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아내 대신에 가사를 돌보는 남자들이 적지 않다. 음식 설거지에서부터 아이 기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젊은 남편들의 모습은 더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다.
큰박쥐 수컷의 발견
그러나 남자들이 도와줄 수 없는 아내의 일이 한 가지 있다. 아이에게 젖을 주는 일이다. 남자 젖꼭지의 존재는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을 괴롭혔다. 1794년에 펴낸 '주노미아'(Zoonomia)에서 동물이 일생 동안에 획득한 유용한 형질이 자손에게 전승되어 생물의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는데, 유일한 예외로 모든 네발 짐승의 수컷이 갖고 있는 젖꼭지를 꼽았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수컷의 유두가 진화된 까닭은 한때 일부 수컷이 유즙(젖)을 분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그로부터 2백년 뒤인 1994년까지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4천5백종의 포유류 중에서 어느 한 종도 젖을 분비하는 수컷이 있으리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생리적인 구조가 암컷과 다르고, 암컷만이 임신할 수 있기 때문에 수컷이 정상적인 조건에서 유즙을 분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1994년 말레이지아에서 산 채로 붙잡힌 데이악(Dayak) 큰박쥐의 수컷 열마리가 모두 젖으로 부풀어오른 유선(乳腺)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선은 포유류 특유의 젖 분비선인데 젖꼭지에 열려 있으며, 젖샘 또는 젖멍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녕 수컷도 암컷처럼 젖을 분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유류 수컷이 생리적으로 유즙 분비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테스토스테론의 막강한 영향력
사람의 경우, 부모는 자식에게 염색체를 23개씩 물려주는데 그 중 하나가 성염색체이다. 어머니는 X염색체를 두개, 아버지는 X염색체와 Y염색체를 한개씩 갖고 있다. 정자가 X염색체를 갖고 있으면 태아는 여자(XX)가 되고 Y염색체를 갖고 있으면 남자(XY)가 된다. 남녀를 불문하고 임신 후 5주째에 고환 또는 난소가 될 성선 한쌍과, 생식기관이 될 울프관(Wolffian duct)과 뮐러관(Mllerian duct)이 좌우 한쌍씩 나타난다.
아들인 경우 Y염색체의 유전자에 의해 7주 쯤에 성선이 고환으로 분화된다. 고환의 발생은 남성을 만드는데 있어 Y염색체가 하는 역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여기서부터 남성 분화과정의 나머지 부분은 고환에서 나오는 호르몬에 의해 추진된다.
고환은 8주째에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여 울프관이 부고환과 정관으로 자라도록 자극하는 반면에, 뮐러관의 발달을 억제하는 호르몬을 생산한다. 이어서 남성의 외부생식기인 페니스와 음낭이 형성된다.
한편 딸인 경우 Y염색체, 즉 고환을 형성하는 유전자가 없으므로 13주경에 성선이 난소로 분화된다. 테스토스테론이 없으므로 울프관은 저절로 위축되어 흔적기관으로 사라지고 뮐러관은 자궁, 난관, 질로 발달한다. 이어서 여성의 외부생식기인 클리토리스와 음순이 형성된다.
중요한 사실은 테스토스테론의 분비여부에 따라 태아의 같은 조직이 페니스 또는 클리토리스, 고환이 담긴 음낭 또는 질을 둘러싼 음순으로 분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테스토스테론에 반응하는 세포의 기능에 결함이 발생하면 유전적으로는 정상적인 남성이 여자처럼 질은 물론이고 풍만한 유방이나 날씬한 다리를 가질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이 울음에 반사적으로 반응
포유동물의 수컷은 모두 암컷처럼 유선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컷의 유선이 덜 발달되고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종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다. 예컨대 생쥐는 유선의 도관(導管)이나 젖꼭지가 형성되지 않았지만 개나 영장류는 암수 모두가 사춘기 전까지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젖꼭지와 도관을 갖고 있다.
사춘기를 지나면 성선이나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암수의 유선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한다. 먼저 암컷의 유방이 부풀어 오른다. 임신을 하면 유방은 더욱 커지고 유즙을 생산하게 된다.
사람의 경우 유즙의 생산을 촉진하는 호르몬은 프로락틴(prolactin)이다. 그러나 출산 즉시 모유가 유두 밖으로 자동적으로 배출되는 것은 아니다. 유선의 도관으로부터 유두로 모유를 보내기 위해서는 유선을 둘러싼 근육세포의 수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은 시상하부에서 합성되어 뇌하수체를 통해 방출되는 옥시토신(oxytocin)이다. 갓난 아이가 젖꼭지를 빨면 유두의 신경세포가 이 정보를 시상하부로 전달하고, 시상하부는 뇌하수체에게 옥시토신의 방출을 지시한다. 옥시토신이 유선 주변의 근육세포의 수축을 자극하면 유두에서 젖이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건반사적으로 발생하므로 수유반사(suckling reflex)라 한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어머니의 젖꼭지가 금세 꼿꼿해지면서 젖을 먹일 태세가 되는 것은 반사적으로 어머니의 몸에서 옥시토신의 분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임신을 하면 유방의 팽대와 유즙의 분비에 필요한 호르몬이 분비된다. 바꾸어 말해서 임신 중에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 예컨대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을 직접 주입하면 유방 팽대와 유즙 분비를 촉발시킬 수 있다.
호르몬에 대한 반응에 있어 암컷과 수컷 사이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이러한 호르몬을 동물에게 주입하면 암컷뿐만 아니라 염소, 기니피그, 송아지 따위의 수컷들은 젖통이 커지면서 젖을 생산하게 된다. 물론 수송아지가 암소보다 훨씬 적은 양의 우유를 내놓지만, 유선조직이 발달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경우 호르몬을 투입하여 임신하지 않은 여자는 물론이고 사내들조차 유방이 발달하고 젖이 분비된 사례가 적지 않다. 에스트로겐으로 치료중인 암 환자들에게 프로락틴을 주입했는데, 남녀 모두 젖을 분비했다. 프로락틴의 공급처인 뇌하수체를 제어하는 시상하부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제를 복용한 사람들이 젖을 분비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의약품을 사용한 결과이지만 단순히 젖꼭지를 기계적으로 자극하여 유즙을 분비시킬 수 있다. 유두를 반복하여 자극하면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대동물(캥거루 등)의 처녀암컷들은 남의 새끼를 젖꼭지에 놓고 규칙적으로 자극해서 젖을 분비할 수 있다.
사람 역시 손으로 유두를 자극하면 남녀 모두 프로락틴의 분비가 촉진된다. 대부분의 양모들이 입양아를 가슴에 안고 3-4주를 지내면 약간의 젖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71살 먹은 노파가 젖을 분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구약성서의 룻기를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룻이 낳은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자기 자식으로 길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겨 남자의 유방이 커지고 가끔 젖이 흘러나온 사례가 있다. 2차대전 후에 수용소에서 풀려난 전쟁포로 중에서 수천명이 그러한 현상을 나타냈는데, 일본군 포로수용소 한 곳의 생존자 가운데서 무려 5백명이 젖을 찔금찔금 흘린 것으로 관찰되었다.
가장 그럴 법한 이유로는 굶주림으로 호르몬을 생산하는 내분비 계통뿐만 아니라 호르몬을 파괴하는 간의 기능에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생리학적으로 젖을 분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정상적인 조건에서 이러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끔 진화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남자들은 유즙 분비를 위한 하드웨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도태에 의해 그것을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화는 왜 남자의 유즙 분비를 허용하지 않았을까.
이 수수께끼에 대해 흥미로운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미국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이다. '제3의 침팬지'(1992)에 이어 1997년에 '대포, 세균 그리고 강철'과 '왜 섹스는 재미있는가'를 연달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로 만든 저명한 과학저술가이다.
처자 유기는 동물세계의 관행
동물의 암수가 새끼를 책임지는 방식은 종에 따라 다르다. 어느 쪽의 부모가 자식을 더 많이 돌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자식에 대한 투자의 불균형이다. 포유류 암컷은 수컷보다 임신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투자한다. 가령 사람은 9개월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란다. 투자를 많이 한 기업체를 포기할 수 없는 대주주처럼, 어머니는 출산 후 아버지보다 훨씬 더 갓난아이를 돌본다. 젖을 먹이는 일은 모성애의 한가지 표현에 불과할 따름이다.
다른 하나의 요소는 부성에 대한 신뢰성 문제이다. 포유류 암컷은 뱃속의 새끼가 자신의 것이 확실하므로 기꺼이 돌본다. 그러나 수컷은 자신의 정자가 암컷의 질 안으로 들어갔지만 암컷이 몰래 다른 수컷과 교미하여 임신한 아이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교미 후에 암컷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해서 대부분의 수컷은 처자를 유기하고 다른 암컷에게 달려간다. 따라서 새끼를 보살피지 않는 수컷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즙 분비 기능이 진화되었을 리 만무하다.
암컷 혼자서 새끼를 돌보는 것이 당연시되는 동물의 세계에서 두가지 형태의 예외가 있다. 첫번째는 일처다부제를 가진 조류와 일부 어류이다. 자카나, 삑삑도요, 깝작도요와 같은 바닷새의 암컷들은 여러 마리의 수컷을 거느리고 산다.
깝짝도요 암컷은 열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수컷 한마리를 몇 마일이고 추적한다. 승리한 암컷은 포획한 수컷을 감시하면서 오로지 자기하고만 교미하게 한다. 암컷보다 몸집이 작은 여러 마리의 수컷들은 함께 알을 부화하고 새끼를 기른다. 어류중에서 해마와 큰가시고기는 수컷이 알을 보호한다.
아버지가 주는 최상의 선물
두번째 예외는 자식이 한쪽 부모에 의해 양육되기 어려운 종에서 발견된다. 사람처럼 한 쪽 부모가 먹을 것을 구해오고 다른 쪽 부모가 자식을 기르지 않으면 안될 경우이다.
수컷이 새끼를 돌볼 필요가 있는 종은 포유류의 10% 정도 된다. 나머지 90%의 포유류는 암컷 혼자 새끼를 돌보고 수컷은 교미 직후 다른 암컷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수컷이 새끼에게 줄 음식을 얻어올 필요는 물론이고 젖을 먹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자, 늑대, 긴팔원숭이, 사람 등 10%의 포유류는 자식을 돌보기 위해 유즙 분비 능력이 진화되었을 법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젖이 아버지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다면 유즙 분비 기능이 진화되었을 터이다.
사자는 새끼를 죽이려는 하이에나와 싸우고 집에 머물면서 새끼를 보호하는 일이 중요했다. 늑대는 사냥을 해서 암컷에게 고깃덩어리를 듬뿍 갖다주어 새끼에게 줄 젖을 많이 분비하도록 하는 것이 새끼를 돌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긴팔원숭이는 비단뱀이나 독수리가 새끼를 채가지 못하게 주위를 살피고 처자식의 주식인 열매를 동료가 따먹지 못하게 하는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
사람은 남편이 수렵을 해서 먹거리를 구해오지 못하면 처자식이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요컨대 수컷이 젖을 새끼에게 먹이는 일이 반드시 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태여 유즙 분비 기능이 진화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인간의 성을 진화론의 측면에서 분석한 저서인 '왜 섹스는 재미있는가'에서 남자가 젖을 분비하지 못하는 걸림돌은 더이상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언젠가는 젖을 분비하는 남자가 여자 대신에 아이를 양육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익살스런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