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과학자들은 다양한 생물의 게놈정보를 이용해 인간의 질환 원인유전자를 발견하고 그 메커니즘을 규명해 신약이나 치료제를 개발했다. 이 중 최근에 주목받는 동물은 침팬지다. 침팬지게놈은 인간과 거의 동일하며, 그 다양성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보다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에이즈나 알츠하이머, 말라리아 같이 침팬지와 인간에게서 감수성의 차이를 보이는 질병 연구에는 침팬지게놈이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다.
왜 사람만 에이즈에 시달리는가
인간과 침팬지는 약 1백40가지의 질환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침팬지는 생리·해부학적 차이점에 의해 질환별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에이즈와 치매, 말라리아다.
이 세 질병은 모두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침팬지에서는 발병하지 않는다. 먼저 에이즈를 살펴보자.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는 1980년대 초 처음 알려진 질병으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라는 레트로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나는 병이다. AIDS를 유발하는 HIV에는 HIV-1과 HIV-2의 두 종류가 있다. HIV-1은 침팬지에 의해서, HIV-2는 아프리카의 긴꼬리원숭이인 맹거베이원숭이(Cercocebus atys)로부터 감염됐다. HIV-1은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바이러스이고, HIV-2는 특히 서아프리카에 집중돼 나타나고 있다.
이런 HIV에 대해 인간과 침팬지는 매우 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다. 침팬지는 HIV-1에 감염돼도 사람과 달리 굉장히 드물게 AIDS로 발병한다. 유전적으로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가 AIDS에 대해 사람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차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HIV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HIV 유사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바로 ‘유인원면역결핍바이러스’(SIV)다. 현재까지 많은 종류의 SIV가 규명됐으나 이 중 침팬지와 관련있는 것은 ‘SIVcpz’이다.
HIV-1과 SIVcpz는 어떤 유사점을 갖고 있을까. 이들 바이러스는 다양한 유전자를 공유하는데, 과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vpu라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는 바이러스 전체 게놈의 복제방법을 주관하고 심지어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바이러스를 복제한다. 즉 바이러스가 다른 숙주에서 적응해 생존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복제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에이즈가 전염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유전자도 vpu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침팬지게놈 연구를 통해 이 유전자의 실체가 파악되면 SIV가 어떻게 HIV로 바뀌었는지, 그리고 왜 침팬지는 HIV에 대해 내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사람과 침팬지는 에이즈에 감염됐을 때 나타나는 세포의 변화 양상도 다르다. 사람의 경우 특정 면역세포가 현저히 높은 비율로 증가하는 반면, 침팬지는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침팬지게놈 연구를 통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치매 없는 침팬지
침팬지는 인간과 달리 알츠하이머성 치매(Alzheimer's disease)에 걸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고 있으나, 해결의 단서는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유전적 변이에 의해 발병하는 ‘가족성 알츠하이머병’과 그 원인이 아직 파악되지 않은 ‘산발성 알츠하이머병’으로 나뉘어진다. 가족성 알츠하이머의 원인은 사람의 14번과 21번, 1번 염색체에 위치한 유전자(각각 PS1과 APP, PS2)의 이상이다. 이 세가지 유전자 중 한가지만이라도 돌연변이가 생길 경우에 예외없이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알츠하이머 환자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산발성치매는 그 정확한 원인이 규명돼 있지 않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19번과 12번 염색체에 위치한 유전자(각각 ApoE와 a2M)가 관련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공통점은 노인반점(senile plaques)이다. 이 반점은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축적되면서 생긴다. 하지만 침팬지는 이 단백질이 축적되지 않고 따라서 치매도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그 원인이 치매를 유발하는 유전자 차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알츠하이머병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많이 나타나므로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침팬지는 이 병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치매현상은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한 인간의식의 고유산물이라는 일부 정신의학자들의 의견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침팬지의 수명이 40년 안팎이므로 베타아밀로이드가 치매의 특징을 나타낼만큼 축적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역시 분자수준에서 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인간 염색체에 해당하는 침팬지 염색체의 해독이 끝나면 알츠하이머병의 정확한 원인은 물론 예방책까지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말라리아와 간염의 공통 통로
알츠하이머와 마찬가지로 침팬지는 말라리아에서도 자유롭다. 왜 침팬지와 달리 사람은 말라리아에 내성이 없을까.
말라리아는 예상외로 큰 피해를 입히는 질병이다. 온대기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으나 열대기후의 아프리카 사람에게는 에이즈보다 무서운 병이 말라리아다. 전 세계의 40%에 해당하는 90여개국 이상이 말라리아로 고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그에 속해있다. 매년 3억-5억명 이상의 사람이 감염되고, 이 중 3백만명 정도가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기적인 고열과 함께 특이한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말라리아는 말라리아 원충을 갖고 있는 모기에 물렸을 때 발병한다. 원충에 감염된 모기는 자신의 타액 속에 말라리아 원충을 갖고 있는데,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 때 원충이 사람의 혈액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감염된다. 원충은 혈류를 타고 30분 이내에 간으로 침입해 간세포 내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간세포 내로 침입하는지와 그 증식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다.
하지만 올해 초 프랑스의 마지에르 박사는 말라리아 원충이 간세포로 침입할 때 간세포 표면에 나타나는 특이한 수용체를 발견했다. ‘CD81’로 명명된 이 수용체를 통해 말라리아 원충이 간세포로 침입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수용체가 간염바이러스의 수용체로도 작용한다는 점이다.
침팬지는 말라리아뿐 아니라 간염바이러스에도 내성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침팬지에는 CD81 수용체의 유전자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침팬지게놈 분석을 통해 인간과 침팬지의 CD81 유전자를 비교·연구하면 이 두 질병에 대한 감수성이 왜 차이가 나는지를 분자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말라리아와 간염의 치료제 개발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사람의 질병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실험대상은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대신 침팬지를 이용한 의학실험은 인간과 거의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갖으리라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