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유 레디? 쓰리, 투, 원, 지로, 스타트!”
진행자의 출발명령이 떨어지자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신발을 신은 한 소년이 뒤뚱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좀 큰 신발을 신은 소년의 해프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년이 내딛는 곳이 땅이 아니라 물이라면?
물 위를 걷는 행위는 그동안 종교계의 성인쯤이나 돼야 할 수 있는 일로, 일반인은 상상 속에서나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평범해 보이는 소년이 물 위를 버젓이 걷고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누가 빨리 물 위를 달리나
비결은 바로 과도하게 커보이는 신발이다. 넓은 표면적을 가진 신발이 소년의 몸을 물 위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부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부력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2백년경의 과학자가 밝혀낸 원리가 오늘날 ‘물 위를 걷기’라는 이색적인 행사로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11일 영국의 에든버러 ‘로열공립수영장’에서는 약 20여팀이 참가한 가운데 물 위 걷기 콘테스트가 열렸다. 영국의 과학대중지 ‘뉴사이언티스트’와 ‘에든버러 국제과학축전위원회’가 주최한 이 대회는 모두 4분야에 걸쳐 총상금 1천파운드(약 2백만원)를 놓고 경쟁한다. 각 분야별로 자세한 시상규칙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누가 오래, 더 빨리, 그리고 예쁜 신발로 물 위를 걷느냐’다. 대회는 총 40m 길이의 풀장 위를 걷는 것으로, 크게 누가 더 빨리 걷느냐를 평가하는 스피드 레이스와 누구 신발이 더 효율적인지를 평가하는 디자인 심사 부문이 있다. 해마다 참가자들은 물 위를 걷기 위해 참신한 아이디어로 다양한 장치를 개발하는데, 장치는 반드시 ‘신발’모양이어야 한다. 신발 크기는 길이 2.5m, 폭 2m를 넘어서는 안되며, 어떠한 동력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규정만 지키면 재료나 모양, 색깔 등은 참가자의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다.
올해의 수상자는 물 위 40m를 1분 10초만에 주파한 ‘제미니 돈’팀에게 돌아갔다. 올해의 기록은 전년도의 기록을 갱신한 것으로 ‘기네스세계기록’에 물위 걷기의 가장 빠른 속도로 등록됐다. 디자인 분야는 ‘사이언스 섹커’그룹이 차지했다.
가장 크고 오래된 세계의 과학축제
장치의 모양이 신발로 한정돼 있고 일정 크기 이상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해마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신발에 반영하고 있다. 올해의 최고 인기 아이디어는 신발 밑에 지그재그로 홈을 파는 것이었다. 물 위를 걷는 행위는 겨울스포츠인 ‘크로스컨트리’ 스키어가 눈 위를 걷는 것과 비슷하다. 스키를 앞으로 내밀 때 뒤로 밀리지 않도록 해 스키어가 눈 위를 전진하듯, 물 위에서도 신발을 앞으로 내민 후 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신발 밑의 지그재그 홈은 물을 뒤로 배출하는 효과를 가져와 앞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이 외에도 신발 밑에 상어지느러미 같은 수평타를 달아 평형감을 높인 팀이 있었고, 나비 날개 모양의 구조물을 달아 신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날개가 접히고 정지할 때 펴지게 만들어 신발이 뒤로 밀리는 것을 방지한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물 위 걷기 콘테스트는 ‘에든버러 국제과학축전’의 여러 행사 중 하나로 개최된 것이다. 에든버러 과학축전은 해마다 부활절(올해는 4월 20일)을 기점으로 약 10일 간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과학페스티발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전에는 세계 각국의 방송인과 과학자, 과학교사, 기자, 일반인 등 10만명 이상이 참가하고 있다.
올해는 4월 11일부터 22일까지 12일간 열렸는데, 한국에서는 주한영국문화원의 지원으로 기자를 비롯 한국과학문화재단의 전문위원인 구수정 박사와 영국문화원의 한선희 사이언스 담당자가 참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고, 오랜 전통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과학축전답게 올해도 세계 각국의 전문가와 일반인 약 15만명이 이 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 과학자에게 배우는 과학놀이
에든버러는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수도로 역사는 오래 됐지만 인구 42만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축제 기간 내내 이 도시는 과학에 대한 열기로 뜨거웠다. 이번 축전을 기획한 스코틀랜드영국문화원의 대중공연 담당자 게일은 “올해는 도심 곳곳에 마련된 행사장에서 1백여가지의 다채로운 과학축제가 벌어지며, 특히 어린이를 위한 행사를 많이 준비했다”고 말했다.
어린이를 위한 과학행사는 에든버러의 어셈블리홀에 모두 모여 있었다. 50여 부스에 마련된 과학전시장은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의 장소였다. 마침 기자가 어셈블리홀을 찾던 날이 휴일이라 엄마 아빠 손을 잡고 행사장을 찾은 어린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어셈블리홀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기구를 단순히 전시해놓은 여느 과학축제와는 달리 모든 기구를 관람자가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조작한다는 점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 과학원리를 깨치는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다양한 과학원리와 개념을 설명하는 각 부스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 참가자를 돕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에든버러 과학축제위원회 소속으로 행사 전에 자신이 맡은 코너에 대해 철저한 사전 교육을 받는다. 주로 에든버러 근교의 대학생인 이들은 과학원리와 함께 어린이 관람객의 안전에 대해 세심히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자원봉사자 중 특히 눈에 띄는 이는 할아버지 자원봉사자였다. 이들은 모두 한때 과학자로 지금은 은퇴한 뒤 손자뻘되는 어린이에게 과학원리를 친절히 일러주고 있었다. 물리학자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과학자는 “평생을 과학과 함께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어린이가 과학원리에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해오면 마치 손자를 보는 것 같아 좀더 친절히 가르치게 된다”고 말한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몰린 체험행사 중 하나는 ‘공룡찾기’게임이었다. 실내에 흙과 암석이 담긴 큰 상자를 만들고 여기에 공룡뼈를 묻어놓았다. 조그만 삽과 붓을 들고 흙과 암석 사이를 조심스럽게 뒤져 공룡뼈를 찾다보면 어느새 참가자는 어엿한 지질학자와 고생물학자가 돼 있다. 이 코너에는 다양한 공룡의 뼈모습과 그들의 생태를 설명해놓은 그림자료가 많이 걸려 있다. 따라서 어린 지질학자들은 공룡뼈 찾는 놀이를 통해 한때는 지구의 주인이었던 공룡에 대해 살아있는 지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축제의 또다른 참가자 돌리 미라
이 외에도 대체에너지의 필요성과 개발 과정을 알리기 위한 태양열 궤도 자동차와 밧줄을 오르는 로봇, 세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바이오 버블’ 등이 어린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오 버블은 커다란 풍선같이 생긴 놀이공간인데, 그 안에는 세포 소기관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 있어 여기서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세포 소기관의 기능과 모습을 익힐 수 있다.
축제 기간 내내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과학실험실같았다. 에든버러 시민뿐 아니라 영국 각 지방 사람, 축제를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외국인들로 시내는 붐볐다. 각 행사장에는 어린이부터 청년, 할머니까지 각 연령층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도심 거리에 ‘에든버러 과학축제’라는 현수막 하나 붙어있지 않기에 이 같은 열기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에든버러 과학축제는 워낙 전통이 깊은 행사이기 때문에 뚜렷한 홍보가 필요없다고 스코틀랜드영국문화원의 게일은 설명한다. “이때쯤이면 축제를 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과학에 대한 관심과 과학교육열이 매우 높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사장으로 모인다”고 말한다. 과학문화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전통은 과학에 대한 역사가 짧은 우리로서는 부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과학축제에 도시의 모든 기관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한 분파인 장로교의 발상지답게 에든버러에는 많은 교회가 있다. 이들도 ‘과학과 종교’라는 강연회 등 독자적인 과학행사를 마련해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뿐 아니라 박물관, 대학, 극장, 예술가협회도 각자의 특성에 맞게 독특한 과학행사를 마련해 축제를 빛내고 있었다.
체세포 복제로 태어난 최초의 포유동물인 복제양 ‘돌리’도 이번 축제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월 14일, 태어난지 6년만에 생을 마감한 돌리는 자신을 창조해낸 에든버러 소재 로슬린 연구소에 의해 에든버러 로열박물관에 기증됐다.
로슬린 연구소 돌리 복제팀장이었던 이언 윌머트 박사는 돌리가 전시된 모습을 볼 때 자랑스러움과 함께 돌리가 생전에 폐종양을 앓다 죽은데 대한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불과 몇주 전만 해도 돌리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돌리는 생명공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뒤바꿔놓은 과학적 성과가 에든버러에서 이뤄졌음을 사람들에게 계속 상기시켜주게 될 것이고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과학적 마인드를 고취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돌리의 시신은 영구 전시를 위해 특수 보존처리를 통해 미라 형태로 만들어져 전시됐다. 돌리는 과학축제 기간 내내 로열박물관에 전시되며, 오는 7월 글래스고 남쪽 이스트 킬브라이드 소재 스코틀랜드 생활박물관으로 옮겨진 뒤 9월에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와 로열박물관에 영구전시된다.
실험실로 변한 왕립식물원
과학문화에 대한 에든버러의 저력은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하는 데에서도 느낄 수 있다. 대표적 예가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raden)이다. 대영제국 시절 세계 각국의 희귀한 식물들을 모아 만든 정원으로 한국의 창경궁 정도 규모에 지구의 거의 모든 식물종을 모아 놓고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과학축제는 한창이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이들이 관람객을 대상으로 식물의 이름과 종류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신 대부분의 과학행사는 ‘환경보존’쪽으로 맞춰져 있었다. 자라나는 미래의 주인공을 ‘천상의 정원’에 모아 놓고, 현재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축제에 참가한 어린이들은 환경보존 연극인 ‘서바이벌 쇼’에 참가해 쓰레기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대우림의 다양한 잎과 꽃을 직접 갈아 자신의 얼굴에 바를 로션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에든버러 지역 대학인 해리엇-와트대에서는 첨단 식물학 연구와 생명과학 결과들을 쉽고 재밌게 꾸며 과학축제의 한부분을 빛내고 있었다.
일반 성인을 위한 수준 높은 과학강연도 축제의 분위기를 북돋우는데 한몫 했다. 과학강연은 주로 저녁시간대를 이용해 진행됐는데, 낮 시간대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직장인과 대학생, 할아버지 관객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시내의 가장 큰 공연장인 ‘트레버스 극장’에서 진행된 존 설스톤의 과학강연은 그의 팬과 일반 대학생의 열띤 관심으로 충만했다. 존 설스톤은 지난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과학자로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진행한 영국의 생거센터소장이다.
우리에게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도킨스 교수의 강연도 열렸다. 최근에 발매된 자신의 책 ‘악마의 목사’ 사인회를 겸한 이 강연에는 진화에 대한 수준높은 대화가 오갔다. 도킨스는 현재 옥스퍼드대에서 ‘과학의 대중이해’과의 전임교수를 맡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한 할머니가 질문을 하자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논지를 이해시켰고, 질문자 역시 이에 뒤질세라 도킨스의 주장에 반박했다. 옥스퍼드대 교수와 에든버러 시골 할머니 사이에 ‘진화’에 대한 논쟁이 진행된 것이다. 영국민의 과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최상의 놀이 공간 글래스고 과학관
에든버러 과학축제의 또다른 명성은 버스로 1시간 가량 떨어진 글래스고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에든버러 과학축제는 물론 에든버러시가 중심이지만, 스코틀랜드 전역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글래스고 시내에 위치한 ‘글래스고 사이언스 센터’가 그 중 하나다. 이 센터는 상설 과학관으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규모다. 더욱 놀라운 점은 서울 삼성동의 무역전시장 규모의 과학전시관이 1년 내내 운영된다는 사실이다.
글래스고는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발상지 중 하나답게 면직공업을 중심으로 철강, 운수, 기계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런 산업열기는 세계화의 바람으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해 지난 20세기 초 글래스고시는 레저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많은 시민과 과학자, 과학교사들은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고 시를 설득하기에 나섰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글래스고 사이언스 센터다.
글래스고 과학관은 현재 시를 상징하는 건물이 됐으며, 인근 에든버러, 스터링, 던디 등의 시에서 많은 관람객이 찾는다. 글래스고 과학관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과학원리를 설명하는 패널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학관이 아니라 관람객이 직접 만져보고 조작하며 실험하는, 말 그대로 과학을 체험하는 장소다.
총 3층의 과학 ‘놀이공간’과 아이맥스 영화관, 사이언스 타워 등으로 구성된 과학관 안에는 저마다 놀이삼매경에 빠진 어린이들로 가득 차있었다. 저렇게 어릴 때부터 과학을 놀이로 재밌게 체험하면 이공계기피니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이니 하는 말들은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과학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관심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기자는 이번 축제를 크로아티아, 브라질, 뉴질랜드, 호주, 그리스, 포루투갈, 러시아에서 온 과학교사와 기자, 대학교수 등과 함께 관람했다. 축제의 마지막 날 일행은 그간의 일정을 정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브라질의 에두아르도 교수는 “그 나라의 과학수준은 첨단연구 결과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과학적 사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인프라가 얼마나 잘 구축돼 있는지도 수준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일행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가슴 속에 ‘저마다의 과학관’을 담은 채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