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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테리아가 만든 황제의 상징

자주색 염료 환원시켜 물에 녹게 해


다비드의‘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5-7, 유화, 프랑스 루 브르 박물관) 일부. 로마 황제처럼 월계관과 자주색 망토를 한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왕비관을 씌워 주고 있다.


‘너의 대리석은 흙의 경결, 너의 금은은 흙의 잔사에 지나지 못하고 너의 명주옷은 벌레의 잠자리, 저의 자포는 깨끗지 못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8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이양하의 ‘페이터의 산문’에 나오는 이 구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영국의 월터 페이터가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보고 쓴 글을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물욕이란 게 이렇듯 하찮은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니 오로지 마음의 평정만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자포(紫袍)란 황제가 입는 자주색 망토를 의미합니다. 염료를 얻기 어려웠던 고대에는 색깔있는 옷은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천자는 황색의 용포를 입었고 로마의 황제들은 자포를 입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맞다면 자포의 자주색은 물고기의 피 때문이겠죠. 과연 그럴까요.

로마시대 때 자주색은 황제 자주(imperial purple)라고 해 오직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습니다. 기원전 1600년 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티레 지방 특산 소라고둥으로 염색을 했다고 해서 티레 자주(Tyrian purple)라고도 불렸습니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는 이 염색법을 “소라고둥을 채집한 다음 농도가 진한 소금물에 여러날 담가둔다. 천이나 실을 이 용액에 한번에 수시간씩 여러번 담그기를 반복한 다음 햇볕에 쪼이면 자주색으로 염색된다”고 묘사했습니다. 20세기 초 파울 프리뢴더란 독일의 화학자가 이 염색법을 재현해봤는데, 소라고둥 1만2천개에서 불과 1.4g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귀한 염색이었기에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겠지요. 어쨌거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자포가 어떻게 염색되는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동로마 비잔틴제국에서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표현을 영어로 ‘born to the purple’이라고 합니다. 소라고둥을 이용한 자주색 염색법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잊혀졌다고 합니다. 황제와 운명을 같이한 셈이죠.

그런데 최근 영국의 한 아마추어 화학자가 누구나 손쉽게 황제의 자주색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 화제가 됐습니다. 은퇴한 엔지니어인 존 에드몬드는 티레산 소라고둥 대신 슈퍼마켓에서 흔히 파는 새조개를 이용했습니다. 이것을 나뭇재와 함께 물이 든 큼직한 병안에 넣고 50℃에서 10일 간 보관했습니다. 여기에 양모를 집어넣었더니 처음엔 초록색을 띠다가 햇빛에 말리자 곧 자주색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에드몬드는 지난 9월 초 영국 멘체스터대학에서 개최된 사이언스 페스티벌에서 고대 자주색 염색법을 재현했을 뿐 아니라 영국 레딩대 필립 존 박사와 함께 밝힌 염색 메커니즘도 소개했습니다. 그들이 밝힌 자주색 염색의 핵심은 다름 아닌 박테리아였습니다.

소라고둥에 들어있는 자주색 입자는 물에 잘 녹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는 이 입자에 전자를 첨가해 환원시킴으로써 물에 녹게 만든 것입니다. 염색 과정에서 들어가는 나뭇재는 용액이 산성이 되는 것을 막아 염료의 환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이죠.

전통염색에 박테리아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1998년에 처음 밝혀졌습니다. 16세기까지 영국에서는 대청(woad)이라는 겨자과의 이년생 풀로 푸른색을 냈습니다. 대청에는 인디고라는 푸른색 염료 입자가 들어있는데, 마찬가지로 물에 잘 녹지 않습니다. 에드몬드와 존 박사는 이때 염료를 환원시켜주는 것이 클로스트리듐이라는 박테리아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식중독, 장염 등을 일으키는 클로스트리듐은 높은 온도에서 당분을 먹고 자라며 산성인 환경을 싫어합니다. 대청 염색에는 왕겨와 나뭇재도 함께 들어갑니다. 이때 왕겨는 바로 클로스트리듐의 먹이가 되는 당분이 되고 나뭇재는 산성이 되는 것을 방지해줍니다.

에드몬드와 존 박사는 전통 염색법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청바지를 염색할 때는 인디고와 함께 티톤산나트륨이라는 유독성 환원제를 사용합니다. 전통 염색은 이런 화학물질이 필요없는 친환경 염색법인 셈이죠. 존 박사는 박테리아를 이용한 대량 염색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편 인디고도 요즘엔 석탄이나 석유에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유독물질이 부산물로 나와 골칫거리입니다. 박테리아는 이 문제도해결해줄 전망입니다. 지난해 미국의 한 생명공학기업은 대장균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인디고를 생합성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아우렐리우스가살아 돌아와‘자포는 저 고마운 박테리아의 공’이라고 칭송할 법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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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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