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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20세기 새로운 세계관의 출발 양자가설

양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비약적으로 변화하는 불연속적인 것이다.흑체복사의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와 진동수의 곱의 정수배가 된다는 것에서 출발한 양자가설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본다.

올해는 현대물리학의 시작을 알리는 양자론이 탄생한 지 꼭 1백년이 되는 해다. 1900년 독일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막스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라는 특정한 상수와 진동수의 곱의 정수배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것으로 현대물리학의 핵심적 개념을 구성하는 양자론이 출현한다.

양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별로 비약적으로 변화하는 불연속적인 것이다. 양자론은 맥스웰에 의해 대표되는 고전전자기학과 볼츠만에 의해 대표되는 통계역학 사이에서 존재하던 불일치에서 출발했다. 19세기 당시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은 연속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기술됐으며, 볼츠만의 통계역학은 기체 분자 또는 원자의 존재를 기본 가정으로 삼고 있었다. 고전전자기학에서 나오는 연속적인 파동방정식과, 띄엄띄엄 존재하는 실체인 원자 개념을 바탕으로 했던 기체 운동에 관한 통계적 기술을 서로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양자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양자론에 따르면 복사에너지는 연속적인 양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1, 2, 3, 4와 같이 띄엄띄엄한 양을 지녀야 한다. 빛이 띄엄띄엄한 성격인 입자성과 아울러 연속체적인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도 바로 이런 상반된 두 개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차원에서 양자론은 물체가 온도에 따라 다양한 복사파를 방출하는 열복사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백열 전등이나 용광로의 쇳물에서 나오는 빛을 살펴보면, 물체가 온도가 낮을 때에는 적외선을 방출하다가 온도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로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을 거쳐 자외선을 방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에 있는 별의 색이 붉은 빛일 경우에는 표면 온도가 낮고, 푸른 빛일 경우에는 표면 온도가 높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빛이 연속적인 흐름이라는 파동설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조명산업 발전이 미친 영향

이상적인 열복사에 해당하는 흑체복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9년 12월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키르히호프는 흑체복사 강도의 분포는 흑체 벽의 물질이나 빈구멍(cavity)의 모양이나 크기와는 상관없고 오직 온도와 빛의 파장에만 관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의 실험이나 이론 물리학 수준으로는 다양한 온도와 파장에 걸쳐 키르히호프가 정의한 열복사의 강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84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은 1879년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해 설명했다.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훗날 슈테판-볼츠만 법칙으로 문헌에 나타난다(E=${σT}^{4}$). 1893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빈은 슈테판-볼츠만의 법칙을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유도하는 한편 흑체복사의 강도가 최대에 도달하는 복사파의 파장은 그 흑체의 절대온도에 반비례한다는 빈의 ‘변이 법칙’을 발견했다.

흑체복사와 관련된 체계적인 실험이 발전하게 된 데에는 독일에서 국가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표준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표준과학원에 해당하는 이 연구소는 베를린에 있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의 근처에 세워졌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베를린 대학 등 세 기관의 연구 성과가 합쳐져 이루어낸 것이 바로 플랑크의 흑체복사 이론이었다.

19세기말 제국물리기술연구소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실험물리학자들인 빌헬름 빈, 오토 룸머, 페르디난트 쿨를바움, 하인리히 루벤스 등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비롯한 좋은 제도적 조건 속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당시 급성장하던 독일 조명산업에서는 필라멘트에서 방출되는 스펙트럼의 가시영역과 가시영역 밖의 전자기적 에너지 분포를 비롯한 복사현상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자 했다. 이때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일하던 유능한 실험물리학자들은 독일 조명산업계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복사현상에 대한 면밀한 실험을 행했다. 바로 이들의 실험 결과는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 관계식을 찾게 만든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빈의 법칙과 레일리 법칙의 조화


모든 빛을 흡수하는 흑체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한다.물리적으로 가장 근사한 흑체는 작은 구멍이 뚫린 통으로 볼 수 있다.구멍으로 들어온 빛은 통의 내부에서 여러번 반사되면서 흑체에 흡수된다.따라서 구멍으로 나오는 빛의 세기는 매우 미미하다.


한편 1895년 정교한 실험 장비로 빈의 변이 법칙에 대한 결정적 실험 결과를 얻어낸 하노바 공대의 조교 프리드리히 파센은 그 이듬해 자신의 실험 결과를 확장해서 흑체복사 강도인 I=$\frac{c₁}{{λ}^{α}}$·${e}^{\frac{-c₂}{λT}}$(λ는 파장, T는 절대 온도, C₁, C₂는 상수)라는 키르히호프 법칙에서 예측한 함수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 이 법칙에서 α의 값이 5에서 6 사이의 값, 평균적으로 약 5.6정도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같은 해 빈은 파센의 법칙이 슈테판-볼츠만의 법칙과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복사식에서 α의 값은 5.0이 돼야 이론적으로도 모순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실험뿐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빈의 법칙이 일반적인 형태로 유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바로 이것이 독일 최초의 이론물리학자로 인정되는 플랑크가 도전했던 문제다. 1899년 이후 플랑크는 흑체복사 현상에 있어서 빈의 법칙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과 동기를 밝히는 작업은 아주 힘든 역사적 과제이다.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베를린에 밀집해 있었던 3개의 연구소에서 나왔던 실험적 결과가 그의 판단에 미친 영향이다. 우선 1899년 2월부터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룸머와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였던 프링스하임은 흑체복사에 대한 더욱 면밀한 실험을 한 결과 높은 온도의 긴 파장에서 빈의 복사 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계속된 실험에서 그들은 1900년 10월 12μ(1μ=${10}^{-6}$m)에서 18μ에 이르는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복사 법칙에 의해 계산된 값보다 관찰된 값이 약간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룸머와 프링스하임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교수였던 막스 티센은 1900년 2월 2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빈의 법칙과는 다른 새로운 복사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이런 분위기가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식을 찾도록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과 전자기학을 바탕으로 해서 흑체복사 현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플랑크의 이론적 관심을 들 수 있다. 플랑크는 자신이 개발한 복사 법칙에 대한 열역학 법칙으로부터 기존의 빈의 법칙을 약간 바꾸어 새로운 복사식을 제안했다. 플랑크는 이 식을 1900년 10월 19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했다. 같은 날 루벤스와 쿠를바움은 플랑크의 이 식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분명한 실험적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때 그들은 빈의 법칙이 높은 온도와 긴 파장 영역에서 고전전자기학에 바탕을 둔 레일리의 복사 법칙과도 상반된다는 것을 함께 지적했다. 이로부터 장파장 영역에서 맞지않던 빈의 법칙과 단파장 영역에서 적용되지 않던 레일리법칙이 플랑크의 복사법칙으로 통합된다.

플랑크는 원하지 않은 물리학 혁명


양자가설로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연 막스 플랑크.그는 본래 고전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인물이다.


​플랑크는 자신의 새로운 복사이론을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연결시키면서 에너지에 진동수의 정수배를 배당했다. 이로부터 1900년 12월 14일 막스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에너지 양자가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ε=hv라는 새로운 양자가설을 얻어냈다. 여기서 h는 6.55×${10}^{-27}$ erg×sec로서 복사법칙을 지배하는 보편상수의 의미가 부여된다.

1900년 플랑크에 의해서 제안된 흑체복사 이론은 고전물리학과 대별되는 새로운 양자론의 탄생을 알리는 출발점이었지만,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플랑크 자신에게 이 변혁은 원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플랑크의 논문에서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와 빛의 진동수의 정수배로 표시되는 것은 사실 1, 2, 3, 4 라는 식의 정수배 뿐만 아니라 1.5, 2.5, 3.5 등 구간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1906년 이후에 나타난 플랑크의 저작을 보면 플랑크가 바로 이런 시도를 했다는 흔적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플랑크는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정수배로 변화한다는 중대한 가정을 처음으로 자신의 논문에 썼지만, 그 자신은 빛이 바로 입자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심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플랑크는 빛을 입자로 보면 빛의 간섭이나 회절 현상을 설명할 때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빛을 입자로 보더라도 물리학자들은 빛의 간섭이나 회절 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파동론에 의해서 정의되는 진동수나 파장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1900년부터 1908년에 이르기까지 양자불연속 개념은 빈-플랑크 복사식이 실험적으로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특별한 미봉가설로 간주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의 과학자들은 에너지 불연속 개념과 같은 혁명적인 개념의 사용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플랑크 자신도 자신의 열복사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열복사 이론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이론 속에 나타나는 플랑크 상수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보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플랑크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양자 불연속성 개념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작용 양자에 대한 개념을 제창해서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플랑크 자신은 이런 변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즉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창시자였던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 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플랑크는 양자론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 막스 폰 라우에 등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19세기말에 이룩한 플랑크의 혁명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무엇보다 플랑크의 이 혁명은 물리학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돼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더 이상 새롭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20세기초 물리학 내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대기만성형의 평범한 과학자에 의해서 시작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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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임경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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