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청동기 기술에서도 그랬듯이 철의 기술에서도 한국형 제품을 창출해내는 데 뛰어난 창조성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거대한 철불(鐵佛) 좌상(坐像) 몇개가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쇠를 녹여 부어 만든 무쇠(鑄鐵)불상틀이다. 모두 높이가 1.5m 이상이고 간혹 2.5m가 넘는 굉장한 것들도 있어 얼른 보아서는 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8~10세기 사이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철불을, 그것도 뛰어난 조각솜씨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의 철의 기술사(技術史)를 제대로 알면 경탄의 폭은 훨씬 더 커진다.
무쇠 불상 앞에서
그런 철불이 국내에 지금 50구 가량 남아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국과 일본의 철불과 견주어 볼때, 그 양과 질에서 비교가 안된다.
지금까지 미술사 학자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철불을 제조하게 된 것을 구리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해 왔다. 하기야 구리가 부족하면 불상을 쇠로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구리, 즉 청동으로 불상을 주조하는 것과 철로 주조하는 일은 그 작업의 어려움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거대한 철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만한 가능성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그 정도 수준의 철의 기술이 8세기의 통일신라에서 성숙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은 그 기술이 뛰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국립박물관 강우방(姜友邦) 미술부장의 철불편년(編年)과 주조기법에 관한 연구논문은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청동불상을 훌륭하게 주조해 낼 수 있는 기술적 전통이 있었기에 훌륭한 철불의 주조가 가능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청동불상의 주조기법과 철불의 주조기법이 같은 기술의 전승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또 거푸집은 진흙거푸집을 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철불의 주조는 이 모든 기술이 조화되고 상승되어 이루어 진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철불의 주조기술은 오랫동안 한국인이 개발·전승한 철의 기술의 축적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 철의 기술은 8세기 무렵에 이르러 불교신앙의 상징인 불상의 제작으로 승화되었다. 가장 좋은 쇠붙이로 가장 부드러운 부처의 미소를 창출해 낸다는 일은 녹은 쇳물같은 뜨거운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그 철의 기술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명도전과는 어떤 관계?
기원전 5~4세기경, 청동기문화가 번영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또 하나의 금속기인 철기(鐵器)가 출현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 기원전 7~6세기경에 출현한 철의 기술이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의 서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나타나서, 점차로 중부와 남부로 퍼져나갔다고 알려져 왔다.
중국의 철기나 그 기술의 전파경로와 시기는 철기와 함께 발견되는 명도전(明刀錢)의 출토유적을 통해 추정되고 있다. 명도전의 유적들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한반도 안에서는 평안도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 사실은 철기의 시작과 명도전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밑받침하는 유력한 근거로 인정된다.
또 명도전의 중국 본토에서의 발견 예를 보면 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따라서 중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열렸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약 l0개의 철기 퇴장(退藏)유적들이 평안도지방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평북 위원군(渭原郡) 숭정면(崇正面) 용연동(龍淵洞)과 영변군(寧邊郡) 오리면(梧里面) 세죽리(細竹里)는 많은 철기들이 출토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연동 유적에서는 명도전 4백개를 비롯하여 쇠창(鐵矛) 2개, 쇠화살촉 1개, 철제 농경구 4개, 철제 공구 3개 등이 일괄해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세죽리 유적에서는 2천여개의 명도전과 함께 쇠로 만든 호미 괭이 낫 도끼 끌 손칼 화살촉 칼 등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모두 중국 본토에서 가져온 것들일 뿐, 우리민족의 작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단지 국내의 초기 철기문화의 유입경로라든지 그 계보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물적 증거를 제공하는 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것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역과 문화교류의 결과로 보아야 하고, 출토된 토기들이 중국 것과는 다른 기술로 만들어진 점을 인정, 그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기술적 소산이라는 견해다.
이 유적들에서 발견된 철기는 무쇠 시우쇠 강철의 세 종류가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특히 최근의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세죽리 유적에서는 세 종류가 다 발견되었다. 즉 화살촉은 규소가 흔적만 남고 망간이 0.02% 함유된 순철조직으로 시우쇠였고, 도끼(파편)는 탄소 4.2%, 규소 0.19%, 망간 0.03%, 납 0.10%, 황 0.016%의 무쇠였다. 그리고 탄소를 2.98% 함유한 무쇠도끼(파편)도 나왔다. 또 다른 도끼는 탄소 1.43%, 규소 0.1%, 망간 0.18%, 인 0.009%, 황 0.011 %의 강철이었고 또 다른 하나의 도끼(파편)는 탄소가 0.7% 들어있는 강철이었다.
이 결과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중국에서는 기원전 7~6세기경에 출현한 철의 기술이 시우쇠를 거쳐 기원전 5~4세기경에는 무쇠가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제철기술 발달과정은 중국에서와는 달리 거의 동시에 3종류의 철기가 만들어졌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생각은, 함경북도 회령시 오동(五洞)과 거의 같은 시기의 유적이면서도, 중국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의 유입경로에서 매우 떨어져 있는 무산(茂山) 범의 구석(虎谷洞) 유적에서 출토된 쇠도끼들의 분석결과에서도 위추된다.
범의 구석 유적에서 출토된 쇠도끼들 중에서 두개는 규소가 각각 0.02% 함유되었거나 흔적만 남아 있고, 망간은 각각 0.02%와 0.01%가 함유된 시우쇠 제품이었다. 또 세개의 쇠도끼는 탄소가 각각 4.2% 4.05% 4.45% 함유된 무쇠제품이었다. 그리고 한개는 탄소가 1.55% 포함된 강철제품이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여기서 특히 기원전 3~2세기의 유적인 세죽리유적에서 탄소공구강에 해당하는 0.7%의 탄소가 포함된 강철도끼가 나왔고, 그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범의 구석 유적에서도 강철도끼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강철의 출현이 중국과 같은 시기거나 앞서 있다는 사실은 그 기술의 전파교류의 상호관계에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동불상의 전통이 이어져
도끼는 철기의 등장과 함께 가장 먼저 들어오고,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연모의 하나다. 그런데 국내의 도끼는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漢)대에 걸쳐서 사용된 쇠도끼들과 그 형식이 공통된다. 그리고 위원 용연동에서 출토된 도끼와 회령 오동유적의 제6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것이 같은 계통의 도끼라는 점도 홍미롭다. 이 사실은 두 유적이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중국의 철기사용이 주변의 다른 민족보다 뒤졌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당시의 중국인들은 외래(外來)의 발달된 철기 기술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이 가정에서 추측컨대 특히 회령 오동과 무산범의 구석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중국으로 들어간 기술과 같은 계통의 기술이 바로 직수입된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회령과 무산은 예부터 철의 산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조선조의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지역에서 철이 많이 산출된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무산은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큰 철의 산지의 하나로 유명하다.
현재 회령 무산 두 유적의 철기가 중국철기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생각되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그밖에 다른 유적에서도 한국의 철의 기술이 중국의 철기기술에서 비롯되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또한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기술에서 철의 기술로 발전하는 과정은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기술사적(技術史的)으로 볼 때, 한국에서 초기 청동기시대부터 청동기의 주조기술이 발달했다는 점도 철기의 주조기술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기술적 바탕이 된다. 철기의 주조기술은 청동기 주조기술의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인은 통일신라시대의 청동불상 주조기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거대한 무쇠불상을 만들었다.
철기의 출현은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새로운 무기는 군사기술의 혁병을 불러 일으켰고 철제 농기구와 공구는 생산기술의 혁명을 초래했다. 그래서 철기는 고대인에게 있어서 부(富)와 힘의 상징이었다. 한반도 지역에서의 철기의 출현과 철의 기술에 대한 역사적 해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철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착실하게 진행돼 왔지만 기술사적 또는 기술고고학적 조명은 거의 없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철기문화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재개되고 있다. 퍽 다해한 일이다. 이 연구는 우리에게 철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어 주목된다.
돌거푸집에 부어 만들다
고고학자 김정배(金貞培)교수는 한국의 철기문화의 출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후대에 와서 중국의 철기문화가 준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으나 처음부터 우리의 철기문화가 중국의 철기문화와 연결되는 것인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는 독자적인 철기문화의 발생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종래 명도전과 토광묘의 출현이 한국에서는 철기가 시작되는 기준처럼 여겨졌으나 그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회령 오동이나 무산 범의 구석에서 나온 철기도, 함께 출토된 토기를 통해 볼때, 토광묘보다 결코 '젊지' 않은 유물이다.
요컨대 한국의 철의 기술은 명도전과 함께 들어온 중국의 철기기술에서 시작됐다는 종래의 학설과 그에 이의를 제기한 새로운 학설이 맞부딪쳐 있다. 새 학설은 다시 둘로 나뉜다. 명도전보다 이르거나 비슷한 시기에 북쪽에서 들어온 철기가 서북지역과 동북쪽에 각각 정착하면서 시작됐다는 설이 그 첫번 째다. 다른 하나는 청동기기술에서 철의 기술로 이행되는 기술발전에 따라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되고 이어져 나갔을 것이라는 학설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면서 철기는 크게 보급되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 시기의 여러 주거지에서 쇠로 만든 호미 괭이 낫 도끼 끌 칼 화살촉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철제 농공구(農工具)의 다양한 제조와 보급은 생산기술의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와는 비교가 안되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논밭을 갈고 농작물을 가꾸고 거두는 일이 몇 배나 빠르고 쉽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철기는 거의 모두가 무쇠제품이었다. 쇠를 달궈 두드려서 모양을 갖춰 만든 것이 아니고, 거푸집에 녹은 쇳물을 부어낸 것들이었다. 청동기시대에 청동기를 거푸집으로 부어 만든 기술과 같은 식으로 쇠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일정한 모양과 크기를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나온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거푸집은 돌거푸집이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한쪽만 파고 다른 한쪽 면에는 평평한 돌을 대, 녹은 쇳물을 부어내도록 되어 있다. 또 철제품들의 금속학적 고찰과 분석결과에 따르면 질이 우수하다고 할만한 쇠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질이 좋은 것도 있다. '백색주철' 또는 '회색주철'이라는 쇠다. 하지만 대부분은 탄소함유량이 상당히 높아 부러지기 쉬운 것들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시기에 거푸집으로 무쇠제품을 부어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민족은 지구상에 몇 되지 않았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시베리아의 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독특한 형식의 무쇠도끼 제품을 같은 규격의 돌거푸집을 사용, 대량으로 만들어낸 사실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