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또다른 내가 무한개 우주에 살고있다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 살해하면 나의 생존은?

‘이 평행우주, 정말 마음에 드는군.’

영화 ‘큐브2’(Hypercube)에서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사립탐정 사이먼 그래디가 똑같은 사람을 세번이나 죽이고, 또 다음 사람을 죽인 후 내뱉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많은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옆방 문을 열면 자신이 죽는 모습이 보이고, 이쪽 방에서는 죽었던 사람이 저쪽 방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큐브의 문을 설계한 엔지니어는 이것이 바로 ‘평행우주’라고 설명해준다. 큐브2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아마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신들의 인식 능력 밖에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은 우리가 생활하는 3차원의 평범한 공간(cube)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인식 능력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4차원의 공간(hypercube)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밖에 또다른 세계, 예를 들어 영화처럼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공룡이 진화해 세상을 지배하거나 복거일의 소설 ‘비명(碑名)을 찾아서’에서처럼 우리나라가 아직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지만 과학적으로는 거의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취급돼 왔다.

하지만 최근의 과학이론은 이런 생각이 단지 상상만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른 세계는 존재하고, 그 모습은 사람들이 상상해온 모습보다 훨씬 더 이상한 모습일 수도 있다.

패러독스 해결하는 평행우주

많은 SF영화에서 시간여행은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주제로 사용된다.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에서는 주인공 마티(마이클 제이 폭스 분)가 과거로 가서 부모님의 결혼을 돕기도 하고, ‘터미네이터’(Terminator)에서는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로봇이 인간을 위해 싸우는 반란군 지도자의 어머니 사라를 죽이기 위해서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츠제네거 분)를 과거로 보낸다. 영화에서는 무사히 마티의 부모님이 결혼에 성공하고, 터미네이터는 반란군 지도자의 어머니를 죽이는데 실패한다. 영화는 시간여행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골치 아픈 역설을 살짝 비껴감으로써 관객들에게 편안한 결말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만일 마티가 부모님의 결혼을 돕는데 실패해 부모님이 결혼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터미네이터가 사라를 죽이는데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백 투더 퓨처에서는 마티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랑을 얻는데 실패하게 될 상황이 되자 마티가 지니고 있던 가족 사진에서 마티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궁금증을 유발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이 과거로 가서 당신의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당신이 과거의 당신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당신은 세상에 태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면 과거로 가서 할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이 당신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당신의 할아버지는 당신에게 죽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분명한 역설로 ‘할아버지 패러독스’라 불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단 하나의 우주만을 생각한다면, 시간여행에 관련된 이런 역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역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평행우주의 개념을 도입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당신이 과거로 돌아갈 때, 이웃한 평행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당신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곳에서는 당신이 절대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출발한 그 우주에는 여전히 당신이 존재한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공룡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지구를 지배할 가능성이 있을까.


이연걸 주연의 영화 ‘더 원’(The One)에도 역시 평행우주가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1백25개의 우주가 존재하며, 각 우주에는 지구에 살고 있는 현재의 나와 똑같이 생긴 또다른 내가 있다. 이것도 상당히 기발한 상상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사실 1백25개가 아니라 무한개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그리고 각각의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세상보다 훨씬 이상한 형태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큐브2에 등장하는 몇몇 방에서처럼 중력의 방향이 반대이거나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우주 밖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우주는 무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우주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우주를 무한히 뻗은 평면으로 가정해보자. 이때 다른 평행우주들은 우리우주의 아래위로 차곡차곡 쌓여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실제 우리우주는 3차원 공간에 존재하므로 평행우주를 생각하려면 4차원 이상의 공간을 가정해야 한다. 평행우주는 4차원 이상의 공간에 무한히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웃하는 평행우주는 우리에게서 불과 수cm만큼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이런 평행우주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양자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와 같은 양자는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도 있고 상충되는 성질을 한꺼번에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려는 순간 갑자기 얌전해지고 괴상한 행동을 숨긴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와 같은 양자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려는 해석들은 여러가지다. 이들 가운데 ‘다중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공간 어디에 있든지 양자에는 둘 이상의 선택권이 주어지고 우주는 입자에게 부여된 선택권의 수만큼의 평행우주로 쪼개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가지를 선택할 때마다 우주는 그 선택의 이쪽과 저쪽, 두개의 우주로 갈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 영국 옥스퍼드대의 데이비드 도이치는 이와 비슷한 ‘다중우주 해석’(multiverse interpretation)을 제안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는 우리가 선택하는 순간에 여러개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개의 평행우주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복잡한 교차점을 통과하는 기차처럼 하나의 특별한 경로를 쫓아가는 것이다. 데이비드 도이치에 따르면 진화한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거나, 우리나라가 아직 일본의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주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 영화 큐브2에서 나타나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큐브는 바로 무수한 평행우주들이 교차되는 지점인 것이다.

2차원 연못에 내리는 비

과연 영화에서처럼 평행우주를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불행히도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물론 수식으로는 얼마든지 표현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우리가 직접 4차원 이상의 공간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흔적은 볼 수 있다.

얕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를 예로 들어보자. 연못은 매우 얕아서 금붕어는 앞뒤 좌우를 구별할 수 있지만 아래위를 구별하지는 못한다고 하자. 즉 2차원의 평면에 살고 있는 금붕어다. 이 금붕어는 연못 바로 ‘위’ 3차원의 공간을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3차원의 공간에서 비가 내려 연못에 떨어진다면 연못에는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2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는 금붕어는 비록 3차원의 공간을 볼 수는 없지만, 물결을 통해 적어도 3차원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흔적은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의 차원을 더한 4차원의 시공간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을 4차원 시공간의 구부러짐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1919년 폴란드의 수학자 테오도르 칼루자는 빛이 5차원 시공간의 진동 결과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즉 4차원 공간에서의 진동이 3차원 공간에 사는 우리에게는 빛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3차원의 공간에서 내리는 비가 2차원의 평면에 살고 있는 금붕어에게 물결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3차원의 공간 외에 공간의 새로운 차원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아주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4차원 시공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을 것이다.

칼루자의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본구조 속에서 전자기 복사를 설명하기 위해 5차원의 시공간을 도입한 것이다. 이처럼 일반상대성이론(중력)과 전자기학(전자기력)을 결합하려는 이론이 바로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통일장이론을 찾는데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보냈다.

만물의 이론과 11차원의 우주


우리우주와 또다른 평행 우주는 어디에 있을까. 사진 은 우리은하의 이웃인 안드 로메다은하의 모습.


칼루자의 이론은 1970년대 말에 다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공간이 더 높은 차원을 포함하는 경우 중력과 전자기력의 두가지 힘을 통합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자연계의 기본적인 네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을 통일하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가지가 아닌 네가지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 발견됐다. 초끈이론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10차원 시공간에서 진동하는 작은 끈들로 이뤄져 있다. 중력은 움직이는 끈에 의해 시공간이 구부러지는 현상으로, 그리고 전자기력과 핵력은 끈의 진동이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초끈이론은 만물의 이론이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다. 이 이론이 충분히 이해된다면 우리 우주에 대한 비밀을 상당부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끈이론은 ‘20세기에 잘못 떨어진 21세기 이론’이라는 별명을 가진다. 우연한 기회에 20세기에 발견되긴 했지만 이론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정교한 수학적 도구가 만들어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초반에는 초끈이론이 다섯가지나 등장했는데, 이 중 어떤 것이 정확한 해석인지, 그리고 실제로 유일한 해석이 존재하긴 하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1995년 영국의 에드워드 위튼은 10차원에 1차원을 더 더한 11차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11차원의 시공간에서는 작은 끈 대신 ‘막’(membrane)이라는 평면이 등장한다. 위튼의 이론은 ‘M이론’이라 불린다.

M이론은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해결했지만 우주의 모든 비밀과 신비가 완전히 밝혀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설사 많은 사실이 이론적으로 밝혀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초끈이론이나 M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4차원 시공간은 그보다 훨씬 큰 10차원이나 11차원 우주의 일부일 뿐이고 전체우주에는 평행우주가 많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4차원 이상의 높은 차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아무런 실험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초끈이론이나 M이론이 모든 비밀을 다 밝혀줄지, 아니면 또다른 새로운 이론이 등장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현대과학은 영화에서나 등장하던 평행우주가 실제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지고 시간이 조건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사실을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하는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 후에는 누구나 또다른 내가 살고 있는 평행우주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어쩌면 저 많은 평행우주들 중 어딘가에는 이미 모든 비밀을 밝혀낸 사람들이 다른 우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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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환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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