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 해바라기의 물결과 우수어린 음악. 이탈리아가 낳은 세기의 배우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 ‘해바라기’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팬들의 기억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1970년 개봉된 이 영화는 당시 옛소련에 속했던 크로아티아에서 촬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해바라기는 소련의 국화이기도 하다. 소련 사람들이 사랑했던 해바라기는 1980년대 후반 그 사랑에 대해 온몸으로 보은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체르노빌 오염물 제거한 해바라기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사건은 인근지역의 토양과 물을 방사성 물질로 오염시켰다. 당시 오염된 범위가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수거나 화학처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해바라기였다. 해바라기 뿌리에는 방사성 세슘(Cs)이, 줄기에는 스트론튬(Sr)이 고농도로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인공 연못에 띄워 물을 정화했다. 해바라기는 약 3주 간 방사성 물질을 흡수한 뒤 수거돼 일정한 곳으로 옮겨져 처리됐다. 이 방법은 다른 방법보다 훨씬 싸고 간단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오염 지역을 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이처럼 식물이 물질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특성을 이용해 환경을 정화하는 방법을 ‘식물을 이용한 환경정화’(Phytoremediation)라고 부른다. 식물을 환경정화에 이용하는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무렵이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 들어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부터다.
오염된 토양이나 물을 정화하는 방법은 이미 여러가지가 개발돼 있다. 예를 들어 화학적 처리같은 방법이나 미생물을 이용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들은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적용이 불편한 단점이 있다. 화학처리의 경우 그 자체가 또다른 오염원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식물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식물은 다루기가 쉽다. 미생물의 경우 배지가 있어야 하고 온도유지 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또 오염물을 정화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반면 식물은 오염된 곳에 심어두고 때가 되면 수확해 처리하면 된다(그림 1).
비용도 저렴할 뿐 아니라 일손도 훨씬 덜게 된다. 또 오염지가 푸른 나무나 풀로 덮이기 때문에 보기에도 좋다.
그렇다고 아무 식물이나 환경정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염도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식물 자신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금속같은 오염물질에 강하고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식물을 찾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많은 대학과 기업이 이런 식물을 찾아 전세계를 뒤지고 있다. 미국의 에덴스페이스도 이런 회사 중 하나다. 이 회사의 마이클 블레이록 박사는 지난 6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식물을 이용한 환경정화 심포지엄’에서 에덴펀(edenfern)이라는 양치식물을 소개했다.
무게의 0.2%까지 비소를 저장
에덴펀은 잎에 다른 식물보다 2백배 이상 높은 농도로 비소(As)를 저장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비소를 잔뜩 머금은 에덴펀의 잎은 최대 0.2%의 비소를 저장할 수 있다. 비소 농도가 2백μg/L(1μg=10-6g)인 수용액에 에덴펀을 넣고 24시간이 지난 뒤 측정한 결과 그 농도가 10㎍/L 이하로 줄었다. 이 회사는 방사성 물질인 우라늄을 제거하는데는 인도 겨자를 사용하는 등 오염원에 따라 최고의 정화효과를 보이는 식물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전자변형기술을 도입해 오염물에 대한 저항력을 높인 식물을 개발하는 연구가 시작됐다. 오염물에 강한 유전자를 넣어서 식물의 특징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포항공대 생명과학부 이영숙 교수팀은 미생물인 효모에서 중금속을 처리하는 YCF1 유전자에 주목했다. 이 유전자는 YCF1 단백질을 만든다. 이 단백질을 과잉으로 만들게 유전자를 조작한 효모는 중금속인 카드뮴(Cd)과 납(Pb)의 함량이 높은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번식한다. 흡수된 중금속 이온을 세포내 액포로 운반해 저장하는 해독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액포는 막으로 둘러싸인 세포내 소기관으로 쓰지않는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창고같은 역할을 한다.
오염물에 잘 견디게 하는 유전자 삽입
연구자들은 YCF1 유전자를 실험용 표준식물인 애기장대 게놈에 넣어보았다. 만일 효모에서처럼 식물에서도 이 단백질이 많이 만들어진다면 중금속에 강한 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유전자가 들어간 애기장대는 중금속이 녹아있는 배지에서도 잘 자랐다. 대조군인 일반 애기장대의 성장이 지리멸렬한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그림 2).
식물의 세포를 조사해본 결과 YCF1 단백질은 식물이 흡수한 중금속을 신속히 액포로 옮겨 정상적인 세포 대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연구 결과는 생명공학 분야의 권위지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8월호에 실렸다.
임업연구원 노은운 박사팀은 현재 이 교수팀의 결과를 실제 응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효모의 유전자가 식물체에서도 잘 발현됐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덩치가 큰 식물에 적용하는 것이다. 노 박사팀이 선택한 식물은 포플러(미루나무)다. 포플러는 성장이 빠르고 튼튼하기 때문에 환경정화용으로 인기가 높은 식물이다.
노 박사팀이 선택한 포플러는 특수한 품종이다. 봄이 되면 눈을 제대로 못뜰 정도로 날리는 솜(씨)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임업연구원은 10여년 간 전국 각지를 뒤져 이같은 불임성 포플러를 찾아냈다.
노 박사팀은 식물 세포 배양을 통해 유전자가 삽입된 포플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중금속에 대한 저항성을 실험한 결과 역시 유전자가 없는 포플러에 비해 성장이 월등했다(그림 3).
노 박사는 유전자가 들어간 포플러는 불임이기 때문에 생태계로 번질 위험성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수명이 30년 정도로 비교적 짧아 관리만 철저히 하면 외부로 나갈 염려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상용화까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각국의 대학이나 기업이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고 최근 흥미로운 결과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수은 이온을 환원시켜 독성이 훨씬 낮은 형태로 바꿔주는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들어간 식물이 개발됐고, TNT같은 위험한 화학물질을 안전한 물질로 바꿔주는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식물에 넣기도 했다. TCE라는 지하수 오염물질을 산화시켜 해독하는 포유류의 유전자를 식물에 넣자 TCE에 대한 산화력이 1백배나 높아졌다는 결과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세계적으로 형질전환기술을 도입한 환경정화 식물이 시장에 나와있지는 않다. 이제 막 시작된 분야인데다 유전자변형식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장기간의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영숙 교수는 5년 이내에 형질전환된 식물이 환경정화에 쓰일 것으로 예상했다.
매립장 침출수 정화하는 갈대의 힘
한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을 환경정화에 적용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 심포지엄에서 서울대 생명과학부 이은주 교수는 갈대를 이용해 쓰레기 매립지에서 나오는 침출수를 정화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늦가을 강둑이나 바닷가에 바람을 맞으며 이삭을 흩날리는 갈대는 풍경의 운치를 더해주는 벼과 식물이다. 이 교수팀이 갈대에 주목한 것은 갈대의 성장력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빨리 자랄수록 많은 물질을 흡수해 저장할 수 있다. 게다가 갈대는 수생식물이므로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데 제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5만t 가량의 생활쓰레기가 나오는데 이 중 23% 정도가 음식물 쓰레기다. 따라서 매립장에는 음식물찌꺼기에서 나온 영양물과 염분이 잔뜩 들어 있는 물이 흘러나온다. 이 침출수는 처리장에서 물리·화학적인 처리를 거치지만 여전히 탁한 상태에서 배출된다.
이 교수팀은 전국에서 수집한 갈대로 침출수 정화력을 실험한 결과, 일반 갈대보다 정화력이 2배 가량 우수한 품종을 찾아냈다. 이 갈대는 올 가을부터 1차 처리된 침출수가 흘러 나가는 하천 주변에 심어질 예정이다. 이 교수는 “갈대가 침출수를 한번 더 정화하면 다양한 수생 생물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갈대를 보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축산폐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식물이 쓰일 전망이다. 임업연구원 구영본 박사팀은 포플러로 축산폐수를 정화하는 연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수질오염의 주범인 축산폐수는 육류소비 증가와 함께 배출량이 급증해 하루 발생량이 13만t에 이른다. 전국에서 길러지는 소와 돼지를 합치면 1천만마리나 되기 때문이다. 현재 축산폐수는 처리 용량의 부족으로 상당 부분이 배에 실려 바다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의 실험 결과 1헥타르(약 3천평) 면적에 4m 간격으로 조성된 5년생 포플러숲(약 6백그루)은 맑은 날 하루 30t 이상의 축산폐수를 제거하고 연중 생육기간 동안 1천8백t을 정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천8백t이면 소 4백마리가 1년 간 내놓는 양이다. 포플러 한그루가 연간 약 3t의 축산폐수를 정화하는 셈이다.
구 박사팀은 현재 경기도 인근 축산농가 두곳에 축산폐수 정화림을 조성해 실용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또 최근 임업연구원 내에도 소규모 정화림을 조성, 정화능력을 수치화하는 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구 박사는 “포플러는 뿌리가 넓게 퍼지는 특성이 있어 하루 1백L가 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다”며 “축산폐수의 영양물이 오히려 거름이 돼 포플러의 성장을 돕는다”고 말했다. 축산폐수는 중금속처럼 위험한 물질이 아니므로 이를 흡수하며 자란 포플러는 목재로 재활용될 수 있다.
황폐한 폐광지를 박달나무숲으로
심각한 토양 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는 폐광지 환경을 정화하는데도 식물이 한몫 할 전망이다. 강원도 정선, 태백이나 경북 봉화 등 폐광지에는 고농도의 중금속에 오염된 토양이 8t 트럭 10만대 분량 이상 쌓여 있다.
광물을 캐내고 제련하는 과정에서 중금속 등 유해한 물질이 쓰이는데, 탄광이 문을 닫을 때 수거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다. 보기에 흉물스러울 뿐 아니라 비가 오면 빗물에 녹아내려 하천과 지하수를 오염시킨다.
임업연구원 이재천 박사팀은 박달나무를 심어 폐광지 토양의 오염을 정화할 계획이다. 연구팀은 박달나무가 웬만한 식물은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폐광지 주변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토양을 희석해 오염농도를 낮춘 뒤 나무를 심기로 했다. 희석제로는 하수 슬러지(하수를 정화하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부숙토를 택했다.
다량의 영양물이 들어 있는 하수 슬러지는 미생물 발효를 거치면 약알칼리성의 부숙토가 된다. 그러나 유해성분이 남아 있는 부숙토는 농작물이나 유실수에는 쓸 수 없어 마땅한 사용처가 없다. 결국 하수 슬러지는 비용이 드는 부숙토화 과정 대신 매립되거나 축산폐수처럼 인근 바다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다.
연구자들은 폐광지 토양과 부숙토를 3:1로 섞고 여기에 박달나무 묘목을 심었다. 이 묘목은 폐광지 토양에 심은 묘목은 물론 일반 토양에 심은 묘목보다 훨씬 잘 자랐다. 약알칼리성인 부숙토가 강산성인 폐광지 토양을 중화한데다 함유한 영양물이 거름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지난 6월부터 정선 폐광지에 부숙토를 섞은 뒤 박달나무 묘목을 심어 실제 환경정화 효과를 실험하고 있다. 흉물스런 폐광지가 박달나무숲으로 바뀔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임업연구소같은 공공기관이나 대학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선진국은 이미 기업들이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에덴스페이스도 이미 수십건의 대규모 오염지 정화 프로젝트를 완료했거나 진행하고 있다. 기업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장 잠재력 때문이다.
현재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미국내에서 3만곳 이상이 환경정화가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 현재 기술을 적용한다면 무려 7천억달러(약 8백40조원)가 소요된다. 그런데 상위 오염물질 6종 중 4종이 중금속, 즉 납, 비소, 수은(Hg), 카드뮴이다. 이 물질들은 식물이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 주목하고 있다.
노은운 박사는 “미국 회사들은 이미 수십건의 관련 특허를 확보하고 있다”며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이 분야는 머지 않아 큰 시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도 폐광지를 비롯, 오염도가 심해 정화가 필요한 곳이 상당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몇몇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는 있지만 당장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실정이다.
축산폐수를 정화하는 포플러도 정부나 자치단체의 지원없이는 보급이 쉽지 않을 것이다. 숲을 조성할 토지가 있어야 하는데 땅값이 비싼 우리나라의 경우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 나무는 겨울이면 성장을 거의 멈추기 때문에 폐수를 소모하지 않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나서 국민들에게 이 분야를 홍보하고 있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식물을 이용한 환경정화가 어떻게 작용하고 그 이점이 무엇인가를 알기 쉽게 설명한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그 결과 일반 시민들도 환경정화용으로 개발된 포플러를 구입해 집주변에 심는 등 식물을 이용한 환경정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매년 4월이면 돌아오는 식목일. 이 무렵이 되면 ‘환경을 정화하는 나무를 심자’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릴 날도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