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한은 1916년 서울의 약종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한의학계의 대표적 인물인 조헌영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다.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평양의대 생리학 강좌장, 경락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며 ‘최고의 의학자’로 활약하게 됐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전통과학 유산의 계승, 자립노선의 추구 일환으로 한의학을 강조하며 그 발전을 모색했다. 과학원에 동방의학연구실을 설치하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통합하며 한의학을 과학화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과학’의 새로운 분야로 한의학이 인정을 받으며 활발히 연구됐다. 이때 중심 연구과제로 떠오른 것이 경락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었고 그 임무를 김봉한이 맡았다.
노벨 과학상 수상도 기대됐던 업적
1961-1965년 그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경락에 관한 5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 논문에서 그는 경락체계와 산알학설로 이뤄진 ‘봉한학설’을 제시했다. 즉 경락의 존재양태를 실제로 세밀히 밝혔고 그 작동이 DNA로 구성된 미세 입자인 산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생물학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다윈의 진화론에 버금가는 과학성과로 여겨지며 노벨 과학상을 수상받을 것으로 기대됐다. 그의 논문은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돼 널리 배포된 까닭에 외국의 도서관에 가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봉한학설은 북한에서 과학 안팎으로 커다란 파급효과를 미쳤다. 과학에서는 한의학을 북한이 이룩한 ‘주체과학’의 대표적 분야로 간주하게 됐고 그동안 환경을 중시하는 뤼센코주의 영향으로 도입되지 못하던 분자유전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사회정치적으로는 과학기술자의 높아진 위상 덕택에 기술관료의 정치적 진출을 촉진시켰고 ‘주체사상’이 새롭게 대두되는 중요한 배경요인의 하나가 됐다. 이 시기에 북한에서는 주체과학, 주체사상으로의 급격한 방향전환이 이뤄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봉한학설은 1966년 무렵에 갑자기 사라지게 됐다. 그 이유는 학문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자유전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봉한학설에서 주장하는 DNA의 존재와 역할에 의문이 제기되고, 경락 연구가 깊어질수록 기존 생물학 이론과 마찰이 커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실력자 박금철이 권력다툼에서 패해 숙청을 당함에 따라 김봉한 역시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토록 위세 당당하던 김봉한과 봉한학설이 왜 갑자기 파탄을 맞았는지 그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