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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신원 밝히는 결정적 단서 DNA

전화수화기에 묻은 타액에서도 발견돼

덜렁이 고등학생 김전일은 공부도 잘 못하고 운동에도 소질이 없다. 하지만 소문난 명탐정 긴다이치 코우스케의 손자답게 추리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전일과 그의 여자친구 미유끼는 매번 우연한 기회에 살인사건에 휘말리는데, 김전일이 그 사건을 해결한다. 김전일이 겪는 살인사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항상 외딴 섬이나 산장처럼 아무도 출입한 흔적이 없는 밀실에서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원제 : 김전일 소년의 사건구락부)은 1992년부터 가나리 요자부로와 사토 후미야가 공동으로 일본의 만화주간지 ‘주간소년 매거진’에 연재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추리만화의 고전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매력은 사토 후미야의 만화보다 가나리 요자부로의 원작에 있다. 수십명의 스토리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매 에피소드마다 탄탄한 구성과 뒤통수를 치는 사건해결 과정을 보여준다. 전체 구성 자체는 고전적인 추리물의 신파적인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밀실에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탐정 김전일은 범인을 찾기 위해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놀라운 관찰력과 특유의 추리력으로 범인이 남긴 단서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한때 그들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과거사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마침내 범인이 밝혀지는데, 범인은 하나같이 피해자들에게 사무친 원한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복수를 위해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퍼즐 맞추기 vs 유전자 검사


DNA는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수천년 동안 남아있 을 수 있다. 때로 미라에서도 DNA가 채취되는 이유다. 사진은 람세스 1세로 추정되는 미라.


총 39권으로 완결된 ‘소년탐정 김전일’의 에피소드 중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미이라의 저주’편 역시 이런 고전 추리소설의 규칙을 잘 따르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여학생 와까바는 교사 오다리기 선생과 추문이 일어 퇴학을 당하자 친구인 김전일이 도와준다.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졸업한 와까바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는데, 김전일과 여자친구 미유끼는 와까바의 고향에서 있을 결혼식에 초대된다.

별 모양으로 생겨 육각촌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교회와 여섯개 모서리에 위치한 집에 모두 7구의 미라가 안치돼 있다. 27년 전 교회에서 불이 나 목사부부와 일곱 자식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7구의 어린이 시체를 관 속에 넣어 지하실에 보관하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미라로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섯개 모서리에 위치한 집에 있는 미라는 신체의 일부가 하나씩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한 집에는 ‘머리가 없는 미라’가 안치돼 있고, 다른 집에는 ‘오른쪽 다리가 없는 미라’가 안치돼 있는 식이다.

이 마을 관습에는 결혼식 전날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지금까지의 죄를 참회하도록 돼 있는데, 와까바 역시 결혼식 전날 교회에서 밤을 보내다가 ‘목 없는 미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해된다. 그리고 미라를 보관하고 있던 집들의 주인도 차례로 살해당한다. 그것도 자신의 집 지하실에 있는 미라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자 앞으로 이 만화를 읽을 사람들은 이번 문단을 건너뛰시라. 이제부터 이 사건의 전모를 폭로할 테니까. 김전일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마을에 안치된 7구의 미라가 사실은 6명의 시체였다는 사실에서 얻는다. 27년 전 교회에서 일어났던 방화사건에서 일곱 자식이 모두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자식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6구의 시체에서 신체의 일부를 잘라 하나의 미라를 더 만든 후, 죽은 것으로 위장해 탈출한 뒤 자신의 아들을 통해 불을 지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이 엽기적인 사건에 소년탐정이 아니라 진짜 FBI요원이 투입됐다면, 그는 김전일처럼 인형 7개의 사지를 절단해가면서 범행을 해결하기 위한 퍼즐에 골몰하기 전, 관속에 있는 미라들의 뼈에서 DNA를 채취해 신원조회부터 들어갔을 것이다. 조회 결과가 나오려면 며칠은 걸리겠지만, 실제로 7개의 미라들이 6구의 시체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뿐 아니라 불에 타 사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상 정보도 얻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이득일 것이다.

협박편지에 묻은 범인의 흔적


증거물에서 혈액을 채취하는 모습. DNA는 혈액뿐 아니라 타액, 땀, 정액, 오줌, 눈물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DNA분석기술’은 현재 강력범죄나 대형 재해사건에서 피해자와 범인의 신원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DNA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의 핵에 존재하기 때문에 혈액이나 정액 등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강물에 떠다니는 갈대처럼 세포들은 체액에 떠있기 때문에 DNA는 타액이나 땀, 정액, 오줌, 눈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폭행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머리카락 모근의 모낭에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심지어 전화수화기에 묻은 타액 세포에서도 발견된다.

사건 현장에서 쉽게 발견된다는 점 외에도 DNA 분석의 장점은 사체에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햇빛 같은 방사선에 노출되면 구조가 파괴될 수 있지만, 적절한 환경만 조성된다면 수천년 동안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고생물학자들은 이집트 미라에 붙어있는 벌레 속에서도 DNA를 채취한 바 있으며, 수백년이 지난 아메리카 인디언 시체의 모근에서도 DNA를 추출한 적이 있다.

아주 작은 피 한방울에서도 DNA를 추출해 신원을 밝히는 일이 가능해진 것은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라 불리는 기술 덕분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DNA 사슬 가운데 일부분을 확대시키거나 대량 복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협박편지의 우표 뒷면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타액으로도 생물학적 복사기라 할 수 있는 중합효소 연쇄반응을 이용해 DNA를 대량 복제한 후 특성을 분석할 수 있다.

실제로 1993년 2월 26일 지금은 무너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지하차고에서 일어난 폭발사고의 범인을 협박편지에 묻은 타액으로 검거하기도 했다. 지하 주차장 5개층이 박살나고 농구코트만큼이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을 정도로 큰 폭발사고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 뉴욕타임스 신문사에 협박편지 한통이 배달됐다. 그 폭발사고는 자신들의 소행이며, 앞으로 더 많은 폭발사건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FBI의 DNA 분석부서에서는 편지봉투를 붙일 때 사용된 타액을 이용해 DNA 분석에 들어갔다(미국의 편지봉투 끝에는 우리나라의 우표처럼 침을 바르면 접착력이 생기는 접착제가 발라져 있다). 나중에 니달 아이아드와 마머드 아부할리마라 등 4명의 용의자가 잡혔을 때, FBI는 DNA 서열을 비교해 그들이 범인임을 단번에 밝혀냈다. 그들은 결국 ‘2백40년 유기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협박편지 속에 자신의 신원을 알리는 증거를 담아 배달한 것이다.

러시아 마지막 황녀의 미스터리


DNA 샘플과 DNA 분석장치의 모습. 협박편지에 묻은 타 액에서 DNA를 뽑아낸 후 DNA 서열을 분석해 범인을 잡 기도 했다.


1995년엔 ‘소년 탐정 김전일’의 ‘미이라의 저주’ 에피소드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러시아 로마노프왕가의 유해를 둘러싸고 벌어지기도 했다. 모스크바 당국의 보고에 따르면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1917년 러시아 황제와 가족은 레닌의 지령에 의해 숙청됐다고 한다. 총살대에서 황제, 황후, 다섯 자녀, 세명의 하인, 가족 주치의 등 11명이 처형됐다고 기록돼 있다. 1995년 옐친의 지시 하에 무덤 발굴 조사가 시작됐고 극적으로 7백개의 뼈조각이 발견됐다. 이를 취합한 결과 9구의 유해가 확인됐다. 왜 11구가 아니라 9구의 시체만 발견됐을까. 공식 보고서에는 시체 2구의 경우 불에 태우려 했으나 완전히 소각하는 일이 여의치 않아 매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유해 수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선 황녀 아나스타샤가 기적적으로 총살형을 모면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골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러시아 정교회측은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어줄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황제 가족의 성대한 장례식은 러시아 국민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며 공산주의 이후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위상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러시아 정교회는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에 있는 미해군병리학 연구소에 무덤에서 발견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막내동생 게오르기 대공의 넓적다리뼈와 정강이뼈 조각을 보냈다. 그리고 일본의 한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니콜라스 2세의 피가 묻어있다는 손수건과 수십년 동안 페테스부르크 궁전에 보관돼 있던 니콜라스 2세의 머리카락을 함께 첨부했다. 만약 게오르기 대공의 유골에서 얻은 DNA와 니콜라스 2세의 DNA가 일치한다면 그 뼈가 진품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힘겹게 황제의 직계 친족들을 찾아 DNA 서열을 비교한 결과 무덤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황제와 그 가족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게오르기 대공의 유골이 니콜라스의 DNA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유해 안에서 아나스타샤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안나 앤더슨이라는 여성이 1984년 버지니아주의 양로원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황제의 마지막 딸로 태어나 가족이 몰살될 때 기적적으로 총알을 피해 살아났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미 죽었지만, 과학자들은 그녀의 DNA를 검사해보기로 했다. 안나 앤더슨은 1979년 외과수술을 받았는데, 그때 그녀의 내장 일부가 버지니아 병원의 병리학 연구실에 보관돼 있었다. 이 샘플을 이용해 DNA를 분석한 결과, 허탈하게도 그녀는 황제의 딸이 아니라 폴란드 노동자 집안의 딸임이 밝혀졌다.

강간범 꼼짝 못하게 하는 법

영국 레스터 지방 근처에서 어린 소녀를 잔인하게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2건이나 벌어졌다. 현장에서 발견된 정액 샘플을 분석한 결과 두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영국 경찰국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마을 남성 3천6백여명의 DNA 샘플을 모두 조사한 결과 범인의 DNA와 정확히 일치하는 샘플을 발견해 범인을 검거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과 유럽 경찰은 DNA 검사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미국에서만 2만여건의 살인사건과 9만여건의 강간사건(신고되지 않은 사건도 9만여건일 것으로 추정된다)이 발생한다. 이들 사건 중 범인을 검거한 경우는 겨우 수%에 불과하다(강간사건의 경우 1.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DNA 분석을 실시한 이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강간범죄의 경우 정액을 채취하면 용의자의 범행 여부를 쉽게 가려낼 수 있기 때문에 범인검거율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미국 치안당국은 살인이나 강간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혈액을 채취해 DNA 샘플을 보관하는 ‘DNA은행’을 설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특히 범죄발생률을 보면 살인이나 강간의 경우 같은 사람이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재의 유전자, 광인의 유전자’의 저자인 미국 터프츠대 법의학과 조교수 필립 레일리 박사에 따르면, 1993년에 석방된 강력범 범죄자 중 62%가 보석으로 풀려난 후 3년 안에 같은 범죄로 다시 체포됐다고 한다. 따라서 국가가 DNA은행에서 전과자의 DNA를 보관하면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DNA와 비교해 범인을 빠르게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DNA은행으로 인해 개인의 생물학적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진행중이나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여튼 DNA 분석의 등장은 논리적인 추리나 용의자의 자백에 의존해 범인을 검거하던 시대의 막을 내리고 객관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 과학수사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했다. 앞으로 컴퓨터 속도가 더욱 빨라지면 경찰은 휴대용 PCR 기계를 들고 다니면서 사건현장에서 발견되는 체액의 분석 결과를 DNA은행의 데이터베이스에 전송해 대조함으로써 곧바로 용의자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0년 후쯤엔 ‘유전자탐정 김전일’이 만화로 등장하지 않을까.

2003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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