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미국 뉴욕 맨하탄에 2차대전 중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히틀러의 비밀병기인 V-2로켓이 등장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V-2로켓은 세계최초의 액체연료 탄도미사일로 9천여명의 유럽인을 사상케 했다. 그런데 이번엔 V-2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반인의 우주여행을 실현시켜줄 구세주가 되고 있다. 이런 전혀 상반된 변신에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V-2를 개발한 과학자들의 원래 숨은 의도가 우주여행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로켓은 전쟁 무기용과 평화적 우주탐사용의 야누스적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이들의 직계 선조가 되는 V-2의 역사를 살펴보자.
히틀러가 연합군의 베를린 폭격에 대한 ‘복수’(Vergeltungswaffe)란 뜻으로 명명한 V-2의 원래 이름은 단순히 ‘모형’(Aggregat)이란 뜻을 가진 A-4였다. 그리고 A-4를 만든 핵심 멤버들은 우주여행을 꿈꾸던 독일 우주여행협회(VfR)의 회원들이었다. VfR은 1927년 6월 5일 독일인에게 우주여행에 대한 열망의 불씨를 피운 헤르만 오베르트가 중심이 돼 설립했다. 폭죽 수준의 로켓밖에 없던 시절 오베르트가 제시한 우주여행용 액체연료 로켓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경제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상태여서 뭔가 열중할 것을 찾던 때였다. VfR 회원 또한 대부분 실직자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로켓제작에 들어가 마침내 1931년 3월 VfR의 초대회장인 요하네스 빙클러가 만든 액체로켓이 유럽최초로 발사에 성공한다. 이것은 미국의 고다드가 세계 최초로 액체로켓 발사에 성공한지 5년 후의 일이었다. 고다드가 혼자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한 반면 독일의 VfR은 연구비를 벌겸 돈을 받고 로켓발사광경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1932년까지 VfR는 87회의 발사와 2백70회가 넘는 지상 시험, 9회의 공개발사를 했다. 이 중 레풀조 4호의 경우 9백10m까지 상승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협회의 연구업적에 고무된 독일 육군 병기국은 전쟁무기로서 로켓의 이용 가능성에 주목했다. 병기국은 로켓 제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20살의 폰 브라운을 발탁해 본격적인 로켓 무기 개발에 착수한다. 한편 더이상 로켓개발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은 육군의 공작활동에 재정적인 압박이 겹쳐 VfR은 1933년 해체되고 만다.
나치가 탄생시킨 우주로켓
이제 우주여행을 꿈꾸던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연구환경이 좋은 육군의 로켓연구소에 모였다. 개인 또는 동호회 차원에서 연구를 하던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에 비해 월등한 액수의 연구비가 연구소에 투입됐다. 그리고 폰 브라운을 비롯한 천재적이고 열정적인 로켓광들 덕분에 연구는 매우 빠르게 진척됐다. 개발에 착수한지 10년만에 이들은 목표로 한 성능의 액체연료 로켓 개발에 성공했다.
1942년 10월 3일은 현대 로켓의 직계 조상이 탄생한 날이다. 두번의 실패 끝에 A-4로켓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날이기 때문이다. A-4는 인류가 도달한 최고 높이인 84km까지 상승했다. 비행을 지켜본 개발 책임자 도른베르거는 “오늘 우주선이 탄생했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길이 14m에 무게 12t이었던 A-4는 액체산소와 알코올을 연료로 한 추진력 25t의 로켓엔진에 의해 비행했다. A-4의 성공에 고무된 VfR 출신의 과학자들은 2단 로켓을 설계하며 유인비행, 지구주위비행, 달 비행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의 목표는 다급해진 전황의 정세를 바꿀 미사일의 완성이었다. 결국 V-2란 전쟁병기의 이름으로 바뀐 A-4에는 1t의 폭약이 실렸다. 악명 높은 도라수용소 2만여 수용자의 강제 노역으로 완성된 V-2는 1944년 9월 8일에 처음 파리로 발사된 후 종전까지 모두 3천2백55기가 발사됐다. 당시 영국 행성간 협회의 아더 클라크는 V-2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놀라운 성능의 로켓 완성에 기뻐했다고 한다.
2차대전 후 영국 행성간 협회의 몇몇 회원들은 V-2의 유인 우주비행 가능성을 연구했다. 이들은 폭약 대신에 가압 선실을 설치한다면 한명 정도는 우주로 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실에서 승무원은 수분 간 무중력을 체험하며 귀환과정에서 탈출해 낙하산으로 착륙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이 제안은 한가한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V-2를 이용한 유인 우주비행은 1961년 미항공우주국(NASA)에 의해 이뤄졌다. 비록 V-2 자체는 아니었지만 설계자인 폰 브라운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 만든 것으로 V-2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이 유인 비행은 2회만 실시됐다.
개발된 지 환갑이 지난 V-2의 우수한 성능을 다시 주목한 사람은 캐나다의 제프 시어린(Geoff Sheerin)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우주여행을 가능케 해줄 우주선을 개발중인 제프는 이미 개발된 V-2의 기술을 활용해 로켓 개발 비용을 아낀다는 계획이다. 전체의 항공역학적인 모습과 주엔진의 설계를 따르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현대의 기술과 재료로 만들 것이라고 한다. 재탄생할 V-2의 이름은 ‘캐나다 화살’(Canadian Arrow)이다. V-2와 큰 차이는 폭약대신 3명이 탑승할 수 있는 우주선이 2단으로 실렸다는 점이다.
고체연료 로켓이 장착된 2단 부분은 우주비행뿐 아니라 사고시 비상탈출용으로 쓰인다. 캐나다 화살은바다 쪽으로 발사돼 1단 로켓은 낙하산으로 회수되고2단 우주선은 1백km까지 상승한 후 낙하산과 튜브를이용해 발사장에서 24km 떨어진 바다에 착수하게 된다. 캐나다 화살의 실제크기 모형은 2002년 4월에 처음으로 공개됐고 현재는 1단의 로켓엔진을 시험하고있다. 지난 6월에는 캐나다 화살에 탑승할 6명의 우주비행사를 선발했다. 21세기 들어 V-2는 히틀러의 망령을 벗고 60여년 전 VfR회원들의 소망처럼 우주여행용으로 부활할 날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