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스키 감독은 몇년 간 변변한 히트작을 내놓지 못한 삼류 감독이다. 과거에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오를 때만 해도 배우들에게 깐깐한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유명한 영화 배우의 출연 여부가 영화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즘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는지 까다로운 여배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주머니 가득 사탕을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자신에 대한 대우가 엉망이라는 이유로 출연을 거부하는 건방진 여배우 앞에서는 헛수고로 돌아간다. 감독이 배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고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했던 타란스키 감독은 퇴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타란스키가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그의 영화에 감동 받았던 옛날 팬이 그에게 한장의 CD를 유산으로 남겼으니, 그 안에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불가능한, 이 세상 어느 영화 배우보다 완벽한 여배우 시몬이 잠들어 있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시몬’의 줄거리다. 시몬이 제작에 돌입됐을 때 여배우를 ‘파이널 판타지’와 같은 3D 그래픽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영화의 포스터와 홍보물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혼란을 겪었다. 홍보 자료에 소개된 시몬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기엔 왠지 모를 인공적인 냄새가 풍겼으며, 3D 그래픽으로 단정 짓기엔 너무 완벽해보였다. 홍보물 어디에도 시몬역을 맡은 여배우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영화가 개봉되면서 시몬은 캐나다 출신의 모델인 레이첼 로버츠로 밝혀졌지만, 그녀는 시몬을 촬영하면서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가족들에게조차 자신이 시몬의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비밀로 지킨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끝난 후 자막으로 올라가는 등장 인물 이름에서도 그녀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비디오에는 그녀의 이름이 삽입될 예정이라고 하지만, 영화 속의 타란스키 감독은 사이버 배우를 이용해 관객들을 속였고, 시몬을 제작한 앤드류 니콜 감독은 진짜 배우를 이용해 관객들을 속인 셈이다.
당당한 영화배우 3D 캐릭터
로봇처럼 딱딱하고 인공적이었던 초기의 3D 캐릭터는 신기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의 대상일뿐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등장 인물로 캐스팅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기술은 진화하는 법. 네모나게 각이 진 폴리곤은 점점 작아져 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크기로 줄어들었고 뚝뚝 끊어지던 동작은 배우의 동작을 모방한 모션 캡쳐 기법으로 인해 인간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매핑과 랜더링 기술의 발달은 싸구려 플라스틱 같던 3D 캐릭터의 표면을 사람과 똑같은 질감의 피부로 바꿔줬다.
더 나아가 최근의 3D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머리칼도 갖게 됐다. 파이널 판타지는 사이버 배우들의 모공과 미세한 솜털까지 표현했으며 ‘몬스터 주식회사’는 헤어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털 복숭이 괴물 셜리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푸른 털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과거 3D 캐릭터들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조연은 물론 엑스트라 배역도 얻을 수 없었다. ‘미녀와 야수’에서 샹젤리에, ‘타잔’의 나뭇가지 등은 한낮 배경에 만족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과 함께 3D 캐릭터들은 당당한 주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 ‘슈렉’‘몬스터 주식회사’의 셜리, ‘아이스 에이지’의 동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때 훈련시킨 곰이라는 주장과 사람이 곰의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코카콜라의 북극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3D 캐릭터들은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과거 ‘ET’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에선 인형을 뒤집어 쓴 배우들이 비인간형 등장 인물의 역할을 소화했다. 그러나 요즘은 3D 캐릭터들이 비인간형 등장 인물의 역할을 맡고 있다. 스타워즈의 자자 빙크스와 ‘반지의 제왕’의 골룸, ‘해리 포터’의 도비 등이 대표적 예다. 영화 속의 3D 캐릭터들은 특수 효과를 위한 장식의 수준을 넘어 당당한 조연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3D 캐릭터들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정한 영화 배우가 되는 것이다. 보통의 영화 배우처럼 한편의 영화가 아닌 여러 편의 영화에 각기 다른 역으로 출연해 배우로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배우라는, 그리고 스타라는 생명력을 얻은 3D 캐릭터를 다룬 영화가 바로 시몬이다. 시몬은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복잡한 연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중 음악에서는 이미 사이버 스타들의 활동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는 사이버 가수 아담이 있었고, 일본에는 쿄코와 테라이 유키 같은 사이버 가수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몬의 눈물
‘경고합니다. 모니터에 너무 접근하지 마세요.’
시몬의 CD를 실행시킬 때 화면에 나타나는 경고문이다. 이 경고문은 시몬에게 놀라지 말라는 충고인 동시에 시몬의 매력에 빠져들지 말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사이버 배우 시몬은 어떤 매력을 갖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시몬의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너무나도 완벽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오드리 햅번의 청순함과 마릴린 먼로의 관능미, 연기력은 물론이고 스턴트까지 가능한 여배우를 사이버가 아닌 이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퇴출 위기에 몰렸던 타란스키 감독에게 있어 시몬은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사이버 배우는 비단 영화 감독에게만 꿈 같은 얘기가 아니다. 게임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툼 레이더의 여주인공 라라 크로포트는 게임을 통해 수많은 팬을 확보한 후 영화계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한편의 영화로 최고의 스타가 돼버린 시몬. 베일에 감춰진 그녀는 첫 인터뷰에서 맑게 웃는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을 흘린다. 타란스키 감독의 키보드 조작 실수로 인해 흘러내린 이 눈물은, 과도한 반짝이 효과로 인해 약간의 무안함을 불러 일으켰으나 신비로운 시몬을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장식품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사이버 배우의 표정 연기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영화가 아닌 ‘귀무자’라는 플레이스테이션2(PS2)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귀무자는 캐릭터의 사실적인 표정 연기를 구현하기 위해 대만 출신의 영화 배우 금성무의 얼굴을 데드 마스크로 본을 떠 3D 그래픽으로 모델링한 후, 금성무의 표정 연기를 모션 캡처 받아 게임 속의 캐릭터에 입력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사이버 배우를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첨단기술이 사이버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일까. 파이널 판타지의 아키 로스 역시 조금은 어색하지만 보통의 영화 배우 못지 않은 표정 연기를 보여줬다. 동서양을 합친 듯한 아름다운 외모와 머리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 정교한 피부의 묘사.
그러나 파이널 판타지는 흥행에 실패했다. 무언가 빠져있다. 무언가가 빠져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파이널 판타지는 ‘재미’가 없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첨단기술이 아니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긴장감 있는 구성, 배우의 호소력 있는 연기가 영화를 이루는 요소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무시한채 이만큼 대단한 첨단기술을 구현했으니 관객들이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은 영화 제작자들의 오만과 착각이다. 수십억을 들여 몇달 동안 개발했다는 아키 로스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은 그것을 구현한 프로그래머와 그의 어머니만이 유심히 쳐다봤을 것이다. 엑스트라로 영화에 데뷔하는 아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어머니처럼 말이다.
사이버 배우, 사이버 영화가 성공하려면 첨단기술이 아닌 영화 자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타란스키 감독의 사이버 배우 시몬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타란스키 감독은 테크놀러지를 앞세워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에 사이버 배우를 출연시켰을 뿐이다.
이젠 죽지도 않네
‘한 사람보다 10만명을 속이는 것이 더 쉽다.’
시몬의 라이브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던 타란스키 감독의 말이다. 이 말은 군중 심리와 관련된 매스미디어의 폐해를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텔레비전에는 팬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들이 나온다. 그러나 팬들 중 스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스타와 대화라도 한번 나눠본 사람은? 대부분의 팬들은 매스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스타의 모습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 인물의 성격을 마치 스타의 성격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우리가 쫓는 것은 스타의 그림자다. 우리는 스타의 거짓과 진실을 판단할 수 없게 돼 버렸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시몬에 열광하는 수많은 팬들처럼 말이다.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고 덩치를 부풀려 나가다가 이내 감당할 수 없는 괴물로 자라나게 된다. 타란스키 감독은 결국 시몬을 죽이기로 결심하는데, 더이상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됐겠지만 자신의 영화가 아닌 시몬에 열광하는 대중을 바라보며 영화 감독으로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시몬은 죽지 않는다. 이미 죽이기에는 공룡처럼 덩치가 커진 것이다. 시몬의 살해죄로 유치장에 갇힌 타란스키 감독은 TV인터뷰에 등장해 건강을 과시하는 시몬을 바라보며 영화 최고의 명대사를 말한다. “이젠 죽지도 않네.”
스타라는 것은 매스미디어와 대중이 함께 만들어낸 존재다.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약간의 인기를 갖고 영화 감독 앞에서 우쭐대는 배우들은 시몬의 니콜라처럼 긴장해야 할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몬에게 언제 자신의 인기를 빼앗겨 버릴지 모르니 말이다. 만들어지는 스타와 기꺼이 속아주는 대중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것일까?
명배우의 동작과 목소리 가져
사이버 배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본전은 건졌다고 ‘우기는’ 파이널 판타지는 사이버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다. 현재의 사이버 배우들은 파이널 판타지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다. 본(골격)과 폴리곤(면)으로 이루어진 3D 그래픽을 사용하며 자연스러운 인체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액션 배우의 모션 캡처를 사용한다. 목소리는 성우가 대신한다. 장점은 완벽한 외모의 배우를 싼 값에 출연시킬 수 있으며 특수 효과의 사용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은 배우들의 연기력이 떨어지며 감정 표현이 어색하다. 그리고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파이널 판타지가 개봉되던 2001년만 해도 영화의 제작사는 주인공 아키 로스를 다른 후속작에 출연시켜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키워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흥행의 실패 이후 그녀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버 가수 아담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바이러스에게 공격 당했거나 ‘군대에 갔다’는 소문도 있다.
사이버 배우의 다음 단계는 시몬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만들어지는 시스템이다. 이런 사이버 배우는 개성있는 목소리를 갖고 있어 성우가 필요하지 않으며, 연기에 필요한 동작은 모션 캡처를 받을 필요 없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돼 있는 것을 가져다 쓰면 된다. 머지않아 아마추어 감독들은 영화 배우를 섭외하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모으는 대신 인터넷에서 사이버 배우들을 다운로드 받아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산업에 비해 발전 속도가 빠른 컴퓨터 게임에서는 시몬과 같은 시스템을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다. 해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축구 게임은 전 세계 유명 축구 선수들의 기량과 경기 습관, 골 세레모니 등을 데이터로 갖고 있으며, 게이머는 자신의 플레이를 녹화해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사이버 배우를 이용한 아마추어 영화가 본격화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플래시 에니메이션이 짧은 시간에 인터넷 공간을 점령한 것처럼 사이버 배우를 이용한 영화는 엄청난 파급 효과로 대중화될 것이다.
궁극적인 사이버 배우는 인간처럼 학습하고 사고할 수 있는 인공 지능을 갖춘 시스템으로 전망된다. 인공 지능을 갖는 사이버 배우는 자신만의 개성과 연기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이버 스타에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바이센테니얼맨’의 가정부 로봇 앤드류에게 감동 받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사고하는 사이버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그의 일상에 열광하며 그의 삶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배우의 인공 지능은 도덕과 윤리라는 측면에서 혹독한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시몬의 의문점들
■ 시몬의 실행 파일과 데이터들이 들어있는 CD를 실행시키면 화면에 ‘시뮬레이션 원’(Simulation one)- 이 글자를 줄인 것이 사이버 배우 시몬(simone)이다-이라는 글자가 뜨며 시몬의 얼굴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잠깐. 놀랍게도 시몬의 얼굴은 내부가 텅 빈 피부만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픽이기 때문에 뼈가 필요 없다고? 그러나 자연스러운 표정은 골격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법. 10만명을 속이려면 인간과 똑같은 골격은 필수다. 하다 못해 요즘 개발되는 3D 게임 속의 캐릭터조차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 골격을 갖고 있다.
■ 컴퓨터를 다루지 못했던 타란스키 감독은 6개월만에 시몬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른다. 그 비결이 뭘까?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타란스키 감독이 컴퓨터를 모르는 영화 감독이었기에 완벽한 사이버 배우 시몬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3D 맥스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형체와 질감을 창조하는 아티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이 아닌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다. 아티스트에게있어 컴퓨터는 기계가 아닌 작업 도구이자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리고 장난감의 작동법을 배우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쉽게 말해 아티스트에게 있어 진흙을 주물러 인체를 빚는 일이나 3D 맥스를 이용해 인체를 모델링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시몬이라는 사이버 영화 배우 프로그램은 컴퓨터 천재가 아닌 영화 감독의 손에서 빛을 발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