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미국의 뉴욕, 디트로이트 등 동북부·중서부 지역과 캐나다의 토론토, 오타와 등 남부 지역에서 한꺼번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최악의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정전이 되자 모든 회사가 일을 중단하면서 한꺼번에 몰려나온 인파로 도시 전체는 아수라장이 됐다.
지하철과 통근열차의 운행이 중단됐고, 신호등이나 터널의 전등이 가동되지 않으면서 극심한 교통 혼잡을 빚었다. 일부 시민은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에 한동안 갇혀 공포에 떨기도 했다.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으면서 때마침 극성을 부리던 무더위에 쓰러진 사람들도 속출했다. 이번 정전사태로 인해 미국과 캐나다의 5천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이번에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의 원인을 낙후된 전력공급시설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하이오와 클리블랜드주의 3개 송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확산됐다는 것이다. 지난 8월 17일 스펜서 에이브러햄 미 에너지 장관은 “낡은 전력공급망을 개선하기 위한 에너지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전력공급망 개선은 물론 더욱 많은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생한 최악의 정전사태는 전기가 없을 경우 우리 사회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는지를 직접 보여준다. 아울러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공급망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핏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산업현장이나 가정에서 사용하기까지 사용되는 모든 도구가 바로 중전기기(重電機器)다.
극한 조건에서도 정확히 작동해야
중전기기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전기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전기라 하면 전하가 연속적으로 흐르면서 만들어지는 전기에너지를 가리킨다.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인 전기는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우선 전류는 도선 내의 전하의 흐름을 가리키는데, 암페어(A) 단위를 사용한다. 전압은 전류가 흐르는 두 지점 사이의 상대적인 에너지 차로, 볼트(V) 단위를 사용한다. 전압과 전류의 곱으로 구하는 전력은 전기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와트(W) 단위를 사용한다.
가정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전기에너지는 발전소에 있는 발전기에서 엄청난 규모의 전력으로 만들어진다. 전력의 양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기준은 없으나 통상적으로 1백kW 이상을 대전력이라 한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실제 소비하는 대도시는 먼 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전력을 수송해야 한다.
전기를 수백km에 달하는 거리를 수송하는 일은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바로 저항 때문이다. 저항은 어떤 선로가 갖고 있는 고유수치로 전류가 흐르기 어려운 정도를 나타낸다. 저항 때문에 전력을 수송하면 전류의 흐름이 방해를 받아 큰 손실이 발생한다. 하지만 동일한 전력(전압 전류)이라고 했을 때 전압을 높이면 전류는 역으로 줄어든다.
결국 같은 선로를 사용했을 때 전류의 흐름이 줄면 전력의 손실이 크게 준다(사실 WL=I2R(WL은 손실 전력, I는 전류, R은 저항)이기 때문에 손실 전력은 전류의 제곱에 비례해 줄어든다). 전력을 수송할 때 전압을 한층 높이는 까닭이다. 국제규격에서는 1kV 이상을 고전압(High Voltage), 1백kV 이상을 초고전압(Extra High Voltage), 5백kV 이상을 극초고전압(Ultra High Voltage)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높은 전압의 전기는 손실은 줄지만 수송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도처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고전압의 전기가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전극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전자를 미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전자는 전극으로만 흐르지 않고, 주위물질로까지 이동한다. 결국 전극을 둘러싼 절연물질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면서 전기가 주변으로 흐르게 된다.
중전기기 내부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기기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폭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수송중이던 모든 전력이 대지로 흘러버리고 전력망 전체가 망가진다. 마치 수도관에 아주 높은 수압의 물을 흘러보내면 수도관이 터지는 것과 유사한 경우다.
또한 대전력을 수송할 때 선로로 사용하는 금속도체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규정된 양 이상의 전류가 금속도체로 흐르면, 점점 가열돼 냉각물질로 냉각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도체가 녹아내려 선로가 끊어지고, 심하면 중전기기가 화재로 폭발한다. 결국 모든 전력이 대지로 흘러버려 전력을 수송할 수 없게 된다.
중전기기는 기본적으로 대전압에서도 절연이 되며 견뎌야 하고, 대전력을 무리 없이 수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극한 사용조건에서도 확실하게 정해진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접촉해도 안전해야 하고, 사고로 위험한 부분을 접촉하는 경우에도 인명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중량이 가볍고 작고 보기에도 아름다우면 더욱 좋을 것이다.
번개의 공격도 방어한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에너지가 가정이나 산업현장에서 사용되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중전기기가 사용된다. 전기를 만들어(발전) 보내고(송전) 전압을 바꾸며(변전), 전기를 나누고(배전과 분전) 전기를 받는(수전) 등 다양한 중전기기가 필요하다. 중전기기나 사용자를 보호하는 보호설비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발전소에서는 피뢰기라는 중전기기가 사용된다. 피뢰기는 번개처럼 짧은 시간 동안 높은 전압이 발생해 큰 피해를 야기하는 번개 서지(Surge, 전압·전류의 동요)로부터 값비싼 발전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번개가 발전소나 송전망에 떨어지면 큰 서지는 선로를 통해 발전기 쪽으로 침입한다. 이때 피뢰기 내부에 있는 산화아연(ZnO) 소자가 번개를 열 형태로 변환해 흡수하고 일부는 대지로 방출시켜 보호한다.
전력 수송을 위해서 전압을 높일 때는 변압기가 사용된다. 변압기는 양쪽에 코일이 감겨있는 철심으로 구성된 자기회로로, 철심의 한쪽에 다른쪽보다 더많은 코일이 감겨있다. 결국 자기장 성질에 의해 코일이 많이 감겨있는 쪽은 적게 감겨있는 쪽보다 전류는 줄지만 전압이 높게 유도된다. 만약 코일을 반대로 감으면 낮은 전압의 전기를 만들 수 있다.
전압을 낮추는 변압기는 우리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중전기기다. 주상변압기는 전주 위에 달려있는 원통 형태의 기기로 가정에 알맞은 전압의 전기를 만드는 일을 한다. 아파트단지나 도로변에서 볼 수 있는 캐비닛 모양의 전기설비는 수전변압기로 주상변압기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용량이 더 크다. 이 외에도 합선과 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큰 전류가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차단기 등 다양한 중전기기가 있다.
고품질 전기가 필요해진 까닭
전기에 의해 가동되는 모든 기계나 장치는 중전기기에 고장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바로 멈춘다. 중전기기를 통하지 않으면 전기를 생산해도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용한다 하더라도 인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처럼 재산과 인명에 손실을 일으키고, 심지어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중전기기의 품질성능과 신뢰성은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중전기기 연구개발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정전시간의 경우 1990년 가구당 2백95분에서 1997년에는 24분으로 줄었고 앞으로도 계속 줄 예정이지만 선진국에 비해 긴 형편이다. 특히 예고치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정전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나라 주력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조선, 전기전자 등이 예고치 않은 정전으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 1997년 1천억원 이상이고, 2010년에는 3천억원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체에 예고된 정전이라면 비상 전력을 가동하거나, 최소한 공정을 중단해 제품생산이 줄어드는 정도의 피해에 그친다. 그러나 예고치 않은 정전은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가 크다. 예를 들어 포항제철에 갑자기 정전이 발생하면 용광로가 식어버릴 수 있다. 일단 용광로가 식으면 곳곳에 굳어버린 철 때문에 재가동하는데 1주일이나 걸린다. 정밀한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에 정전이 갑자기 발생하면 생산라인에서 제조중이던 모든 반도체를 버려야 한다.
더욱이 첨단산업이 발전하면서 좋은 품질의 전기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좋은 품질의 전기란 전압, 전류, 주파수와 같은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일정한 값으로 유지되는 전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교류전기는 60Hz라는 주파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전력망이 불안정하면 주파수가 일정한 값을 갖지 못하고 58-62Hz대로 들쭉날쭉하게 변동할 수 있다.
실제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전력사정이 나빠 이런 현상이 일어난 지역이 많았다. 이런 전력으로는 형광등이 깜빡거려서 백열전등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현재 대부분의 가정에 보급돼 있는 컴퓨터 사용은 아예 불가능하다.
최근 발전하는 첨단 정밀산업 공장에서는 기계가 정밀하게 제어돼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품질의 전기를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반도체에 정밀한 회로를 새기는 식각 장비는 전기 품질이 조금만 떨어져도, 즉 전기 구성요소에 아주 작은 변동이 있어도 안된다. 전기 품질은 반도체의 실패율과 직결된다는 얘기다.
성능은 기본, 신뢰성도 중요해
다른 산업제품은 품질의 차이로 인해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지만, 중전기기 제품은 성능과 신뢰성 검증에 성공해야만 제품으로써 인정받는다. 중전기기 제품이 국내 규격은 물론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이 정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성능과 신뢰성을 필수적으로 검증을 받은 후에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중전기기 연구개발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능과 신뢰성을 평가할 시험설비부터 갖춰야 한다.
중전기기 성능과 신뢰성을 평가하고 시험하는 설비는 중전기기가 전력망에 사용돼 사고 또는 고장이 일어나는 조건과 동일하게 모의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전압과 많은 전류를 필요로 하고, 이로 인해 시험설비가 대형이면서도 정교하고 가격도 상당하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전력망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중전기기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중전기기 개발을 주도했다. 전력망이 확대됨에 따라 필요한 신제품을 먼저 개발해 세계시장에 공급했으며, 현재도 여전히 세계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네덜란드 KEMA, 이탈리아 CESI, 독일 Phela, 영국 ASTA, 프랑스 ESEF, 스웨덴 SATS, 일본 CRIEPI 등은 고전압과 대전력 연구·시험설비를 보유한 국제적인 시험인증기관이다. ABB, 지멘스, 알스톰, 쉬나이더, GE 등 세계 굴지의 중전기기 제작사들은 이런 시험설비를 이용해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전기기 연구개발을 위해 중전기기 성능과 신뢰성을 평가할 시험설비 구축이 가장 큰 과제로 부상한 까닭이다.
2천3백년 간 잠들어있던 전기
기원전 55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는 현대 문명의 밑바탕이 될 중요한 현상이 발견됐다. 장식품으로 사용되는 보석인 호박(琥珀)을 천 조각에 문지르면 가벼운 종이나 깃털 등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전기 현상 최초의 발견으로, 마찰전기 때문이다. 당시 철학자 탈레스는 이런 현상에 호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론’(elektron)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전기를 구성하는 전자(electron)의 어원이다.
인류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전기는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 발견된지 무려 2천3백여년이 흐른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와트의 증기기관 이후 다양한 기계들이 발명됐다. 동시에 쿨롱, 암페어, 옴, 페러데이, 맥스웰 등 여러 과학자의 노력에 의해 전자기의 원리가 급속도로 밝혀졌다. 전기가 기계의 동력원으로 사용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19세기 무렵 선보인 모스의 전신기, 벨의 전화기, 에디슨의 백열전구와 축음기 등은 모두 전기의 특성을 바탕으로 발명됐다. 1831년 패러데이가 발전의 원리를 발견한 후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석을 이용해 발전기의 발명에 몰두했다. 결국 1866년 독일의 지멘스가 전자석을 이용하는 발전기를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오늘날 사용하는 대용량 발전기의 시대가 펼쳐진다.
전기 생산에서 사용까지 핵심 담당하는 중전기기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거미줄망처럼 깔려있는 전력망을 통해 각 가정에 배달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중전기기가 사용된다. 발전기에서 만들어지는 전력은 10-20kV로 손실을 줄여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승압변압기로 전압을 수십배 높인다. 발전소에는 이외에 번개로부터 발전설비를 보호하는 피뢰기, 사고전류를 흐르지 못하게 하는 가스절연개폐장치(GIS) 등 차단기도 사용된다.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곳으로 장거리 수송할 때는 7백65kV 전압으로 보낸다. 이렇게 높은 전압은 변전소를 거치면서 강압변압기에 의해 3백45kV와 1백54kV로 낮아진다. 각 지역의 전력망에 맞도록 전압이 조정되는 것이다. 전력을 수송할 때는 전력선과 송전철탑, 그리고 애자 등이 필요하다. 여기서 애자는 전력선과 철탑 사이를 절연하는 원통 모양의 장비로, 절연력을 크게 하기 위해 표면은 주름으로 돼 있다.
전력이 대도시에 도달하면 배전용 변전소에서 22.9kV의 낮은 전압으로 변환된다. 배전용 변전소를 거친 전력은 배전선을 통해 중대형 공장이나 길거리의 수전변압기나 주상변압기에 공급된다. 이 과정에는 선로를 나눠 사고 범위를 줄이는 부하개폐기, 순간적 접촉으로 인한 정전을 예방하는 재폐로 차단기 등 중전기기가 여럿 사용된다. 수전변압기 또는 주상변압기는 가정에서 전력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압을 2백20V로 변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