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길이가 고작 5mm밖에 안되는 톡토기를 연구하면서 점점 확장돼온 생물학 지식을 통해 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어렴풋하게 알게 됐습니다. 만약 생물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깨달음도 없이 무지몽매한 인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전북대 생물과학부 이병훈 명예교수는 생물학과 그의 삶을 이렇게 압축해 말했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톡토기는 흙 속 어디서나 발견되는, 몸길이가 1-5mm 정도로 작은 곤충이다. 날개가 없지만 잘 튄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병훈 교수(67)는 바로 이 미물을 2001년 8월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35년 간 연구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1백86종의 한반도 톡토기 중 77종과 외국산 11종, 그밖에 낫발이 곤충 2종 그리고 좀 2종 등 합쳐서 92종은 그가 세계에서 처음 발견해낸 신종들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수준의 계통분류학자인 것이다.
이와 함께 이병훈 교수는 진화생물학자이기도 하다. 자신이 발견한 톡토기들이 생태계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조사하다보면 이들 간의 연관 관계가 궁금해지게 마련이라고 한다. 이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톡토기의 진화과정과 연결된다. 즉 계통분류와 진화추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생물학의 다양한 갈래길 중에서 분류·계통·진화를 걸었다는 말이다. 그는 1955년 한국전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 서울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야말로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국내 분류학계의 선두주자가 됐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추진운동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10여년 간 각종 신문, 잡지를 통해 우리나라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펴왔다. 생물학자가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운동을 벌인다는 게 한편으로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병훈 교수가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 궁금증을 풀어보자.
“교수님은 어떤 연유에서 계통분류학을 선택하시게 됐습니까?”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동물생리학을 했어요. 그런데 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지도교수님이 해외로 나가실 일이 생겨버린 거예요. 이 바람에 혼자 연구를 해야 했어요. 모든 것이 미비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비싼 장비와 시약 없이 실험하려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병훈 교수는 이 일로 공부를 접지 않았다. 석사를 마친 후 생각을 달리해야겠다고 맘을 먹는다. 이때 선택한 것이 바로 계통분류학이다.
그가 이 분야로 길을 돌린 이유는 동물생리학처럼 돈 많이 드는 실험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자신만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데 있다.
당시 동물생리학은 서양에서 이미 해놓은 성과를 답습하기도 힘든 정도였다. 하지만 계통분류학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신만의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분야다. 우리나라에만 나는 고유종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찾아내기만 하면 이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이병훈 교수는 1966년 가을 곤충분류학 실험실이 있는 고려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런데 여러 생물 중에서 왜 톡토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으셨는지요?”
“지도교수님이신 김창환 선생님이 흙 속에 사는 종류를 연구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렁이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울 곳도 방법도 너무나 막연하더군요. 그때 마침 일본 학자들이 우리나라 동굴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여러 희귀종을 잡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당시는 이병훈 교수가 국립과학관의 연구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 일로 과학관에서도 동굴조사단을 구성했는데, 그도 조사단의 일원으로 강원도의 동굴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톡토기가 동굴 어디에서나 많이 보였다고 한다.
이병훈 교수는 동굴 속 톡토기들이 이곳에서 적응하면서 눈이 없어지고 몸이 투명해진 대신 몸털이 길게 발달한 데에 주목했다. 이것은 흙이나 나뭇잎 등에서 주로 사는 톡토기와는 사뭇 다른 특징이다. 그는 톡토기를 공부함으로써 환경변화에 따라 진화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톡토기는 토양 속 동물을 연구해보라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에도 부합하는 연구대상이기도 했다.
“이후 톡토기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진행이 됐습니까? 지렁이보다는 톡토기가 좀더 쉬운 대상이었나요?”
“지렁이 못지 않게 막연하기는 매한가지였어요. 국내에는 톡토기 전문가가 없었어요. 더군다나 톡토기 몸체가 작으니까 오히려 까다롭기는 더했죠. 사실 톡토기가 생계수단이 될지 어떨지에 대한 어떤 확신과 믿음도 없이 막연하게 시작했지요. 나의 톡토기 연구는 반신반의의 혼미 속에서 시작된 모험이라고 할까요.”
분류학을 하려면 먼저 문헌이 확보돼야 한다. 그래야 이미 알려진 종이 무엇인지 알고 신종을 발견할 수 있다. 이병훈 교수는 우선 톡토기에 대한 문헌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더러 입수되는 문헌에서 톡토기를 관찰하는 방법이 나왔다. 그러나 책에 적힌 대로 톡토기 표본을 만들어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보아도 책에서 말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도통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분류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이병훈 교수는 표본이라도 모아야겠다 싶어 수년간 채집만의 방황을 계속했다.
이 와중에 이병훈 교수는 1968년 어느날 문헌을 요청했던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는다. 방황의 끝이 보이는 조짐이었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 온 편지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어요. 편지를 보낸 박물관 산하 생태학 연구소의 들라마르 소장은 그곳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들러보라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어요. 초심자인 제게 이런 편지가 왔다는데 무척 어리둥절했지요.”
이병훈 교수는 그리도 바라던 톡토기 전문가가 있는 프랑스로 당장 가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국립과학관이 파견하는 하와이 동서센터의 박물관요원 훈련을 1년 간 받기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8년 9월 이병훈 교수는 32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주중의 반은 하와이대 생물학 대학원 과정을 청강했고, 반은 호놀루루의 자연사박물관에서 박물관 전문 교육을 받았다. 하와이대에서 그는 분류학과 곤충학에 대한 기초를 쌓았다. 당시 미 대학원 교육을 경험한 것이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 기회가 없었다면 이 분야에 대해 학생을 가르치지도 연구논문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후 1972년 9월에서야 그는 몇년 간 채집한 톡토기 표본을 갖고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생활은 어땠습니까? 불어에 대한 부담은 없으셨나요?”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저에겐 딱 들어맞았어요. 대학다닐 때는 재미로 불어를 공부했거든요. 생물학은 중학교 때부터 좋아하긴 했지만 대학에서는 건성으로 했거든요. 대신 고등학교 때부터 어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불어는 대학에서 30학점 이상 정식으로 수강했어요. 이때 배운 불어가 계속 삶의 뒷받침이 되고 연결고리가 돼주었죠.”
이병훈 교수는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생태학 연구소에서 문헌 걱정도 없이 톡토기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차츰 톡토기 신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마다 연구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흥분되는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떤 때는 신종이 연달아 나와 하루에 1종씩 기재하는 일도 있었다.
이병훈 교수는 프랑스에 머문 1년 9개월 간 24종의 톡토기 신종을 찾아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75년 전북대 사범대 생물교육과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그의 계통분류 연구는 외형을 기반한 연구에서 점점 DNA 영역까지 확대해나갔다. 후배 교수는 이를 두고 “톡토기로 톡톡히 연구 재미를 본다”고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교수님은 과학관이나 자연사박물관과 인연이 많으신대요. 이런 점들이 교수님의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인가요?”
“제 인생은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 생화학자 자크 모노의 책제목처럼 ‘우연과 필연’으로 엮어졌다고 봅니다. 계통분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국립과학관에서 첫 직장을 잡았던 것이나 미국에서의 박물관 연수 그리고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모두 우연의 연속이었어요. 불어를 공부한 것도 그렇죠. 그러나 이들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필연적인 고리를 갖는 것처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어요.”
사실 과학관이나 자연사박물관이 그의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박물관 설립 운동은 그가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이후의 일이다.
생물다양성의 개념은 1992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생물다양성협약이 이뤄진 이후에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병훈 교수는 그보다 앞선 1986년 미 워싱턴에서 열린 생물다양성 토론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돼 생물다양성의 중요성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귀국 즉시 이 내용을 보고하고 우리나라가 어떤 대비를 세울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생물다양성과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토론회 참가 후 생물다양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너무 낮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생물다양성 보전과 연구가 중요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경제논리에 밀려 도저히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죠. 그때 국립자연사박물관도 없는 상황에서는 생물다양성에 대한 어떤 논의나 추진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병훈 교수는 토론회보다 훨씬 이전부터 생물다양성과 관련돼 있다. 톡토기를 분류하는 연구가 바로 생물다양성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톡토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생물이 지구상에 존재하는지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이병훈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의 5분 거리에서도 그렇게 흔하던 톡토기도 이젠 구하기 힘든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그는 생물다양성이 자연생태계를 유지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필요한 양식, 공기, 약품 등을 얻게 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연이 인간의 부양자이기 때문에 자연을 보전한다는 것은 궁핍한 입장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보다는 진화생물학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공통조상에서 나온 한 가족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바로 이 점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한다. 문제는 한가족 생물계를 정규교육을 통해서 알리기는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선진국에서는 자연사박물관이 바로 이 역할을 담당한다.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운동은 어떻게 진척돼 왔습니까?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처음에 한국동물분류학회에 추진운동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어요. 그러나 모두들 처음엔 용기를 못 내다가 그후에 계속 논의돼 마침내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그 결과 1990년 9월에 10개 학회가 함께 심포지엄을 열게 되면서 운동이 시작됐죠.”
그 이듬해에 26개 학회와 단체로 조직된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 추진위원회’는 각종 행사를 펼치며 정부에 건의를 해왔다. 그 결과 실제로 이 운동이 성과를 거둘 뻔한 적도 있다. 1995년 5월 정부는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을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3년간 투자가 이뤄져 준비작업이 진행됐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국민의 정부는 이 사업에 대해 타당성 조사를 하고 타당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국가의 자연유산에 대해 경제적 차원으로만 바라보는데 한탄한다.
이병훈 교수는 지금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지난해 대선 때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개최한 초청토론회에서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을 공표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OECD 29개국 중 국제 통계상 자연사박물관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는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우리나라가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을 이루도록 힘쓰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나라에 자연박물관 문화가 정착돼야 생물다양성을 비롯해 자연에 대한 사람과 생명존중사상이 뿌리내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