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에겐 어떤 끼가 숨겨져 있을까. 그들은 부모님, 형제들과 어떤 모습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과학자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을까. 한국의 과학자로서 갖는 자부심과 비전은 무엇일까. 끼, 끈, 꾀, 꿈이란 4개의 단어를 통해 과학자들의 세상을 풀어본다.
학술연구분야
유명희
1954년 서울 출생
1976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1981년 미국 버클리대학 미생물학 박사
1981년-1985년 MIT 대학원 박사후과정
1985년-199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생명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
1998년 제1회 유네스코-로레알 여성과학자상
2001년-2002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단백질긴장상태연구단 단장
2002년-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과학기술부 프로테오믹스이용기술개발사업단장
오세정
1953년 서울 출생
1975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81년 미국 스탠포드대학 물리학 박사
1981년-1984년 미국 제록스 팔로 알토 연구소 연구원
1984년-현재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1998년 한국과학상
1999년-2001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1999년-현재 서울대 복합다체계 물성연구센터 소장
이상엽
1964년 서울 출생
1986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87년-1991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생물화학공학 석,박사
1992년-1994년 KAIST 생물공정연구센터 선임연구원
1994년-현재 KAIST 교수
1996년 제1회 중한청년 학술상(공학부문) 수상
1998년 제1회 젊은 과학자상 수상
2000년 제1회 엘머 가든상(미국 화학회) 수상
이영욱
1960년 서울 출생
1984년 연세대 천문학과 졸업
1984년-1989년 미국 예일대 천체물리학 석사, 박사
1989년-1990년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교 박사후 연구원
1990년 더크브라우어상 (예일대학교 우수 박사학위 논문상)
1990년-1993년 미국 NASA 우주망원경 연구소 연구과학자
1993년-현재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 교수
1997년-현재 연세대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 단장
2002년 아시아 차세대 리더 선정 (세계경제포럼)
끼
유명희
운전을 할 때 늘 새로운 길만을 고집하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왜 사서 고생이냐고 한마디씩 한다. 그에겐 고생이 아니라 재미일 뿐인데 말이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는 까닭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재미 때문이란다. 사실 새로운 것을 즐기는 그의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다. 덕분에 리어카 타고 씽씽 달리며 언덕에서 굴러떨어질 뻔하거나 술래잡기를 하다가 하수구에 숨어 큰 낭패를 볼 뻔한 기억 등 아슬아슬한 어릴 적 추억이 한 보따리다.
새로운 것을 즐기는 유명희 단장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매력은 추진력이다. 주변의 평가에 따르면 유 단장은 한가지 목표를 정하면 집요할 정도로 끝까지 추진하는 스타일. 하지만 유 단장 본인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쉬어가는 편이라고 말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쉴 수는 있지만 포기는 안해요”라고 귀띔한다. 일을 할 때는 공격적으로 해야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늘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단장의 건강유지 비결이다. 그는 사고의 방전을 위해 소설책 읽기, 쇼핑, 등산, 영화가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책과의 오랜 인연을 털어놓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비롯해 대학 시절을 회상케했던 이문열의 소설, 그리고 이문열의 ‘삼국지’ ‘람세스’ ‘로마인 이야기’ ‘마녀가 더 섹시하다’ 등 최근의 소설과 수필 이야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유 단장은 30개 이상의 연구팀이 프로테오믹스란 보물을 찾도록 진두지휘하는 선장과 같다. 배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어느 팀을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보물섬에 도착해서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판단해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대비해야 한다. 연구자로 논문만 쓰던 유 단장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명희 단장은 “연구경영은 정말 도전적인 일이예요. 솔직히 처음에 일을 맡았을 때는 연구경력에는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구 경영에 또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러고보면 유 단장은 보물섬을 찾는 사람이기 보다는 보물을 만드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오세정
요즘 신문이나 잡지에 이공계의 역할에 대한 칼럼을 쓰고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미래전략분과 내 과학환경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가 바로 오세정 교수다. 이공계 사람들은 조리 있게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 교수가 이공계의 대변인으로 나선 것이다. 그가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 교수는 과학자로서 실용적인 삶에 관심이 많다. 그가 물리학 중에서 고체물리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도 이 분야가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고치려고 애를 쓰는 성격의 소유자다. 특히 그에게는 국제학계에서 한국과학자가 받는 홀대도 참을 수 없는 불만이었다. 오 교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한국과학상을 받은 좋은 논문을 미국물리학회에 제출했는데, 처음엔 퇴짜를 맞았다. 똑같은 연구를 담은 논문이라도 미국 하버드대 과학자가 냈을 때와 한국과학자가 냈을 때의 평가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오 교수는 자신의 논문심사위원이 자기 분야의 최신 흐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심사위원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심사위원은 바꿨고 논문은 통과됐다.
오 교수는 몇년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의 승진 시스템을 바꾸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기존 시스템에서는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승진이 가능했지만,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외국사람으로부터 승진 평가를 받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교수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오 교수는 혼자서 잘 하는 것보다 교수, 대학, 과학자 등 전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과학자들의 책임을 강조한다. 현대는 과학적 연구가 실제적 응용과 가까워져 과학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상엽
“실험할 때 매우 침착했어요. 얌전하지만 질문할 건 꼭 했구요.” 그를 기억하는 초등학교 은사의 말이다. “노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교수가 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대학 동기의 평이다. “집에 레코드판이 3천 장이나 있어요. 고등학교 때 청계천 음반가게들을 누비며 열심히 모았죠.” 이상엽 교수 본인의 말이다. “우리 선생님요? 당구 3백에 볼링 애버리지 1백70 이상이에요.” 그의 제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끼가 넘쳐난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1994년 만29세의 나이로 한국과학기술원 최연소 교수로 부임한 인물다웠다. ‘주변에서 천재라는 소리 많이 들으셨죠?’라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손을 좌우로 휘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신은 보통사람이란다. 단지 한번 시작한 일은 끝날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뿐이라고.
언제부터 자신이 과학을 공부할 것을 알게 됐냐는 질문에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6학년 형과 한 조를 이뤄 어린이과학경시대회에 나갔다가 과학왕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과학경시대회는 교실에 앉아서 과학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실험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수조에 실린더를 세워놓고 압력차를 재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벌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조가 과학왕을 차지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할 수 없었다. 한창 벌의 다리와 털, 관절을 그리고 있는데 시험이 끝났다며 그만하라고 했기 때문에 장려상이라도 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과학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방과 후 과학반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접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왕 등극(?) 이후 그는 과학에 대해 자신의 흥미와 소질도 확인하고 자신감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이영욱
한국 최초로 미항공우주국(NASA)과 함께 우주망원경 갤렉스(GALEX)를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영욱 교수. 그에게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오메가 센타우리라는 천체의 정체를 밝히며 기존의 은하 형성이론을 뒤집다.”(1999년 11월 4일자 ‘네이처’) “63년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난제를 풀어 우주의 나이를 새롭게 알아내다.”(2002년 7월 26일자 ‘사이언스’) 우리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그의 업적만큼 자신감에 찬 그의 목소리가 듣는 이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지녔기 때문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의 좌우명이다. 그냥 듣기에 좋은 말이 아니라 그에게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살아 꿈틀거리는 잠언이다. 1997년 남미에서 그의 연구팀이 오메가 센타우리의 디지털 사진을 수백장 찍던 때의 얘기를 꺼낸다. “1주일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그쪽 천문대 사람들도 1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한 날씨라고 했을 정도였죠. 그 뒤에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리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나 봐요. 남들이 5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간단하게 풀 수 있었죠. 우리 업적은 하늘이 준 선물이랍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천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덕분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천문학을 하려면 ‘천문학에 미쳐야 한다’는 그의 말을 행동으로 웅변하는 듯하다. 이만하면 그를 천문학 전도사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교수 스스로는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른다. 돈이나 명예를 중시하는 세상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그는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끈
유명희
유명희 단장은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점이 다행이라고 이야기 한다. 부모님 관심 영역에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동네에서는 장난꾸러기로 통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해봤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가 과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는데 졸업 후 시집가는 것을 보고 아깝다고 생각하셨나봐요” “저보고는 시집도 가지 말고 퀴리부인 같은 과학자가 되라고 하셨어요” 구체적인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부터 유명희 단장의 꿈은 자연스럽게 과학자였다.
생명과학자인 유명희 단장이 고등학교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생물이었을까. 아니다.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다. 과학 중에서는 물리를 더 좋아했다. 생물은 외우는 것이 너무 많아 싫어했다고 한다. 지금도 아들이 고등학교 생물을 물어보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고백한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엄마, 과학자 맞어?”란 농담아닌 농담을 건넨다고 한다. 그러면 “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의 생명현상만 다루기 때문이야”라며 면피성 웃음을 짓는다.
유 단장은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안 드림을 들으며 자신도 미지의 곳에서 살고 싶어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주저없이 짐을 꾸려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교 8학기 동안 휴교령이 내려 공부를 하지 못했던 유 단장에게 유학은 만만치 않은 모험이었을 듯했다. 이에 대해 “머리가 텅빈 상태에서 공부를 하니까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공부한 것 같아요”라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유학갔을 때 정말 내겐 아무 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었죠. 생명과학을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동기가 있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유학생활을 하던 그에겐 차츰 무언가 쌓여갔다. 지식과 자신감, 그리고 생명과학이란 숲의 길을 본 것이다. 유 단장은 이제 생명과학이란 숲의 길을 볼 뿐만 아니라 생명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세정
오 교수는 자신이 물리학도가 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던 사람으로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을 꼽았다. 입시교육에 물들어 있던 고등학교 시절 그의 학급을 대상으로 물리를 가르치던 교사는 교과서에도 없는 상대성이론을 가르치는 엉뚱한 괴짜였다. 하지만 수업은 재미있었고, 대학에 진학할 때 물리학과를 선택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는 대학 시절 데모하던 친구로부터도 무언가를 배웠다. 데모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갔던 친구는 시대에 걸맞게 하고 싶은 일을 했고 데모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오 교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좌우명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성의를 다하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한 연구가 오 교수의 전공이었다. 당시에 그가 만났던 김호길 포항공대 전 총장과의 인연은 남달랐다. 김호길 전 총장이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교수로 있을 때였다. 그때 김호길 전 총장은 언젠가 한국에 가서 가속기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고, 오 교수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난 가속기를 만들 테니 자넨 그 가속기를 가지고 연구하게”라며.
오 교수는 김호길 전 총장이 죽기 6개월 전의 에피소드도 하나 소개했다. 김호길 전 총장이 한 세미나에서 가속기 사용에 대한 발표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오 교수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가속기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지. 내가 바로 이 사람을 위해 만든 거야”라고.
이상엽
“고등학교 2학년 때 생물 수업을 들은 게 전부였어요. 대학교에서는 화학공학을 공부했으니까요. 그런데 미국 학생들도 나와 상황이 비슷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해봐야겠다고 맘먹었죠.” 지금은 국제적으로 생물공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가 생물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던 유학시절 당시에는 생물의 ‘생’자도 몰랐다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서울대에서 화학공학으로 학사를 마친 후 그는 화학공학이라는 학문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그래서 화학공학을 좀더 공부해보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미국의 노스웨스턴대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지도교수로 가르침을 받으려 했던 교수는 이미 전공을 바꾼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 고민을 하고 있던 그에게 텍사스 라이스 대학에서 생물공학을 전공한 파푸차키스 교수가 운명처럼 노스웨스턴대로 부임해왔다. 생물은 동식물을 관찰하고 분류하는 학문이라고만 생각하던 그에게 생물공학은 하나의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생물공학을 전공으로 택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새롭게 떠오르는 학문에 동기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기 때문. 그러나 이 교수는 특유의 배짱과 능력으로 파투차키스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파푸차키스 교수의 혹독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면서 학자로서의 능력과 태도를 갖췄다.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하지 말라고 늘 말씀 하셨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상엽 교수는 일순 숙연해진 모습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아버님이 그가 어릴 때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였다. 그에게 파푸차키스 교수가 학문의 선배였다면, 아버지는 인생의 선배였던 셈이다.
이영욱
이영욱 교수의 우상은 세계 천문학계의 살아있는 영웅, 미국 카네기천문대의 앨런 샌디지 박사다. 이 교수는 고등학교 지구과학책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을 발견한 후 그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샌디지 박사는 인품이나 인생관이 훌륭할 뿐 아니라 70세까지 논문을 쓸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이 교수가 미국 예일대에서 준비했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공교롭게도 ‘샌디지의 이론이 틀렸다’는 내용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샌디지 박사의 말이라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 교수의 주장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급기야 샌디지 박사가 직접 이 교수를 찾아와 1주일간 토론을 벌였다. 샌디지 박사는 이 교수를 ‘헬륨연소단계 항성의 대가’로 인정했고, 이 교수의 아이디어는 널리 인용됐다.
이 교수가 연구해온 헬륨연소단계 항성에서는 자외선이 강하게 나오는데, 자외선을 관측하려면 우주로 나가야 했다. 때문에 이 교수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자외선우주망원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연세대로 부임해서는 젊은 소장파 천문학자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우주망원경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했다. 하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벅차 보였기 때문에 국제 공동 연구를 여러모로 모색했다. 결국 1997년 기회는 왔고 NASA와 공동 연구를 추진했다.
이 교수는 갤렉스 계획의 한국 측 대표인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을 정예의 멤버로 꾸렸다. 특히 우주광학관측기기 개발의 권위자인 영국 런던대 천문학과의 김석환 박사를 초빙했다. 김 박사는 절반으로 줄어든 월급을 감수하고 기꺼이 동참했다. 이 교수는 김 박사를 비롯한 연구단원들을 어느 누구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자랑했다.
꾀
유명희
우리 몸의 뼈와 근육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진 단백질은 사실 몸속에서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역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생체에서 이뤄지는 소화와 같은 여러 반응을 가능케 하는 효소, 질병으로부터 방어해주는 면역단백질,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유명희 단장을 포함한 생명과학자들에게 단백질이 화두인 까닭은 단백질이 우리의 질병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병이란 한마디로 단백질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2년 7월 21세기 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프로테오믹스이용기술개발사업단을 발족시켜 본격적으로 단백질연구 대열에 진입했다. 그러기에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인 단백질의 비밀을 찾아 출항한 프로테오믹스이용기술개발사업단호의 선장인 유명희 단장의 각오는 남다르다. “우리 사업단은 암을 제외하고 한국인에게 자주 발생하는 질병인 골다공증, 당뇨, 동맥경화, 치매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발굴해내고 이것이 신약 개발로 이뤄질 수 있도록 원인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힐 것입니다.”
유명희 단장은 김순덕의 책 ‘마녀가 더 섹시하다’에서 읽은 “기회는 도둑놈 같다”란 말에 1백% 동의한다. 기회란 도둑과 마찬가지로 기다려야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유 단장은 과학자는 좋은 문제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좋은 문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유 단장의 생각이다. 좋은 연구과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공이 들어가지 않으면 중요한 일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래서일까. 유 단장의 좌우명은 ‘후회할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인 셈이다.
오세정
오 교수는 물리학 중에서도 당장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철이나 나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고체물리를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신소재와 신물질을 연구하는 분야를 선택했다.
그는 1998년 초 신물질의 성질을 설명하는 혁신적인 이론으로 한국과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반도체를 비롯한 물질을 ‘띠 이론’(band theory)으로 설명했다. 띠 이론은 양자역학이 도입되면서 곧바로 이해됐고 20세기 말까지 물질을 설명하는 주류의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띠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물질이 발견됐다. 새로 발견된 신물질에는 흥미로운 것이 상당히 많았는데, 고온초전도체가 대표적인 예다. 오 교수는 이런 신물질의 성질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던 것이다.
현재 오 교수는 서울대 내에 설치된 복합다체계 물성연구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이 연구센터는 1999년 한국과학재단의 과학연구센터로 선정된 이후 신물질의 성장과 광학적·전자기적 성질을 탐구하고 있다. 21세기의 신소재를 개발하는데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 교수의 이같은 연구 능력과 경향은 유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유학할 당시에 그는 이론보다 실험에 관심이 컸다. 유학 초기에는 물리학과에 있으면서 전자공학과 교수를 지도교수로 선택하기도 했다. 6개월 만에 응용물리 분야로 돌아서긴 했지만, 그의 실용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한편 오 교수는 자신의 연구센터를 운영하는데도 남다른 방침을 갖고 있다. 센터의 모든 세미나는 소속 연구원뿐 아니라 국내 관련연구원들에게 개방돼 있고, 우수한 연구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의 선진연구자들과 국제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으며, 신개념의 소자를 개발하기 위해 산학협력도 추진중이다.
이상엽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자신에게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이 죽은 후에 알려질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절대 신념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공 비법과 노력, 집착, 끈기를 한 눈에 짐작케 하는 말이다. 소위 술술 잘 풀리는 운 덕분에 지금의 이상엽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는 막연하게 생물공학을 연구할 수 있는 연구소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한 박사로부터 초청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 달 후 그분이 돌아가셨고, 이상엽 교수의 초청 제의는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때 다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물공정연구센터의 선임연구원 제의가 들어왔고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류상의 착오로 인해 이 역시 물거품이 돼버리고 10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는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무작정 썩히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남들보다 늦었지만 군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파트타임으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병행하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저녁 8시 경 방위병 근무를 마치면 곧장 연구실로 직행해 새벽까지 연구하고 서너 시간 눈 부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는 주로 박테리아 연구에 매달렸다. 박테리아가 만들어내는 물질을 살펴보니 그 화학 구조가 폴리에스테르였고, 폴리에스테르가 플라스틱의 일종이라고 생각한 그는 박테리아가 플라스틱을 만들었으니 분해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생한 2년여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상엽 교수의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썩는 플라스틱 개발이었다. 그의 신념과 노력에 행운의 신이 그의 편이 돼 주었던 것이다.
이영욱
이영욱 교수는 천문학이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학문이기 때문에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별들이 하나의 은하를 이루고 다시 수많은 은하들이 방대한 우주를 구성한다. 그의 연구결과를 우리은하를 비롯한 개개의 은하에 적용하면 은하의 형성과 기원을 알아낼 수 있다. 특히 은하에서 나오는 자외선과 가시광선을 비교하면 은하 형성과정에서 나이와 화학조성에 의한 효과를 구별해낼 수 있다고 한다.
동양인 최초로 허블 연구기금을 받아 NASA에서 근무했던 시절에는 은하 형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먼저 은하의 중심이 형성된 뒤, 은하의 가장자리(나선팔)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다. 거대한 가스구름이 수축되면서 은하의 바깥쪽에서부터 안쪽의 순서로 만들어졌다는 기존의 이론을 뒤엎는 그의 학설은 주목을 받았고 나중에 입증됐다.
또 최근에는 우주론적으로 확장해 우주 나이의 하한선을 결정하려는데 자신의 연구결과를 적용하려 하고 있다. 현재 우주에서 활약중인 자외선우주망원경 갤렉스가 앞으로 3년 동안 관측한 자료는 이런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많은 양의 논문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을 쓰더라도 제대로 된 논문을 쓰려고 하는 완벽주의자다. 네이처, 사이언스, 천체물리학저널 등에 8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과학인용색인(SCI) 등록 국제학술지의 논문들에 인용된 누적횟수가 총 1천4백여회에 달한다. 양이 아니라 질로 겨루려는 진정한 승부사인 셈이다. “논문은 그냥 펜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피가 잉크로 변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그의 지론이다.
꿈
유명희
프로테오믹스이용기술개발사업단이 발족한지는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무리인 시간이다. 하지만 유 단장은 신바람이 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빈발하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발굴할 수 있는 기반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농사로 이야기 하면 땅을 갈아 씨를 뿌렸다고나 할까. 이젠 잘 가꿀 일만 남은 셈이다.
현재 사업단에서는 치매, 골다공증, 동맥경화, 당뇨 등 여러 질병의 원인 단백질 후보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제 이 단백질 후보 중 어느 것이 질병 단백질인지 진위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이 결과를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팀에게 제공해 신약설계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불가능한 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 단장은 자신감에 차 있다. 지금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단의 단장으로서 큰 과제를 맡아 운영하는 유 단장에게도 개인적인 꿈이 있다. 단백질이 기능을 발휘하려면 구조적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생명과학자들은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분(활성부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른 분자들이 단백질 분자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체에서 1백만분의 1초(10-6초)란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나는 다이나믹한 과정이다. 만약 이 과정을 영화처럼 볼 수만 있다면 단백질 비밀의 열쇠를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 유 단장의 꿈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후회하지 않아요. 요즘 청소년들은 삶의 행복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과학을 좋아하면 주저없이 뛰어들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 것 아니겠어요?”라며 과학점수 100점 맞으면서 과학을 싫어하는 학생보다 점수는 조금 안 좋아도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이 미래의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세정
오 교수는 어렸을 때 비교적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은 그는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에도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문과는 단순히 있는 것을 나누는 분야이고 이과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저없이 이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현재 오 교수는 한국물리학회에서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과학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과학교육을 바로 잡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지금의 중·고등학교 물리 교과서는 엉망이라 전문가가 보더라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고는 무조건 외우기 식으로 과학을 교육하면 안된다며 그의 평소지론을 펼친다. 오 교수는 머지 않아 재미있는 중·고등학교물리 교과서를 만들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에서 출발해서 자연스럽게 그 속에 깃든 물리를 설명하는 실용적이고 흥미로운 책을 꿈꾼다. 한편 그는 최근의 이공계 기피 현상의 해결책을 피력하며 이공계의 꿈을 말한다.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이공계 지망 학생들에게 이공계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라고.
이상엽
‘나는 미래의 일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는 너무나도 빨리 오기에’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며 이상엽 교수는 자신의 미래를 얘기했다.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메뉴를 제시하면서 ‘chicken or beef?’라고 물을 때 한국의 청소년들이 ‘fish’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그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과감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10대 소년처럼 보인다.
“저는 호기심에 대한 답을 얻어내는 과학자이자 그 답을 가지고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공학자입니다.” 과학자와 공학자라는 두개의 명함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침대 옆에 항상 아이디어북을 놓아두고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메모를 해둔다. 그래서 제자들로부터 ‘아이디어 뱅크’라고도 불린다. 언제나 정력적이고 열정적인 연구자 상이다.
또한 그는 10년차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교육자로서의 각오도 남다르다. 그는 앞으로 10년 후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제자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장했느냐에 달려있다며 학생들에게 쏟는 애정의 크기만큼 쓴소리도 마다않는다. 10년이 지나도 1년 된 듯한 열정과 끈기, 1년이 지나도 10년 된 듯한 창의력과 성실이야말로 이상엽 교수의 미래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아닐까.
이영욱
이영욱 교수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의 아폴로우주선이 달에 착륙했다. 이때부터 우주에 대한 그의 관심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학생과학’이라는 잡지를 열심히 보다가 자코비니 별똥별 쇼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우이동 집에서 담요를 깔고 누워서 별똥별을 기다린 것이다. 그는 5시간 동안 하염없이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야말로 우주에 푹 빠졌다.
그리고 하늘이 자신을 부르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주저하지 않고 대학 입학 때 1번으로 천문학과를 선택했고 지금까지 천문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천문학자의 꿈을 이룬 것이다.
이 교수는 천문학을 업으로 삼으려는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시골에 가서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라고 권한다. 몇시간씩 밤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면 천문학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하늘이 선택한 사람만이 천문학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물론 이 교수 자신도 흔들릴 때가 있었다. 연구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 강남 아파트에 살다가 연세대 주변 ‘달동네’ 아파트로 옮겼는데, 그동안 생활형편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 학원에도 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등학생 딸로부터 아빠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 이 교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문학자를 비롯한 과학자는 양심을 지켜 가면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야”라고. 그는 평생 우주속에서 꿈을 꿀 천상 천문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