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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가 뽑아내는 황금실

‘줄의 마법사’ 바이오산업의 기대주로

지난해 1월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생명공학회사 넥시아(Nexia)와 미국 육군연구팀은 오랜 기간 동안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거미 없이도 거미 실크를 만드는 실험에 최초로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올해 8월 필자는 거미 실크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밝혀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여기서 거미 실크란 거미줄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거미줄이라고 하면 과학이라는 단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생명과학계에서는 그동안 거미줄을 만드는 방법을 고심해 왔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과학자들은 거미 실크를 연구하는 것일까.

아미노산 다루는 생명의 연금술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크는 지금 까지 비단의 재료로만 사용했다. 최근 의료용 생체재료로의 활용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거미 실크가 오랜 기간 동안 연구대상이 된 이유는 우수한 기계적 성질 덕분이다. 흔히 거미 실크는 인공섬유인 케블라(Kevlar)에 비견된다. 케블라는 가볍고 튼튼한 고기능성 섬유로 현재 방탄조끼나 헬멧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강철보다 강한 거미 실크는 케블라를 능가하는 섬유로, 더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거미 실크의 우수한 점은 무엇보다도 강철 강도의 5배나 되면서 동시에 탄성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탄성력은 늘어났다가 손상되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고무줄과 같은 복원력을 말한다. 케블라는 16% 정도 늘릴 수 있는데 반해 거미 실크는 31%나 가능하다.

이런 특성은 지난해 개봉돼 인기를 모았던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잘 표현돼 있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에 매달려 빌딩숲 사이를 날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거미줄의 높은 강도와 탄성력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영화 초반에 거미를 연구하는 국방과학연구소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소개가 된다.

한편 거미 실크는 높은 온도에서도 잘 변하지 않는다. 또 공기가 잘 통하면서도 수분이 침투하지 못하는 방수 기능을 갖고 있다. 아울러 알레르기를 유발하지 않는 천연섬유다. 이 때문에 낙하산줄이나 방탄조끼에서 생체에 적용되는 수술용 봉합사, 인공인대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거미 실크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자연에서 1파운드(0.45kg)의 거미 실크를 얻기 위해서는 약 2만7천마리나 되는 거미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많은 수의 거미를 키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거미는 서로를 잡아먹는 습성을 갖고 있어 대량으로 사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넥시아와 미국 육군연구팀은 거미줄을 만드는 거미의 유전자를 암소의 세포에 이식했다. 유전자가 이식된 세포를 긴 튜브 벽에 부착한 후 한쪽 끝에 성장인자를 투여하자 다른쪽 끝에서 거미 실크를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뽑아낸 거미 실크는 질기기는 했지만 자연의 거미 실크만큼 강하지 못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이 방법으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수용액이 튼튼한 섬유로 변신

거미 실크와 비슷하게 ‘누에 실크’도 최근 우수한 섬유 재료로 주목받고 있다. 누에 실크는 누에나방의 유충이 짓는 고치에서 뽑는 섬유로 비단의 원료가 된다. 누에 실크는 의료용 생체재료로 활용 가능성이 예상되고 있다. 또한 영국 옥스포드대의 볼라스 교수는 지난해 8월 네이처에 실을 뽑는 속도에 따라 누에 실크도 거미 실크만큼 강한 기계적 성질을 갖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누에의 유충은 약 60시간에 걸쳐 약 2.5g의 고치를 만드는데, 고치 하나에서 1천2백-1천5백m의 실을 뽑을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매년 7만t 가량 생산되는 누에 실크는 양과 비용적인 측면에서 거미 실크보다 훨씬 유리하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계속 발표되는 상황이다.

놀랄만한 우수성을 지닌 거미와 누에 실크를 연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거미와 누에 실크의 탄생 과정에 미스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거미와 누에는 어떻게 이처럼 튼튼하고 기다란 섬유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생체 내에서 물에 녹아있는 재료를 갖고 방수 기능을 가진 실크를 만들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다.

거미 실크와 누에 실크의 재료는 생체 내 ‘실샘’이라고 불리는 곳에 저장된 액체다. 이 액체에는 알라닌과 글리신 같은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실크단백질이 녹아있는데, 이를 실크수용액이라고 부른다. 실크단백질 농도가 30%나 되는 실크수용액은 ‘실젖’이라는 기관을 통해 기다란 실로 뽑아져 나온다.

필자가 최근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은 거미와 누에의 실크 합성에 대한 메커니즘을 새롭게 해석한 연구다. 실크는 마치 젖은 빨래의 물을 짜듯 실크수용액을 쫙 짜내서 만들어진다는 결과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실크수용액에 녹아있는 실크단백질은 분자량이 약 34만이나 되는 커다란 단백질이다. 실크단백질의 1차구조는 최근 전체 염기서열이 해석되면서 밝혀졌다. 서열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실크단백질은 짧은 친수성 영역과 긴 소수성 영역이 반복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거미와 누에의 실크가 생체 내 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미스터리 였다.


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구조

실크단백질은 친수성과 소수성 영역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높은 농도에서 ‘리오트로픽 액정상’을 이룬다. 여기서 액정(액체결정)이란 액체처럼 유동성이 있지만 결정처럼 규칙적인 구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물질을 말한다. 리오트로픽 액정은 주로 친수성 머리부분에 긴 소수성 탄화수소사슬을 가진 분자가 물에 녹을 때 형성하는 구조다. 세정제(계면활성제), 지방질(기름), 그리고 세포막 물질 등의 수용액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지방질의 경우 높은 농도 용액에서 친수성인 머리부분은 물쪽을 향하고 소수성인 꼬리는 내부를 향하는 구형의 작은 응집체, 즉 ‘마이셀’을 이룬다. 한편 세포막은 머리부분이 바깥쪽을 향하고 꼬리부분이 안쪽으로 향한 채 나란히 정렬돼 있는 것이다.

실크단백질도 친수성 부분과 소수성 부분에 의해 수용액 안에서 자발적으로 1백-2백nm(나노미터, 1nm는 10-9m) 크기의 마이셀을 형성한다. 친수성 부분이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마이셀은 실크단백질이 높은 농도로 수용액에 녹아있을 수 있는 비결이다. 농도가 높아지면 마이셀은 서로 뭉쳐 약 1μm(마이크로미터, 1μm는 10-6m) 이상의 지름을 갖는 구형체를 형성한다. 이 구형체는 수용액안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일 젤리와 같은 형상으로 존재한다.

실을 길게 늘려 뽑는 과정은 구형체에 힘을 가해 실크단백질 주위의 물분자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이다. 일단 물분자가 실크단백질로부터 제거되면 실크단백질 안에서는 기다란 소수성 영역끼리 수소결합이 형성된다. 수소를 매개체로 형성되는 수소결합은 결합력이 강하기 때문에, 실크는 마치 병풍처럼 튼튼하고 안정된 구조를 갖게 된다. 실크가 물에 다시 녹지 않으며 우수한 기계적 성질을 가진 실크의 비결이다.

실크 형성 메커니즘은 실험적으로 누에 실크를 이용해 입증됐다. 농축된 실크수용액 내에 존재하는 구형체로 된 젤리 형상은 실로 뽑아낼 때 당겨지는 힘에 의해 ‘마이크로 피브릴’이라는 구조를 형성한다. 마이크로 피브릴은 실크섬유 내부 미세구조의 기초가 되는 튼튼한 뼈대 역할을 한다.

미래 청정화학 방향 제시


거미와 누에의 실크 합성 메커 니즘에 대한 이해는 이들을 인 공적으로 대량생산하는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거미와 누에가 만드는 실크 생산과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화학적 또는 유전학적으로 고강성 실크재료를 재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거미와 누에가 실크를 만드는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써 실크를 인공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최근 실크 재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실크 재료는 인공장기 등을 재생하는 기술인 조직공학과 약물전달체 또는 유전자전달체를 위한 생체재료로 안성맞춤이다.

동서양을 이어주는 행로인 실크로드는 기원전 1백30년경에 시작돼 5-6세기경에 가장 번성했다. 새로운 의료용 재료와 생체재료로서 다시 한번 바이오산업에서 새로운 실크로드를 여는 시대가 오고 있다.

2002년 8월호 사이언스에서는 미래 화학산업에 대해 ‘청정화학’이란 타이틀로 특집 기사를 소개했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공정에서 유기용매 등 유해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실크 공정과 생체재료 가공 기술의 개발은 이런 청정화학의 한 예가 될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거미의 실크가 미래 화학 산업에 새로운 방향까지 제시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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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진형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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