긴 '위대한 자유'에 대한 발도브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그녀가 오면 교수 부인은 언제나 베를린으로 심부름이나 다른 일로 가버렸다. 그런 날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 말하자면 그 현장을 깨끗이 벗어나 버렸다. 오스트리아인 부인은 교수 부인보다 젊었는데 대단히 매력적이고 활기차고 교수처럼 웃음이 많았다."
아인슈타인은 결혼제도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내는 말을 자주 했다. 결혼은 "상상력이 없는 돼지가 고안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으며 "교양의 옷을 걸친 노예제도'라고도 했다. 그는 또한 "95%의 남자와 그 정도의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일부일처제에 어울리지 않으며 많은 상대와 즐기기를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결혼은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번은 유태인과 비유태인의 결혼 허용에 관한 질문을 받자 "그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모든 결혼이 위험하다" 하고 대답했다.
'매일 남편을 다시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던 엘자는 1936년 12월 숨을 거두었다. 밀레바 역시 1948년 73세를 일기로 외로이 죽었다. 1928년 앓아눕게 된 아인슈타인은 엘자를 대신하여 영원히 어머니와 같은 보호자가 될 듀카스를 만났다. 이 사람이 나중에 나탄과 함께 그의 유산집행인이 된 인물이다.
두 아들이 최대 피해자
아인슈타인의 문란한 사생활은 두 아내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베소와 같은 몇몇 친구들은 밀레바와의 이혼 등 그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때 마다 끊임없이 충고를 해주었고 때로는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엘자의 의붓딸들은 레바흐 부인의 방문에 대해 아버지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서 어머니에게 그 관계를 끊어 버리든가 헤어지든가 선택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엘자는 눈물을 흘렸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고통을 겪었던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 한스와 에두아르트였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계속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지는 못했다.
큰아들 한스는 부모가 별거에 이어 이혼할 때 15세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적대적이었고 때로는 편지를 보내는 일도 거부할 정도였다. 이같은 부자간의 소원한 관계는 평생토록 이어진다.
진로 선택 문제에서 그는 순수과학을 종용하는 아버지에 맞서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1922년 부모의 뒤를 따라 스위스 연방공대에 진학했고 5년 후 토목공학 학위를 받았다. 한동안 철강회사에 다니다가 1931년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수가 되고 끝내 수력학의 권위자가 된다.
결혼문제를 놓고 그는 다시 한번 아버지와 부딪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망각한 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아들의 의지를 꺾으려 하였으나 결국은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식 전날 아들에게 한 충고는 결혼식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헤어질 것인데 괜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우려와는 달리 한스의 결혼생활은 평온한 것이었다.
둘째아들 에두아르트의 일생은 비참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천재성을 이어받은 인물로 평가받던 그는 문학과 예술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부모가 이혼하던 해 발작을 일으켜 1965년 부르괼츨리 정신병원에서 죽을때까지 정신질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학창시절 그는 아버지에게 열광적인 편지를 보냈으나 냉정한 반응으로 고민한 적이 있다고 친구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한스의 설명에 따르면,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었다고 비난했다 한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가 싫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음악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이 두 아들 외에도 딸이 하나 있었다. 사생아 '리젤'이라고 불린 이 딸의 존재는 1987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1902년 생으로 지금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출생 후 몇달도 되지 않아 리젤은 아인슈타인의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딸과 상면했다는 증거도 없고 가까운 친구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리젤의 출생문서는 온갖 발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밀레바 부모의 편지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출산 후 스위스로 갔던 밀레바는 아기가 성홍열에 걸려 친정으로 되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리젤에게 닥친 운명이 가혹하구려. 성홍열은 후유증이 남기 쉽다고 합니다. 이 곤경을 겪고 지나간다면 좋겠습니다만. 아기는 호적에 올렸습니까?"
사생아 리젤의 운명
리젤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성홍열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아니면 호적등재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입양되었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물론 암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 베른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려는 아인슈타인에게 리젤은 위협이 되었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낙인이 찍히면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수입도 보잘 것 없었고 밀레바 역시 당시 병에 걸려 있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아기와의 인연을 끊으라는 부모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1935년 영국에서 헤르슈되르프 부인이라는 한 여인이 자신이 리젤이라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와 아인슈타인의 손자라고 주장했다. 친구들의 연락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곧 그 부인은 베를린의 여배우 그레테 마르친슈타인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의 비서 듀카스는 유태인 탐정에 의뢰하여 그녀의 가계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보고서는 그녀를 리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소동은 사기극으로 단정되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에서 그녀를 만나 80마르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리젤 외에도 다른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이 아인슈타인 연구자들 사이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1993년 초 미국에서 분자생물학을 이용한 유전자 검사가 아인슈타인의 두번째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을 상대로 행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이 여인의 주장은 슐만이 유전자 검사 요청을 할 만큼 신뢰도가 높았다. 그녀의 생모가 1940년 아인슈타인이 뉴욕에서 만났던 무용수임을 시사하는 단서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검사를 맡은 메릴랜드 연구소는 보존돼 있는 아인슈타인의 뇌조직에서 DNA를 추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지금까지 평온하고 겸허한 성자의 초상 이면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사직인 세계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이 처음으로 밝혀낸 그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때로는 부도덕하고 때로는 비정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겸허한 성자의 이면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나 1955년 미국 프린스턴에서 타계할 때까지 76년의 생애 동안 그를 지배한 것은 자유정신과 불같은 열정이었다.
그는 모든 제도와 권위, 형식, 속박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독일을 싫어한 이유는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여성편력 역시 그에게는 결혼제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유언에서도 장례식을 간략히 치를 것(친지 12명만이 참석했다)과 기념관을 세우지 말 것, 그리고 순례자가 찾아오지 못하게 화장을 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같은 자유정신은 그가 뉴턴의 역학을 뒤엎는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의 대가들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내면에는 불타는 정열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유모로부터 '무심의 경지에 이른 신부'라는 놀림을 받던 그였지만 화가 나면 얼굴이 노래지고 코끝이 하얗게 변하곤 했다. 한번은 발작을 일으킨 그가 마야에게 큰 그릇을 던진 적도 있다.
이런 난폭한 성격은 성장하면서 종교적 열정으로 나타났다. 열한 살 때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직접 작곡하여 거리에서 부르기도 했다. 만년에 그는 "어린 나이에 종교에 그토록 심취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적인 것에서 오는 불확실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것 같다. 즉 불확실한 희망 및 원초적 욕구로부터의 탈출 시도였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대중과학서의 영향으로 열두 살 때 그는 종교적 경건성을 버리고 물질세계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자유와 평온을 찾지 못한 소년 아인슈타인은 종교에서도 찾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과학에 희망을 걸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같은 남다른 자유정신과 열정은 과학의 세계에서는 무한한 창조력으로 발현되어 20세기 과학의 기초를 재정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적인 세계에서는 부도덕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천재의 빛과 그늘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