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함. 도도함. 유연함. 고양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런데 이 목록에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단어가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로서는 불쾌한 일이겠지만 중증호흡기증후군, 즉 ‘사스’(SARS)가 그것이다.
지난 겨울과 봄, 세계를 긴장시켰던 사스의 폭풍이 지나가고 연구자들은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수사의 그물망이 좁혀지면서 남아시아에 분포해 있는 샤향고양이(civet) 등 몇몇 야생 동물이 사스바이러스를 퍼뜨린 주범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사향고양이는 동물성 향료인 시벳을 분비하는 종으로 예전부터 향료업계에서는 유명하다. 사람들은 식용뿐 아니라 생식선에서 분비되는 이 물질을 얻기 위해 이 녀석들을 사육하기도 한다.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구상에서 극히 일부 지역에 살고 있는 야생 동물이 원인제공자라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집고양이도 사스를 전파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패럿, 사스바이러스에 취약
네덜란드 에라스무스의학센터 바이러스연구소 오스터하우스 박사팀과 홍콩의 연구자들은 집고양이와 페럿이 사스바이러스에 감염될뿐더러 다른 동물들도 감염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 10월 30일자에 발표했다. 페럿은 족제비과의 동물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애완동물이다.
연구자들은 지난번 사스가 창궐했을 때 1백명 이상이 감염됐던 홍콩의 아모이 가든스 아파트의 집고양이들 역시 사스바이러스에 감염됐었다는 보고를 토대로 집고양이와 페럿이 정말 사스바이러스에 감염되는지를 정밀 조사키로 했다.
이들은 집고양이와 페럿 각각 6마리에 사스바이러스를 접종한 뒤 경과를 지켜봤다. 고양이 6마리는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온 뒤에도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페럿 6마리 중 3마리는 이틀 뒤부터 앓다가 4일차에 그 중 한마리가 죽었다.
이런 외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와 페럿 모두 호흡기가 감염됐고 사스바이러스가 증식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자들은 4일차에 고양이와 페럿 각각 4마리를 죽여 조직내 바이러스의 밀도를 정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페럿의 폐조직에는 고양이보다 1천배의 농도로 바이러스가 증식했음을 확인했다. 즉 고양이의 경우 사스바이러스의 농도가 낮아 감염됐더라도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지속적인 관찰 결과 감염된 동물들 중 살아남은 녀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항체가 형성돼 감염된지 2-3주 뒤에는 바이러스가 퇴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 단계로 연구자들은 이들 감염된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사스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건강한 집고양이와 페럿 각각 2마리를 감염된 녀석들의 우리에 넣어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틀이 지나자 이들의 몸속에서도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즉 사스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이 경우도 고양이 2마리는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지만 페럿은 시름시름 앓다가 한 마리는 16일만에, 나머지 녀석은 21일만에 죽었다.
이번 연구는 사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먼저 고양이과에 속하는 집고양이와 족제비과의 페럿처럼 분류상 서로 거리가 먼 동물이 사스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병원균이 폭넓은 동물종을 매개체로 전파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보통 바이러스가 특정한 종만을 감염시키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또 이들 감염된 동물이 사스바이러스를 쉽게 부근의 다른 동물에게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지난번 사스의 창궐에 사람 뿐 아니라 동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이번 결과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연구자들은 “집고양이나 페럿이 사스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항바이러스제나 백신을 개발할 경우 이들을 동물모델로 해 효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사스를 퇴치하려는 이런 활발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사스바이러스를 무찌를 마땅한 수단이 개발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올 겨울 사스바이러스가 다시 활동을 개시한다면 지난번과 같은 심각한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사스에 대한 경계 해이해져
이런 우려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일이 최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스 여파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은 중국은 지난 4월 사향고양이를 비롯한 54종의 야생동물을 유통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조치가 풀려 이들을 이용한 요리를 고대하던 미식가들이 환호성을 올리고 있다.
유통금지조치로 이들 야생동물의 거래에 의지하는 지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수천의 농가들이 조치의 해제를 요구했고 결국 중국정부는 집에서 사육하는 야생동물의 유통은 허가하기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이런 조치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관계자들은 경악속에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올 겨울 만일 사스가 또 다시 등장한다면 사스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는 집고양이들도 수난을 면키는 어려울 전망이다. 이번 연구에서 보면 고양이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멀쩡한데, 행동반경이 넓은 동물이므로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늑한 집에서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유유자적하던 고양이들이 하루아침에 대문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인정 많은 주인이라면 고양이를 맡아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