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인 1903년은 지구 생명체에겐 족쇄와도 같은 중력을 이기려는 힘겨운 노력이 있었던 해다. 12월 미국에서 라이트 형제가 세계최초의 역사적인 동력비행을 시도했으며, 그보다 일곱달 전인 5월 지구의 반대편 옛소련에서는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Konstantin Eduardovich Tsiolkovsky)라는 한 시골학교의 선생님이 우주비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 과학적 논문을 세계최초로 발표했다.
모스크바의 ‘과학평론’지에 실린 ‘반작용 추진장치에 의한 우주탐험’이란 논문은 나중에야 불후의 명성을 남겼지만 발표당시에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늘을 비행하는 일조차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때에 우주비행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시기상조였다. 원래 1898년에 제출된 이 논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5년이나 소요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주공학기술이 싹도 트지 않았던 시기에 세상을 당황하게 한 그의 논문을 실어준 편집자의 혜안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치올코프스키는 그때까지 SF소설의 소재 정도로 다뤄지던 우주여행에 대해 수학과 물리의 이론을 통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러시아는 그의 업적을 기려 이 논문의 발행년도를 러시아 우주개발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귀먹었지만 ‘우주공간과 교신’
치올코프스키는 1857년 랴잔주의 이제프스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산림관리인이자 아마추어 발명가였다. 어린 시절 활발한 아이였던 그는 9살 때 성홍열을 앓아 귀를 먹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학업을 계속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13세 때 돌아가시자 외부세계와 차단된 생활을 했다. 치올코프스키는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자 집에서 수학, 물리, 화학에 관한 아버지의 장서를 읽으며 독학했고 과학에 흥미가 많아 간단한 도구로 실험활동을 해나갔다. 과학에 대한 아들의 열정과 재능을 지켜본 아버지는 16세 때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다. 여기서 치올코프스키는 안타깝게 대학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자 직접 깔때기 모양으로 만든 보청기를 이용해 화학, 천문학 등을 몰래 청강하기도 했다.
논문만큼 SF소설 중시했던 이유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자 도서관에서 다시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치올코프스키는 우주비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쥘 베른의 소설과 도서관 사서였던 철학자 니콜라이 페도로프였다. 특히 페도로프는 치올코프스키가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읽을 책을 정해주기도 했다. 또한 치올코프스키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생활비를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실험활동도 계속했는데, 이때를 그는 “우주공간과의 교신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등수학을 공부하게 됐다”라며 회상했다.
3년 간의 모스크바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치올코프스키는 초등학교 산수교사가 돼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그는 기구(氣求)에 관심이 많아 금속제 비행기와 같은 획기적인 구상을 했으며 집안에 풍동장치를 만들어 비행물체의 저항에 대해 연구했다. 35세 때인 189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칼루가로 옮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연구활동을 매우 활발히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자금은 물론 출판물이 모두 가족의 생활비를 줄여가며 자비로 마련한 것이라 충분히 연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893년에서 1896년 사이에 치올코프스키는 ‘지구와 우주에 관한 환상’이나 ‘다른 세계에 생명은 있는가’ 등의 SF소설을 썼는데, 이런 소설로 인해 정통적인 학자 대우를 못받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우주탐험이 사회진보의 한몫으로 추진돼 마침내 인간의 생활을 바꾸고 그 생활권을 태양계 전체로 확대할 날이 오리라고 예상했고 이런 자신의 철학을 보급하기 위해 어려운 논문뿐 아니라 쉬운 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의 정통 논문 ‘반작용 추진장치에 의한 우주탐험’이 1898년에 투고되고도 5년 동안이나 빛을 보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3년에 이르러 겨우 인쇄된 이 논문은 반작용 추진장치인 로켓의 비행원리를 다뤘다. 하지만 이 잡지에 함께 실린 다른 논문들이 정치혁명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는 대부분 정부에 의해 압수당하고 말았다.
레닌정권 등장으로 명성 얻어
1903년의 논문이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치올코프스키는 실망하지 않고 1911년과 1914년에 우주로켓의 논문을 모스크바의 항공잡지에 발표했다. 이들도 물론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의 생활은 매우 어려워졌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레닌정권은 이제 61세가 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과학자를 인민의 위대한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1919년 치올코프스키는 옛소련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됐다. 그의 작품 ‘중력의 극복’, ‘지구의 저 너머로’, ‘우주의 재산’이 뜻밖에 인쇄됐으며, 칼루가의 정부인쇄국이 그의 옛 논문을 모아 ‘우주공간 로켓’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그는 몸 속에 차있던 연구욕을 더욱 불태워 ‘우주로켓의 실험적 준비’, ‘우주여행자’, ‘우주비행의 목적’, ‘로켓엔진’, ‘우주 로켓열차’ 등 60여편의 천문학·기계공학·물리학 관련논문과 SF소설을 발표했다. 1927년 파리에 있는 그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치올코프스키를 ‘우주항해학(astronautics)의 아버지’로 칭송했다.
79세 생일을 맞은지 이틀 후인 1936년 9월 19일 밤 10시가 조금 지난 때 치올코프스키는 창문 너머로 그의 평생에 걸친 도전의 대상이자 영감을 주었던 반짝이는 별과 행성을 지켜보면서 죽어갔다. 옛소련 정부는 그가 살던 집을 국립박물관으로 만들었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부터 치올코프스키상을 제정해 매 3년마다 우주비행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미국의 칼 세이건 박사 또한 이 상을 받은 바 있다.
최근 이온로켓 아이디어 실현돼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치올코프스키의 구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최초의 비행기가 비틀거리며 날아올랐을 무렵에 그의 연구주제는 우주여행의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로켓은 진공 중에 이용할 수 있는 추진장치라는 것, 로켓은 공기보다 진공 중에서 더욱 성능이 좋다는 것, 로켓은 가스의 분출속도보다 더 빨리 비행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연료의 일정량으로 추진할 수 있는 로켓의 효율을 측정하는 기본개념(일반적으로 비추력이라 하며 동구권에서는 ‘치올코프스키의 수’로 부르고 있다)을 밝혀냈다. 또한 가장 성능이 높은 추진제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현재 우주왕복선의 추진제인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로켓연료로 제시했다. 뜨거워진 로켓엔진을 식히기 위한 재생냉각법을 고안했으며, 분사구에 조그마한 날개를 넣어 로켓의 방향을 조정하고자 했다. 로켓의 자세를 조정하는 자이로스코프 장치, 가변 노즐을 이용한 추력 세기의 조절, 대기와의 마찰을 이용한 로켓의 속도 조절 등 현대 로켓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기술을 제시했다.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속도와 로켓의 성능을 비교해 계산하던 그는 다단계 로켓의 개념을 도출해냈다. 기차처럼 연결된 여러개의 로켓을 동시에 발사해 연료를 소모해가면서 불필요해진 로켓은 분리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전체 로켓의 무게는 점차 가벼워지고 가속도는 점점 더해져 결국 빠른 최종속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로켓은 2-3단의 다단로켓으로 돼있다. 1990년대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다단계가 아닌 하나의 단계로 우주로 직행하려는 꿈의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기술적인 난제가 남아있어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화학로켓의 한계를 인식한 치올코프스키는 비화학 추진방법으로 광자나 이온, 또는 원자력 추진로켓의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중 원자력 추진로켓은 1960년대 지상시험으로 끝난 반면, 이온 추진로켓은 1998년 NASA의 딥 스페이스 1호에 의해 실현됐다.
자급자족형 우주선 구상
치올코프스키는 또한 우주정거장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우주정거장은 모양이 원통형이고 축 중심으로 회전하며 적절한 인공중력을 만들도록 돼있다. 더 나아가 우주정거장을 움직여 태양계를 돌아다니고 원하는 행성에 관한 더욱 정밀한 탐사를 위해 행성의 궤도에 진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또한 그의 우주정거장에는 승무원의 호흡(산소의 생성과 이산화탄소의 제거)과 식량을 해결할 온실장치도 있었다. 그는 공기, 물, 식량 등을 자체 생태 순환계로 해결하는 완전히 자급자족형의 우주선을 생각했다. 수백년 이상이 소요되는 항성간 여행을 위해 꼭 필요한 이 자급자족형 생태계의 구상은 1991년 9월 미국의 한 민간기업에 의해 ‘바이오스피어(Biosphere)2’ 실험으로 진행됐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외에 치올코프스키는 사용 후 우주공간에 버려지는 로켓의 일부를 이용해 우주정거장을 만드는 계획도 생각했는데, 같은 방식의 우주정거장 계획이 1980년대 NASA에서 고려된 적이 있다. 지구궤도 진입중 버려지는 우주왕복선의 거대한 연료탱크를 우주정거장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청력 상실, 어머니의 죽음, 독학, 아들의 자살(1902년), 열악한 경제형편 등 혹독한 환경 속에서 치올코프스키가 꿈꿨던 우주비행은 그의 탄생 1백주년(1957년 옛소련의 스푸트니크)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다시 그의 놀라운 논문이 발표된지 1백주년이 되는 2003년. 그의 구상 중 많은 것이 실현됐지만 아직 많은 것은 성취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하지만 우린 그의 희망처럼 지구라는 요람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우주를 향해 도전할 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지구 생명체’가 아니라 별의 잔해로부터 태어난 ‘우주 생명체’라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