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7일. 일본 도쿄의 한 실험실에서 어린아이 형상의 로봇 하나가 태어난다. 과학청 장관 텐마 박사가 교통사고로 잃은 아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로봇은 죽은 아들을 대신할 수 없었고, 이에 실망한 텐마 박사는 로봇을 서커스단에 팔아넘긴다. 갖은 고생을 하던 로봇은 오차노미즈 박사를 만나 자유의 몸이 된다. 그 후 로봇은 10만 마력의 파워를 가진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
TV로 방영돼 우리에게도 친숙한 만화 ‘우주소년 아톰’의 줄거리다. 아톰은 일본 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 데스카 오사무가 1951년 창조한 인간형 로봇 캐릭터로, 만화 안에서 2003년 4월 7일 만들어진 것으로 설정돼 있다. 4월 초 일본 열도가 아톰으로 들끓은 이유다.
세계 최대 규모의 로봇 전시회인 ‘로보덱스(ROBODEX) 2003’도 아톰의 생일에 맞춰 일정이 짜여져 3일부터 6일까지 일본 요코하마시 파시피코 요코하마 전시홀에서 열렸다. 주최측은 4일 동안 6만7천여명이 관람해 가장 성공적인 전시회였다고 밝혔다. 회사와 대학 등 38곳에서 지난해의 1.5배나 되는 90여개의 다양한 로봇을 출품해 내용면에서도 풍성했다.
한편 올해는 세계 최초의 인간형 로봇인 ‘와봇(WABOT)-1’이 만들어진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1973년 일본 와세다대 가토 이치로 교수팀이 만든 와봇은 인간처럼 두발로 걷는 최초의 2족 보행 로봇이다. 현재 관점에서는 엉성해 보이지만 와봇의 탄생은 인간 형태로 로봇을 만들려는 도전의 출발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인간형 로봇 캐릭터 아톰 생일에서 최초의 인간형 로봇 와봇 탄생까지 겹경사를 맞은 일본 현지를 한국과학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직접 취재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성큼 성큼 걸어나오고 있는 일본의 인간형 로봇들을 직접 만나보자.
로봇공학 발전 일등공신은 아톰
사람의 손발처럼 동작하는 기계로 정의되는 로봇. 1920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자신의 희곡에서 노예나 강제 노동을 의미하는 ‘로보타’(robota)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현재 로봇은 어원처럼 산업현장에서 인간을 대신해 힘든 일을 하는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산업용 로봇은 자신의 임무에 맡는 기괴한 모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형 로봇이란 인간을 흉내내 만든 로봇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사실 산업현장에 사용되는 로봇이 인간을 닮을 필요는 전혀 없다. 이 때문에 로봇공학이 발달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동안 인간형 로봇에 대해 이렇다 할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꾸준히 인간형 로봇 연구가 진행돼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인간형 로봇 연구가 일본에서 활발한 데는 사실 이번에 생일을 맞이한 아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초의 인간형 로봇 캐릭터인 아톰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암울했던 일본인에게 과학기술의 꿈을 심어줬다. 만화를 본 많은 일본인들은 과학기술자가 됐고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즉 인간형 로봇을 만드는 일은 수많은 일본인의 꿈을 실현하는 일인 셈이다.
일본 인간형 로봇의 기원인 아톰을 살펴보기 위해서 데스카가 살았던 오사카 인근 다카라즈카에 위치한 데스카 오사무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에서는 초창기 아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는데, 복잡한 기계들이 가득한 실험실 속 아톰 모습도 그대로 재현해 눈길을 끌었다. 관람객 중에는 어린아이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많아 세대에 구애되지 않고 사랑받는 아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만화에서 아톰이 태어난 곳인 도쿄 신주쿠 다카다노바바에서는 화려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역에서 만난 한 주민은 “열차 신호음을 아톰 주제가로 바꾸는 등 작은 이벤트들 때문에 더 흥겹다”고 말했다. 상점에서는 생일날 눈을 뜨도록 만들어진 아톰 인형을 비롯해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캐릭터 상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언론에서는 이번 아톰 생일로 인한 경제효과가 5천1백억엔(약 5조1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할 정도였다.
일본의 로봇 열기를 한곳에 모아놓은 로보덱스의 전시장 한가운데도 아톰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행사 마지막날에는 잠들어있던 아톰이 눈을 뜨고 일어나는 모습이 연출돼 이를 지켜보던 수천명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장난감 로봇의 인기에 변화
일본에서 최신 로봇들을 하루 동안 살펴볼 수는 없을까. 다양한 로봇 연구가 진행되는 일본에서 사실 로봇 하나를 구경하려면 발품을 꽤나 팔아야 한다. 더욱이 로봇 관련 기술은 극비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개를 꺼리는 연구소들도 많다. 그러나 매년 봄 펼쳐지는 로보덱스는 일반인들이 최신 로봇을 한자리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로보덱스에 출품되는 로봇들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함께 살 로봇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번 로보덱스 역시 인간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다양한 재능을 갖춘 로봇들이 대거 선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연구가 진행된다는 로봇 연구의 특성상 처음 공개되는 로봇뿐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종류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지난해 공개된 종류라 해도 올해 공개된 로봇에는 1년 동안의 연구결과가 녹아있다는 의미다.
소니는 이미 스타가 돼버린 강아지 모양의 장난감 로봇 ‘아이보’(AIBO)를 다시 선보였다. 인공지능 로봇(Artificial Intelligence roBOt)의 약자면서 일어로는 친구라는 의미를 지닌 아이보는 1999년 처음 소개됐는데, 만만치 않은 가격(약 3백만원)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10만여대나 팔려나간 베스트셀러 로봇이다. 이번에 선보인 아이보는 전형적인 모양의 ERS-210A, 사냥개 모습을 하고 있는 날렵한 ERS-220A, 토실토실한 모양의 ERS-31L과 ERS-312B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와 센서, 모터를 장착한 아이보는 자연스런 움직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기쁨, 화남과 같은 감정을 소리와 램프, 발광소자(LED)를 통해 표현한다. 소니는 부스 앞 전시회장 바닥에 아이보 몇마리를 풀어놓아 관람객들이 함께 놀 수 있도록 배려해 큰 호응을 얻었다.
세이코 앱손은 작은 크기의 로봇쥐 ‘Monsieur II-p’를 출품했는데, 현미경을 설치해 관람객들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반다이는 우리나라에 ‘동짜몽’이라는 만화로 소개돼 낯익은 ‘로봇 도라이몽’을 선보였다. 초보적인 수준으로 2010년까지 개발을 완료한다는 목표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하고 장난감 로봇은 예전과 달리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좀더 전문적인 로봇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관람객의 관심도 대부분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일본 로봇 연구의 흐름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던 셈이다.
감정을 느끼고 표정까지 짓는다
로보덱스에 출품된 대부분의 로봇은 인간형 로봇이었다. 인체의 메커니즘을 재현해 보여주는 종류뿐 아니라 특정한 용도로 사용되는 로봇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이 무엇이든지 우선 인간과 닮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본 로봇연구자의 생각이 읽혀졌다.
인간의 행동을 보여주는 인간형 로봇의 대표주자는 혼다의 ‘아시모’(ASIMO)다. 2000년 처음 공개된 아시모는 인간 크기를 갖고 완벽한 2족 보행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세계 로봇공학자를 흥분시켰다. 이번 로보덱스에서도 아시모는 로봇공학자뿐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지난해 12월 말 개발된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는데, 키 1백20cm에 몸무게가 52kg으로 예전 버전보다 몸무게가 9kg이나 늘었다.
혼다는 이번 아시모에 지능을 부여하려고 기술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사람이 다가서면 인사하고 사람을 따라다니기도 하며 간단히 말을 건넬 수준에 도달했다. 지난해 묵묵히 서있던 아시모와 사진을 찍기 위해 수시간을 줄서서 기다렸던 관람객들은 올해에는 인사하고 손까지 흔들어주는 아시모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다시 수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와봇을 탄생시켜 인간형 로봇 연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와세다대는 이번에도 다양한 인간형 로봇들을 선보였다. ‘WF-4’는 키 2백50cm에 몸무게가 1백kg이나 나가는 장신의 로봇으로 전문가 뺨치게 플루트를 완벽히 연주한다. 실제 플루트 연주가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개발됐는데, 곧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와세다대의 ‘로비수케’(ROBISUKE)는 인간과 대화를 시도하는 로봇이다. 얼굴과 목소리, 행동을 인식하는 눈을 갖고 있고, 자연스러운 팔동작을 취하며 대화를 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 대화할 때는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기까지 한다.
또다른 와세다대의 로봇 ‘와메바(WAMOEBA)-2Ri’는 키 1백38cm에 몸무게가 1백30kg으로 표현과 학습,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지능을 연구할 목적으로 개발됐다. 머리부분의 2개 CCD 카메라가 눈을 대신하고, 4개의 초음파 측정장치로 장애물을 피한다. 인간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데, 호감도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개성 넘치는 얼굴을 갖고 있는 와세다대의 ‘WE-4R’은 키 1백60cm에 몸무게 58kg인 인간형 로봇이다. 센서를 통해 보고 듣고 감촉을 느끼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눈 입술 턱 등 29부분이 움직여 다양한 얼굴 표정을 짓는다. 인간과 자연스런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개발된 로봇으로 대화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즐거움, 화남, 놀람, 슬픔, 공포, 미움 등 6가지 감정을 표현한다.
도쿄 이과대가 선보인 얼굴로봇 ‘사야’(SAYA)는 실제 인간과 같은 얼굴 표정을 짓는다. 미소를 머금거나 찡그리는 등 다양한 표정으로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 표정은 얼굴에서 18개 지점의 움직임이 조합돼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 돌보고 말벗 역할도 척척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인간형 로봇 중에서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개발한 ‘와카마루’(WAKAMARU)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인간과 함께 생활할 가정용 로봇인 와카마루는 키 1m에 몸무게 30kg인 아담한 몸집을 갖고 있다. 마치 치마를 두른 듯한 겉모습부터 호감이 가는데,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토시유키 키타가 외형을 디자인했다.
와카마루는 머리에 붙어있는 센서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와 거리를 판단하면서 치마 밑에 달려있는 바퀴를 사용해 우아하게 움직인다. 자신의 끼니인 전기도 알아서 충전하므로 집안에서 1년 내내 인간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 와카마루는 혼자 사는 노인의 벗이 될 목적으로 개발됐다. 이를 위해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1만여 단어를 알아들으며 일상적인 주제라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주인을 포함해 여러명의 얼굴을 기억하고, 친밀한 정도에 따라 적절한 말과 제스처까지 취한다. 도둑의 침입이나 화재 등이 발생하면 복부에 내장된 무선 랜 장치를 이용해 비상사태를 알리기까지 한다.
3천7백70만달러(약 5백억원) 규모의 ‘인간형 로봇 프로젝트’(HRP, Humanoid Robotics Project)를 추진하는 일본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는 ‘HRP-1S’와 ‘HRP-2’라는 인간형 로봇을 선보였다. HRP-1s는 혼다의 2족 보행로봇을 바탕으로 높은 정밀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모델이다. 전시장에서 HRP-1s는 작업복을 입고 공사현장에 사용되는 굴삭기를 척척 운전해보였다. 그러나 로봇의 정교한 움직임 하나하나는 사실 원격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만화에 나오는 로봇처럼 근사한 외형을 갖고 있는 HRP-2는 HRP-1s보다 작고 가벼운 2족 보행로봇이다. 또 목소리를 인식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 간단한 명령에 의해 동작이 가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나라과학기술원(NAIST)은 Tmsuk가 개발한 인간형 로봇을 바탕으로 만든 접견 로봇인 ‘아스카’(ASKA)를 선보였다. 아스카는 안내 데스크에서 적절한 행동과 함께 질문에 답변하는 안내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소니의 춤추고 노래하는 인간형 로봇 ‘SDR-4XⅡ’도 여전히 큰 인기를 모았다. SDR-4XⅡ는 키 58cm에 몸무게 7kg인 엔터테인먼트 로봇으로 전시장에서 실제 가수보다도 더 완벽한 공연을 했다. 얼굴과 이름 정도만 기억하던 두뇌는 대화중 듣는 새로운 단어까지 기억할 수 있게 발전했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사회
인간형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로봇들도 여럿 선보였는데, 수준은 떨어졌지만 실생활에 바로 투입될 종류들이었다. 전자제품을 조정하고 내장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정용 로봇으로 후지쯔 오토메이션(PFU)은 ‘마론(MARON)-1’을, 도시바는 ‘아프리알파’(ApriAlpha)를 내놓았다. 로봇이 찍는 사진은 휴대전화나 인터넷으로 연결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외출한 후 집의 상황을 점검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
일본 경영디자인연구소와 인간형 로봇 컨소시엄(Human Robot Consortium)이 합작해 만든 가정용 로봇 ‘이프봇’(ifbot)은 사람 목소리를 섬세하게 인식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의 습관을 파악한 후 적절한 대답을 취한다. 키 45cm에 몸무게가 7kg로 바퀴를 이용해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역시 내장된 카메라를 이용해 찍은 사진을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다.
Tmsuk이 내놓은 ‘반류(BANRYU) T73S’는 가정용 경비 로봇이다. 반류는 마치 곤충처럼 4개의 다리를 이용해 초속 25cm의 속도로 기어다닌다. 침입자가 발생하면 경고하고 경찰에 알리며 화제 발생 여부도 감시한다. 내장된 카메라와 센서를 이용해 외부에서도 집안의 모습은 물론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소고 케이비 호쇼 사가 개발한 본격적인 경비로봇 ‘C4’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순찰을 도는데, 침입자를 제압할 가스총을 탑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산요는 돌아다니면서 먼지를 제거하는 귀여운 애완동물 모양의 청소기 로봇 ‘지수지-마루’(JISOUJI-MARU)를 내놓았다.
태권V와 마징가Z가 싸운다면? 최근 모 CF에서는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만한 호기심을 일본의 전자산업을 상징하는 도쿄 아키하바라 한복판에서 묻는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일본에 못지 않게 발달했다는 컨셉으로 만든 광고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 분야에서 일본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태권V의 승리를 바란다면 우리나라도 인간형 로봇 개발에 본격적으로 투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