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기술의 허약성이 세계적 수준에 육박한 한국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있다.
10여년전 국내 가전회사의 한 중역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우리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소재 및 부품기술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기업들이 비로소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구나"하고 기뻐하며 정성껏 그 내용을 적어준 KIST 연구원은 나중에 그 이유를 전해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전자회사의 중역은 그 내용을 일본 기술제휴선에 건네주고 그러한 기술을 팔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기술은 외국에서 돈주고 사오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국내 가전업체들은 요즘 그 기술 때문에 혼쭐이 나고 있다. 핵심소재나 부품일수록 대외의존도가 높은데 한국을 이미 만만찮은 경쟁상대로 여기는 일본 기업들이 선뜻 기술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VTR부품중 녹화와 재생기능의 핵심소재인 헤드드럼은 그 재료기술이 없어 드럼 자체를 수입하고 있으며 컬러TV의 천연색상을 내는 내부 코팅용 도료나 전자레인지 앞유리의 마이크로파 차단재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전자부품 수입의존도는 57%였으며 대일 수입의존도는 자동차부품 60%, 전자부품 56%, 기계부품 55.2%에 달했다. 소재기술의 뒷받침없이 핵심부품을 수입하고 완제품을 조립생산해 다시 수출하는 산업구조하에서는 일본 제품들과 경쟁하기가 힘들다. 더욱이 일본은 우리가 첨단소재를 자체개발하면 부품가격을 덤핑하거나 기술제공의사를 밝힘으로써 소재업체의 개발비부담을 가중시키는 술책을 쓴다.
중소기업이 주종을 이루는 소재나 부품업체들은 세트업체(가전3사)들이 국산 소재나 부품을 외면한다고 불평하고, 세트업체들은 국산부품을 쓰자니 품질은 떨어지는데 가격은 오히려 일제부품보다 비싸 제품 자체의 국제 경쟁력이 뒤질 위험이 크다고 핑계댄다. 소재 부품기술의 취약성이 한국 전자산업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 히타치사에서 캠코더 헤드재료를 연구하는 한 연구원은 자기 부서가 아무래도 적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이 분야에 더많은 투자를 하고 결과물을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는다. 다른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히타치 같은 전자회사는 내부의 재료연구팀이 자체적으로는 적자를 보더라도 첨단 신제품을 만들때 그 연구팀이 제품개발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시간을 다투는 첨단기술경쟁에서 신제품에 필요한 핵심부품을 외부 연구소나 부품업체에 의존하는 것은 신뢰성이나 속도면에서 안심할 수 없다. 또 내부에 재료연구팀이 있다면 이것저것 마음대로 주문해볼 수 있는 이점도 있다는 것. 하이테크 전자제품으로 한번 히트를 치면 재료팀의 적자 정도는 하루아침에 수백수천배로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속셈이다. 히타치보다 30년 먼저 이 전략을 구사한 무서운 기업은 소니다. 소니는 자사의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을 절대 외부에 맡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가전제품 내부의 반도체와 컴퓨터까지 스스로 만들어쓰고 있을 정도다.
"신소재는 시장이 없다"
신소재를 일본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원료가 전혀 새로운 것, 둘째 원료는 같아도 만드는 방법이나 기능이 전혀 다른 것, 셋째 원료와 만드는 방법이 같아도 응용분야가 다른 것.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한가지가 더 추가된다. 선진국에서는 상품화된지 오래돼 신소재로 치지 않더라도 아직 우리기술이 없는 재료를 만들어내는 것도 신소재에 포함시킨다. 가령 미국에서 40~50년전에 등장한 제트엔진용 초내열합금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신소재에 속한다.
신소재가 미래산업의 핵심기술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20년도 채못된다. 미국에서 군사용과 우주항공용으로 주로 활용되던 신소재기술이 민간산업으로 확산된 것은 70년대 중반 부터다. 두차례 오일쇼크로 각국은 에너지절약기술의 개발에 나서 항공기 건축재료의 신기술이 붐을 이루었다. 또 반도체 컴퓨터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전자산업의 경박단소(輕薄短小)화가 급진전됐다. 부품을 좁은 공간에 집어넣는 공간절약 기술이 강조됨에 따라 얇고 평평하고 작으면서도 고성능의 재료들이 요구됐다.
국내에서는 80년대초까지 신구소재의 구분이 없었다. 82년 신소재에 관련된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시작되고 84년 대통령 주재의 기술진흥확대회의에 신소재가 주제로 잡히면서 소재개발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80년대부터 일어서기 시작한 자동차 전자산업이 수많은 소재부품기술의 토대위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됐다.
그러나 80년대를 통틀어 신소재개발에 관한 효율적인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민간기업들은 핵심부품과 소재를 외국에서 들여와 조립생산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정부출연연구소 연구팀에 의해 간간이 발표되는 연구개발은 상품화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많은 중간과정이 단절돼 있었다. "소재개발의 필요성만 강조됐을 뿐 실질적인 투자는 전무했다"고 연구원들은 입을 모은다.
KIST 기능금속재료연구실 김희중 박사는 "신소재는 원래 시장이 협소하다. 전혀 새로운 제품이기 때문에 그 제품의 성공가능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이면 몰라도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시장이 형성돼 있는 정밀소재쪽으로 개발방향을 맞추었어야 옳았다"고 지적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아라미드섬유
신소재는 개발 못지않게 기업화전략이 중요하다.
아모르퍼스(amorphous, 非晶質)합금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10년전쟁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기적 성질이 뛰어나고 강도가 높아 '꿈의 재료'라 불리는 아모르퍼스는 70년대초반 미국 얼라이드사가 개발했다. 얼라이드사는 이 합금을 일본에 특허출원했는데 일본 정부가 고의로 심사를 지연하는 동안 일본 기업들이 이 기술을 습득해 버렸다. 그리고 일본 전력회사들은 담합을 통해 이 합금을 사용한 미국산 변압기 구입을 거부했다.
화가 치민 얼라이드사는 슈퍼 301조라는 큰칼을 휘두르며 일본 정부를 궁지에 몰아붙여 일단 상당한 양보를 받아냈다. 93년까지 일본이 이 합금을 만들지 않으며 3만여대의 변압기를 일본기업들이 사도록 굴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승부는 겉보기와는 달리 미국의 판정패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일본 기업들은 93년까지 아모르퍼스를 이용한 어떠한 전자부품도 상품화하지 않는다. 다만 연구만 진행시킬 뿐이다. 불행히도 전자부품산업이 시들어버린 미국은 아모르퍼스 특허권을 갖고 있지만 이를 다양한 첨단제품에 적용시킬 생산기술이 없다. 93년 이후 일본 기업들은 아모르퍼스를 이용한 첨단 전자제품으로 미국 시장을 마음껏 유린해버릴 것이 분명하다.
지난 85년 KIST 윤한식 박사팀이 개발한 아라미드섬유도 기업화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에 큰 벽을 만났다. 쇠보다 10배 단단하고 3백℃ 고온에서도 견디는 아라미드섬유는 방탄조끼나 포신(砲身)에 사용된다. 이 섬유는 미국 듀폰사가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있는데 윤박사는 듀폰사와 생산공정이 다른 제품을 개발했기 때문에 특허가 가능했다.
아라미드섬유는 개발 1년후 코오롱에 의해 상품화가 추진됐다. 그러나 연간 5백톤 규모의 실공장을 완성해놓은 상태에서 아라미드섬유 원료를 공급하는 네덜란드 악소사가 원료공급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왔다. 듀폰측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 아라미드섬유를 생산하려면 원료공장도 함께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코오롱은 진퇴앙난에 빠졌다. 막상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판매과정에서 듀폰측의 방해가 예상되는데다 이를 무릅쓸만큼 시장성이 있을지도 고민거리다. 아라미드섬유의 특허시효는 내년에 끝난다.
아라미드섬유, 반도체용 본딩와이어, 폴리에스터필름, VTR 자기헤드용 페라이트 단결정, 니켈기 초내열합금…
국내 최대의 신소재연구사업단이 있는 KIST가 80년대에 개발한 신소재들을 열거한 것이다. KIST 신소재사업단은 1백여명의 박사급 인력을 포함해 2백50여명의 연구원을 보유해 KIST 전체 연구인력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80년대 잇따른 정부출연연구소의 설립, 뒤이어 민간기업 연구소붐으로 KIST가 6,70년대의 절대적인 위치는 상실했지만 신소재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각종 연구개발을 주도한다.
신소재연구 총본산 KIST
신소재연구사업단안에 금속재료연구단(부장 최주) 세라믹스재료연구단(정형진) 고분자재료연구단(김정엽) 정보재료연구단(민석기) 등 4개 연구부가 있고 광통신과 광전자 초전도분야를 연구하는 광전기술센터(센터장 오명환)가 별도로 있다. KIST는 G7프로젝트의 신소재부문 주관 연구기관으로 선정돼 있다.
KIST 이외의 국내 신소재관련 연구팀으로는 화학연구소(고분자, 세라믹스) 기계연구소(자동차용 신금속) 전자통신연구소(반도체재료) 표준과학연구원(초전도체, 신소재특성평가) 동력자원연구소(원재료) 포철산하산업과학기술연구소(신금속) 등을 들 수 있다.
산업계의 소재관련 연구 및 생산현황을 보면 미일 등 선진국과 5~20년, 평균 10년의 격차를 두고 있다. 선진국에서 경쟁력이 떨어진 구소재가 우리나라의 주력 생산품이며, 선진국에서 한창 활용중인 소재를 우리는 연구개발중이다. 선진국에서 차세대 재료로 개발중에 있는 소재는 우리 수준에서 아직 기초연구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기업체들이 관심을 보이고 연구개발에 나서고 있는 신소재를 분야별로 살펴보면 먼저 정보산업 관련 소재로는 갈륨비소(GaAs)반도체, 광디스크 및 디스크드라이브, 고정밀하드디스크, 초격자구조 등이 있다.
신금속재료는 기존 금속의 특성향상을 도모하거나 선진국에서 실용화돼 기술적으로 안정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분야의 국산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초내열합금 신자성합금 고강도경량합금 전자냉각용재료 등이 이에 속한다.
고분자분야는 70년대 외국기술의 도입으로 범용 고분자소재가 현재 자급량을 초과하고 있으며 합성섬유 및 합성고무생산도 국제규모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시장이 작은 고분자 신소재에 대한 연구는 초기단계다. 최근 KIST와 럭키 선경 코오롱 등 민간기업들은 5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고탄성고분자 고내열고분자 복합재료 전기전도성고분자 감광성고분자)을 중심으로 자체기술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파인세라믹스분야는 절연 및 저항재료, 자성재료, 유전재료쪽은 상당 분량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으나 압전재료 반도성재료 박막재료 구조세라믹스 등은 국내생산이 극히 저조하다. 따라서 이들 분야에 연구개발이 집중되고 있다.
신소재 연구가 아무래도 상품의 생산기술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국내 대학의 연구수준은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경북대 등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일천하다. 대학의 신소재 관련 학과로는 전자공학과(전자재료과 포함) 금속공학과 재료공학과(무기재료과) 고분자공학과 섬유공학과 화공과(공업과학과) 화학과 물리학과 등이 있다. 신소재연구가 폭넓은 기초과학 지식을 필요로 하므로 학부과정에서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기초과학을 전공하고 석사 이상에서 세부전공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연구원들도 있다.
신소재 세계시장 규모는 지난해 9백48억달러에서 오는 서기 2000년에는 3천9백억달러로 증가해 연평균 15%의 높은 성장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시장규모도 지난해 30억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신소재는 기존소재보다 가공도가 높은 반면 상상을 초월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예컨대 VTR 자기헤드는 원료 가격의 1천배, 인체내에서 쉽게 분해되는 체내분해성 수술용 봉합사는 약2만배에 달하는 초과이윤을 보장한다. 그만큼 원천기술을 가진 나라와 기술을 얻어쓰는 나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80년대초와 3저호황 시기를 허송세월로 보내버린 국내 기업들은 최근 기술없는 설움을 겪고서야 소재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KIST 세라믹스연구단 정형진박사는 "전자 자동차산업의 규모나 연구인력면으로나 미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우리나라를 꼽는다. 다만 정부의 무계획성과 기업들의 오만함으로 80년대에 몇번의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최근 진전을 보이고 있는 한소관계를 잘 활용해 그들의 첨단기술을 익힐 수 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정보재료연구단 민석기박사는 "소재산업으로 돈을 벌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원천기술을 갖지 못하면 정보통신 우주항공 자동차 에너지 등 미래산업 모든 분야에서 사상누각을 짓는 것과 같다"고 진단한다.
리드프레임 아라미드펄프 초강력합금 등 80년대에는 몇몇 세계적 수준의 신소재개발이 있었다. 이제는 전시효과로만 그치는 신소재개발이 아니라 연구소의 개발능력이 기업의 생산라인에까지 연결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때다.
KIST 신소재사업단 장성도 단장 "G7프로젝트에 큰 기대"
전자산업이 양적 팽창을 거듭해 세계 정상권을 바짝 추격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핵심 소재 부품은 대부분 외국에 의존합니다. 선진국들이 경계의 눈빛으로 소재기술을 주기 꺼리자 비로소 기업들이 다급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10년전이나 3저호황에 들떠있을 때 이런 식으로 나왔어야 했어요"
국내 신소재연구의 총본산 KIST 장성도 신소재사업단장은 "우리나라 주축산업이 돼버린 자동차 전자분야에서 선진국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려면 소재분야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8mm 비디오 캠코더를 국산화했다고 떠들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핵심부품 어느 하나 우리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기업들이 소재분야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시작하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해 10년 정도 뒤진 소재기술을 일정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신소재개발은 막대한 예산과 인력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한편 성공에 대한 위험도가 높고 사회적인 공공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선진국에서는 정부주도로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매년 거창한 기술개발계획이 마련되지만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농가부채탕감이니 사회간접자본이니 하는 사업에 기술개발투자는 우선순위가 밀려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모으는데 기술개발이란 메뉴는 인기가 없나 보지요. 드골대통령이 프랑스 과학기술중흥에 앞장섰듯이 정치철학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있기 전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과학기술인력이 부족하다고 난리법석이지만 정작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급인력들은 국내에 일자리가 없어서 못들어오는 실정이라고 한다. KIST도 몇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있는 정원(T.O) 때문에 욕심나는 사람이 있어도 뽑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
장성도 단장은 내년부터 본격 가동될 'G7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신소재 중에서 기업체에서 관심을 갖고 있고 선진국과도 어느 정도 겨뤄볼만한 16개 세부과제를 뽑아놓고 이를 어떤 식으로 운영할 것인지 묘안을 짜내느라 요즘 그는 매우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