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舍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화장을 거친 뒤 나타나는 오색영롱한 구슬 사리. 그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11월 10일 거행된 성철종정 다비식에서는 이른 바 '석가모니 이래 가장 많은 사리'가 나와 불계와 일반인의 관심을 모았다.
성철종정 장의위원회는 11월 15일 성철종정의 법골로부터 모두 1백10과(顆)의 사리를 최종 수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사리들은 콩알 크기로부터 쌀알반쪽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사리들은 정골(頂骨, 머리) 부분에서 50-60과를 비롯, 법체의 각부분에서 고루 나왔다. 이 사리들은 49재가 끝나는 12월 22일 이후 해인사 경내에 세워질 사리탑에 봉안될 예정이다.
몸에서 가장 흔한 무기물은 칼슘
사리는 법력의 상징인가, 혹은 별 뜻없는 무기물 덩어리에 불과한가. 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실 사리에 대한 어떠한 화학분석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므로 과학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리를 몸에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종의 담석이나 결석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대부분 유기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등 생명현상과 관여하는 물질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들 유기물질은 다비식과 같은 고온의 불길에서는 모두 연소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불길 속에서도 남을 수 있는 것은 무기물로 이루어진 뼈와 약간의 칼슘 성분뿐. 그러나 오색영롱한 사리와 유골은 분명히 구분된다.
연세대 의대 이무상 교수(비뇨기과)는 "뼈를 제외하고 우리 몸에 생길 수 있는 무기물로는 콩팥의 결석이나 간이나 쓸개 , 기관지에 생기는 담석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돌 자체는 우리가 밥먹고 사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 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 유병률이 30%, 증상이 있는 유병률이 8%나 되므로 매우 흔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칼슘을 많이 포함한 신장의 결석이나 담석이 사리가 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무엇보다 사리 자체를 분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며 "단지 우리 몸에서 가장 흔한 무기물이 칼슘이고 이 칼슘이 고열 속에서 다른 유기물질들과 결합되어 어떤 화학변화를 일으켰을 가능성 등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 의대 서정돈교수(내과)는 이 의견에 대해 조금은 더 회의적인 쪽이다.
"담석·결석론도 사리에 대한 화학적 분석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소박하게 추론해 보는 것일 뿐이다. 사실 담석 등의 칼슘성분은 뼈보다도 열에 약하기 때문에 이 가설 또한 어폐가 있다. 다만 시신을 단시간에 고열에서 처리하는 화장의 경우 아주 큰 뼈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버리지만, 그보다 긴 시간 동안 태우는 다비의식의 경우 어떤 요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일례로 인체에서 추출한 담석을 고열로 처리해보면 무언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볼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고 피력했다.
어찌됐건 의학계도 수긍하는 바는 정좌한 채 몇년씩 움직이지 않고 수행하는 스님들은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신진대사가 원활할 수 없기 마련이므로 결석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15년 간을 앉아서 잠을 잤다는 성철종정에게서 유래없이 사리가 많이 나온 이유도 이런데서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액 축적설도 근거를 찾기 힘들다. 정액축적설은 성생활을 하지 않고 참선으로 평생을 수행한 스님들을 화장할 때 사리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진 통설인데, 정액도 불에 타 없어지는 유기물이기 때문이다. 여승이나 평범한 할머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온 사례가 있어 그 신빙성을 더욱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면 사리의 양이 법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은 사실일까. 사리공양에 의한 공덕의 유무문제는 초기 불교에서도 논란이 돼 왔으나, 속설과는 달리 불교계에서는 수행정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가장 많은 사리는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로 8곡4두. 우리나라 역대의 고승 가운데는 지난 66년 송광사에서 열반한 초대종정 효봉스님이 34과, 탄허스님이 13과, 혜운스님이 20과, 성철스님의 스승인 동산스님과 용성스님은 각 2과의 사리를 남겼다. 승려가 아닌 보살들에게서도 사리가 나온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 89년에는 불교 평신도인 85세의 할머니를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한 결과, 사리가 77과나 나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반면 지난 82년 입적한 경봉스님을 비롯, 만공스님이나 용성스님 등은 사리를 남기지 않았으며, 경허스님은 자신의 입적 후 사리수습을 못하게 한 바 있다.
사리를 남기지 않은 고승도 적지 않다
그러면 불도에서는 왜 사리를 중시하게 됐을까. 사리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면 이 의문은 쉽게 풀리게 된다.
사리의 수습절차는 다비의 마지막 의식에 해당한다. 사리는 다비전의 전신사리(全身舍利)와 다비 후의 쇄신사리(碎身舍利)로 구분되는데, 다비 후 나오는 구슬모양의 유골은 쇄신사리를 뜻한다. 크기도 다양하지만 색깔도 황금색 검은색 붉은색 흰색 등이 뒤섞여 영롱한 빛깔을 띤다.
사리(舍利)는 본래 '신체'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SARIRA'에서 유래했는데, 후에 불타(佛陀), 고승(高僧) 등의 시신을 화장한 뒤 남는 구슬모양의 작은 결정체를 뜻하게 되었다. 이를 다투(駄都)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몸 전체가 사리여서 다비 후 8곡4두(8가마 4말)의 사리가 나왔다고 기록 돼 있다. 물론 당시 인도의 도량형이 지금과 같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으나 무척 많은 양이었음은 추측할 수 있다. 이 사리들은 8개국에 나누어 봉안되고 8대탑이 세워졌다.
B.C.3세기 경 아소카왕 때에는 8만4천의 불사리탑을 건립, 사리를 깨달음과 진리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이것이 사리신앙, 즉 탑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리를 신봉했다는 것이다. 진신 사리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를 봉안한 사찰에서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리가 전달된 것은 6세기 중엽. 삼국유사 권4에 따르면 549년(신라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사신이 입학승각덕과 함께 불사리를 전한 것으로 돼 있고 그 뒤 신라는 일본에 불상과 금탑과 사리를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등에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사찰에는 불상이 따로 없다. 이들 사찰의 진신사리는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사리는 법력과는 무관하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불가에서 이를 중시하는 이유는 석가모니에서 비롯되는 전통적인 의미 때문이라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