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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 음식이 자식 유전자의 기능 바꾼다

임신 초기 환경이 신생아 운명 결정

‘고양이 먹으면 아기 등에 털난다’라는 옛말이 있다. 물론 현대인 중에는 산모가 정말 고양이를 먹었다고 해서 아기 등에 털이 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임신중에는 먹을 것을 조심하라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말을 그저 스쳐가는 민담 정도로 여겨서는 안될 것 같다. 최근 미국 연구진이 어미 쥐의 음식이 새끼 쥐의 털 색깔과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좌우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전은 유전자 자체의 염기서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믿었다. 즉 새끼 쥐의 털 색깔이 바뀌려면 털 색을 지정하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변화가 생겨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유전자 서열에 아무 변화가 없어도 어미 쥐의 음식이 달라지면 털 색깔이 달라진다는 점을 밝힌 것이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고, 우리 조상들은 어쩌면 유전자를 뛰어넘는 유전현상을 미리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유전자가 지배하지 않는 유전현상.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염기서열 변화 없어도 털 색깔 달라져


저틀 교수의 이번 실험은‘아 구티’라는 유전자가 삽입된 모델쥐를 이용해 이뤄졌다.


지난 8월 1일 미국 듀크대 메디컬센터의 랜디 저틀 교수는 어미 쥐가 먹은 음식이 새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힌 실험결과를 ‘분자 및 세포생물학’지에 발표했다.

실험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눠 진행됐다. 하나는 어미 쥐의 음식에 비타민B12와 엽산 등 4종의 영양제를 섞여 먹였고, 나머지는 영양제 없이 보통의 음식만 먹였다. 물론 이 두 어미쥐는 동일한 DNA를 가진 새끼 쥐를 임신한 상태였다.

실험결과, 영양제를 먹인 쥐는 갈색털의 쥐를 낳은 반면, 보통의 음식만 먹인 쥐는 노란색 쥐를 낳았다. 이 쥐의 털은 노란색과 갈색 그리고 중간색이 있는데, 노란쥐는 갈색쥐보다 비만과 당뇨,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 실험에 대해 ‘임신중에 음식을 잘 먹으면 새끼도 영양상태가 좋아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털 색깔이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경우도 산모가 잘 먹으면 매우 ‘우량한’ 아기가 태어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험의 좀더 상세한 조건을 알고 나면 이런 의문은 곧 사라진다.

저틀 교수가 실험에서 사용한 새끼 쥐는 사실 보통 쥐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아구티’라는 유전자를 갖도록 특별히 설계된 모델쥐였다. 아구티 유전자는 쥐의 털 색깔을 노란색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즉 저틀 교수는 이런 모델쥐를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요소를 아구티 유전자 하나로 제한한 것이다.

실험에서 아구티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쥐는 노란색 털을 가져야 한다. 물론 실험에 사용된 모든 절차는 아구티의 염기서열에 어떤 돌연변이도 만들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됐다. 아구티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는 오직 음식뿐이었다.

실험의 결과가 보여주듯 어미 쥐의 음식이 아구티 유전자의 발현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영양제를 준 쥐는 아구티 유전자가 억제돼 갈색이 된 반면, 그렇지 않은 쥐는 이 유전자가 제대로 발현돼 노란색이 된 것이다.

물론 음식 자체는 아구티의 염기서열 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음식이 아구티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쳤고, 그 방식은 염기서열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노새와 버새의 차이

음식이 어떻게 아구티 유전자를 억제했을까. 저틀 교수는 가능한 메커니즘으로 메틸화를 들었다. 아구티 유전자 근처에 메틸기(CH3-)가 붙어 유전자의 정상적인 발현을 방해했다는 말이다.

실험에 쓰인 4종의 영양제는 비타민B12와 엽산, 비테인과 콜린인데, 이들은 모두 체내에서 DNA에 메틸기를 붙이는 효소를 만드는 재료로 쓰일 수 있다. 즉 이들 영양제가 아구티 유전자에 메틸기를 붙이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유전자 발현이 억제된 것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와 단백질 사이의 관계를 ‘유전학’(genetics)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해 왔다. 즉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지는 유전정보는 DNA라는 언어로 쓰여 있으며, DNA 염기서열의 변화와 재조합에 의해 형질의 변화가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DNA 염기서열에 변화가 전혀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유전자 발현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 변화가 자손을 거쳐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사례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전현상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이 어떻게 조절되며 또 이 변화가 어떻게 자손에게 전해지는지. 과학자들은 큰 의문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몇 과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존의 유전학과는 다른 ‘후성학’(epigenetics)이라는 분야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전자가 지배하지 않는 ‘이상한’ 유전현상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대표적 예가 노새다. 기록에 의하면 노새는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노새는 암말과 수컷 당나귀 사이의 잡종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잡종에는 버새라는 종이 하나 더 있다. 버새는 노새와 달리 숫말과 암 당나귀 사이의 자손이다. 즉 노새와 버새는 어버이의 종류만 달랐지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노새와 버새는 말과 당나귀의 유전자 한쌍씩을 갖고 있으므로 동일한 유전자 세트를 갖고 있는 셈이고 따라서 그 생김새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버새와 노새는 첫눈에 봐도 서로 다른 생김새와 특징을 갖고 있다. 버새는 노새에 비해 짧은 귀와 튼튼한 다리, 그리고 두꺼운 털의 갈기털과 꼬리를 갖고 있다.

유전현상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노새와 버새는 당연히 동일한 외모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발현 과정에 유전자 이상의 그 무엇이 작동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후성학의 핵심 요소 메틸기

해결의 실마리는 1990년대에 들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3년 메사추세츠 화이트헤드 연구소의 발생학자 루돌프 재니시는 유전자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유전현상에 대한 결정적 실험을 했다. 재니시 박사는 DNA에 ‘메틸기’(CH3-)를 붙이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제거된 모델쥐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이 모델쥐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 실험을 근거로 재니시 박사는 유전자의 발현에 메틸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최초로 밝혀냈다.

그 뒤 존스홉킨스 의대의 스테판 베이린 교수는 메틸기가 암 억제 유전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혔다. 베이린 교수는 다수의 암 환자 조직을 검사해 이들이 모두 종양 억제 유전자 중 하나인 p16에 메틸기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메틸기는 p16에 붙어 그 기능을 억제했고, 결국 온몸에 종양이 자랐던 것이다. 이처럼 메틸기는 p16의 기능을 끄고 켤 수 있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전학에서 핵심이 되는 메커니즘이 DNA에서 염기가 바뀌는 돌연변이라면, 후성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DNA 염기에 메틸기가 붙는 메틸화(methylation)이다. 메틸화의 본격적 메커니즘은 생화학자들이 DNA에 메틸 그룹을 붙이는 효소를 찾아낸 199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놈의 염기서열 중 시토신(C)과 구아닌(G) 두 염기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을 ‘CpG’라 하는데, 이런 지역에 존재하는 시토신이 메틸화될 수 있다.

랜디 저틀 교수의 쥐 실험에도 메틸화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아구티 유전자의 조금 앞쪽에 CpG 지역이 존재하고, 여기의 시토신에 메틸기가 붙어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나긴 진화의 생존 전략

노새와 버새의 미스터리를 해결한 열쇠도 바로 메틸기였다. 이 두 종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부모의 차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각각 다르게 유전되는 메커니즘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메틸화에 의한 유전현상의 조절은 결정적 힌트를 제공했다.

과학자들은 어머니로부터만 유전되는 유전자(H19)와 아버지로부터만 유전되는 유전자(Igf2)를 찾아냈다. 물론 이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손에게 유전되는 메커니즘도 밝혀냈다. 핵심은 메틸화였다.

Igf2와 H19는 조금 떨어진 거리를 두고 같은 염색체 위에 위치한다. 또한 이 두 유전자 사이에는 메틸기가 붙을 수 있는 CpG 지역이 존재한다. 두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식은 누구로부터 염색체를 받았는지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염색체 위의 H19가 발현될 때는 CpG 지역에 메틸기가 붙지 않기 때문에 인핸서(유전자 활성을 높여주는 DNA조각)의 자극을 받아 H19가 정상적으로 발현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염색체 위의 H19는 메틸화의 방해를 받아 발현되지 못하고 이보다 더 위쪽에 있는 Igf2가 발현된다(그림 1).
 

(그림1) 노새와 버새의 메틸레이션 차이


이처럼 유전자에 의지하지 않는 유전현상은 점차 그 베일을 벗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과학자들은 무엇이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껐다 켜게 하는지, 즉 어떤 유전자를 메틸화시키라는 명령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그리고 그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고 있다.

다만 과학자들은 메틸화에 의한 유전현상 조절은 진화의 오랜 역사를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에 등장한 이후로 외부 유전자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때 자체 방어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메틸화에 의한 유전자 억제라는 설명이다. 외부 유전자가 정상 유전자 사이에 끼이면 이 유전자 앞뒤로 CpG를 붙여 메틸화를 시킨다. 그러면 외부 유전자는 작동하지 않고 영원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 인간게놈에는 CpG가 밀집돼 있는 부위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 유전자의 50-60%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하나의 CpG 부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대부분은 비메틸화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신호가 오면 이 지역이 메틸화가 되면서 해당 유전자의 스위치를 끄는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RNA도 핵심 주자 중 하나

한편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고 유전현상을 조절하는 요소로는 메틸기 이외에도 아세틸기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지난 2000년 미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의 마이클 그런스타인 박사는 히스톤 단백질에 아세틸기가 붙는 방식으로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된다고 ‘네이처’에 발표했다.

아세틸기의 조절 작용은 효모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효모의 염색체에 아세틸기를 붙이는 효소를 인위적으로 없앤 효모(실험군)와 그렇지 않은 효모(비교군)를 비교했더니, 실험군에서 발현되는 단백질량이 비교군의 단백질량보다 훨씬 적었다. 즉 아세틸기가 효모의 염색체에 붙지 않으면 유전자 발현이 제대로 되지 않고, 그 결과 단백질량이 적어지는 것이다.

유전물질을 포함하는 염색체의 기본구조는 히스톤이라는 단백질에 DNA가 감겨있는 구슬 모양의 구조(염색질)다. DNA에 저장돼 있는 유전정보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감겨있는 DNA에 유전자 발현을 시작시키는 단백질(전사단백질)이 접근해야 한다. 그런스타인 박사에 따르면, 아세틸기는 전사단백질이 염색질에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그림 2).
 

(그림2) 아세틸기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
 

즉 아세틸화는 전사과정이 시작되도록 하거나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염색질은 마치 공회전을 하고 있는 자동차와 같아서 아세틸화라는 기어만 넣어주면 즉시 형질발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세틸기가 조금만 제거되면 다시 공회전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메틸기가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다면 아세틸기는 반대로 유전자 발현을 촉진시킨다. 또 메틸기가 유전자 차원에서 형질발현을 조절한다면 아세틸기는 이보다 조금 큰 차원인 염색질 수준에서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메틸기나 아세틸기 같은 미세한 분자뿐 아니라 거대분자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바로 RNA다.

RNA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10여년 전부터 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1998년 이 현상은 선충을 비롯해 영장류까지 다양한 동물에서도 관찰되기 시작했다.

최근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RNA는 DNA부터 단백질에 이르기까지 유전자가 발현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해 형질발현을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RNA는 염색질의 특정 부위에 직접 결합해 유전자 발현을 억제하며, 때때로 전체 염색체의 스위치를 완전히 꺼버릴 수도 있다.

특히 과일파리(fruit fly)의 경우 암수의 유전자 용량 차이를 맞추는데 RNA를 이용하고 있다. 과일파리 수컷은 암컷에 비해 X염색체가 하나 모자란다. 따라서 X염색체에 존재하는 유전자 발현 양이 암수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일파리는 ‘XIST’라는 RNA를 만들어 암컷의 경우 그 유전자 발현 정도를 억제하며 수컷의 경우 발현 정도를 촉진시켜 암수의 유전자 용량을 맞추고 있다.

아기 업그레이드 위한 임신 식단표

메틸기와 아세틸기 등 후성학의 구성 요소들은 DNA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흔히 한번 갖고 태어난 게놈 구조는 바뀔 수 없다고 알고 있다. 즉 아무리 환경 요소를 바꿔봤자 생물체의 운명은 이미 유전자 의해 결정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임신 중에 먹거리를 조심하라고 지적했듯이, 한번 정해진 유전정보는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식단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조금 나쁜 성향의 유전자를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환경을 바꾸면 이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좋은 유전자로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김용성 박사는 “환경 변화로 인한 메틸화는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더라도 유전자의 기능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생물학의 출발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먼 미래에는 아이의 유전적 성향을‘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임신 중에 꼭 먹어야할 식단표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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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박현정
  • 김대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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