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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라는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의 말, 그리고 “나는 시지프스를 산록에 남겨두고 떠나련다! 인간은 자기의 무거운 짐을 또다시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神)을 부정하고,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일에 더 충실하도록 가르친다. … 이제부터는 주인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더 이상 삭막하지도 공허하지도 않게 생각된다”라는 카뮈의‘시지프스 신화’로 책은 시작한다. 저자는‘우연과 필연’이라는 생명 원리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간에 대해 평소에 품고 있던 무신론적 휴머니즘을 표현하며 첫장을 펼쳐간다.


모노는 1969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포모나대에서 열었던 초청 강연을 토대로 이 책을 구성했다. 아울러 여기에 실린 내용은 1967년부터 1970년에 걸쳐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열었던 강연의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대개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강연이 대부분의 과학자 자신들에게 과학을 좀더 폭넓은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줬듯, 모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연과 필연은 1970년 출간되자마자 순식간에 수십만부가 매진되면서 베스트 셀러가 됐다. 프랑스를 포함한 전세계의 과학자와 지성인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곧 생물학과 철학을 다룬 대표적인 고전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김용준 역, 삼성출판사)과 1985년(김진욱 역, 범우사) 두차례의 번역과 출판을 통해 소개됐다.

분자생물학을 토대로 역사와 철학 재조명

우연과 필연은 머리말과 함께 총 9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무생물인 다른 자연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생물의 특징인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발생, 불변성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장은 생명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역사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생기(生氣)론과 물활(物活)론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생명론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분자생물학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단백질의 입체적 특이성, 공유결합과 비공유결합의 차이, 생명현상이 분자 수준에서 보여주는 합목적성과 복제 메커니즘, 화학결합의 종류와 단백질의 합목적성 관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6장에서는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과학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을 비판하면서 과학의 핵심은 객관성과 보편성의 추구라고 강조한다. 동시에 진화라는 합목적적 현상은 미시적 수준에서의 교란에 해당하는 돌연변이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진화는 거듭되는 창조의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7장에서 자연 생물들에게서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연으로부터 출발한 진화의 과정은 자연도태를 거치면서 선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의 진화와 다른 생물과 차이점으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8장에서는 생물진화에서 밝혀지지 않은 분야인 생명의 기원과 중추신경계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소개하며, 생물계의 특이 현상으로서 인간의 언어 활동과 그것이 갖는 인류 전체의 진화적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모노는 마지막 9장에서 현대사회의 최대 비극은 영혼의 질환이라고 지적하면서, 가치와 윤리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지식의 정체성, 즉 ‘지식의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과학

뉴턴에 의해 근대과학이 성립한 이래로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필연성을 찾는 일이었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으며,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결과를 이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러한 필연성의 근저에는 신-인간-자연이라는 관계가 가정돼 있다.
인간은 천태만상의 다양한 자연현상을 연구하고, 여기서 얻어지는 지식은 현상에 숨겨져 있지만 항상 작용하고 있는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근대는 과학을 이렇게 자연현상을 통해서 신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가정했다.

모노는 이와 같은 근대 과학의 철학적 가정을 비판한다. 자연과학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연과학은 그 자체의 가치적 원리를 따라 자율적으로 전개돼야 하며, 이때 객관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지식의 윤리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노는 “인간은 결국 자기가 우연히 출현했던 바로 이 무감각하고 망망한 우주 속에 홀로 서있음을 알게 됐다. 그의 운명이나 그의 의무는 어떤 곳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 위에는 왕국이, 그리고 발 밑에는 암흑의 함정이 가로놓여 있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로 책을 끝맺는다. 모노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카뮈가 해석한, 내려온 돌을 다시 계속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의 존재인 것이다 .

모노가 펼치는 논의의 핵심은 ‘진화라는 현상의 원인은 미시적 세계의 교란’이며, ‘교란은 결코 어떠한 법칙이나 예측 가능한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이 진화의 근본적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노의 주장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비교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현대 물리학을 개척한 대학자로 물리학 개념을 토대로 인류문화의 총체적 측면에 대해 논했다면, 모노는 생물학의 거두로서 분자생물학 개념에 기초해 현대문명을 비평했다고 대비할 수 있다.

따라서 “길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이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되면 그렇지는 못하게 된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필연적이고 불가피적이며 합목적적이라야 한다고 바라고 있다. 모든 종교, 거의 모든 철학, 그리고 과학의 일부까지도 인류가 자기 자신의 우연성을 안간힘을 다해서 부인하려는 인류 전체의 끈질기고도 영웅적인 노력을 입증해 주고 있다”는 현실은 우연성을 기본으로 삼는, 즉 당연한 현상이라고 인식하는 그에게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화가 아버지와 미국인 음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술적이고 지적인 가족 배경은 모노가 음악과 철학 등 다양한 지적 영역을 넘나드는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1년 대학 졸업 후 생물학도의 길에서 방황을 했으나, 몇몇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다시 생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1936년 록펠러재단 장학금을 받아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유학했는데, 이때 그는 유전학의 진수를 경험하고 대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파리대 교수, 1962년 콜레쥬 드 프랑스의 분자생물학 교수를 거쳐 1971년 파스퇴르연구소 소장이 됐다. 1965년 그는 프랑수아 자콥, 앙드레 르보프 등과 함께 ‘효소와 바이러스 합성의 유전적 제어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으며, 이 외에도 세계 각국의 유수한 대학과 과학단체로부터 많은 메달과 상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에 입대,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맹활약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후 레지스탕스 활약상을 인정받아, 레종도 뇌르 훈장을 받는 등 애국심 또한 프랑스에서 크게 평가받았다.

200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송진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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