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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을 사랑한 복제동물의 아버지 황우석

농촌에서 태어난 황우석 교수에게 소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 가까운 존재였다.

황 교수는 농민이었던 부모를 도와 어렸을 때부터 소를 돌봤다. 소를 벗삼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소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기 시작했다. 소에 대한 사랑은 철이 들면서 경외심으로까지 커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소는 그의 운명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이 말을 하며 황 교수는 자신의 이름도 누런 소 즉 ‘황우’ 아니냐며 웃었다).

황 교수와 소의 평생 인연은 중학교 때 일어난 한 사건으로 더욱 굳어졌다.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대전)에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여름방학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마중온 어머니의 발목을 보니 새빨갰어요. 소에 먹일 꼴을 베다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은 것이지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황 교수는 그날 일기를 쓰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게 소를 키우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절 생각한 직업이 수의사나 동물농장 주인이었다.

고3때 담임 선생님은 공부를 잘하던 그에게 의대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없이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수의학은 국내에서 황무지나 다름없었지만, 어머니와 소에 대한 사랑이 황 교수를 그리로 이끌었다.

대학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소의 몸 상태를 제대로 알려면 항문에다 손을 넣어 내장을 검사하는 ‘직장 검사’를 잘해야 한다. 황 교수는 지금까지 직장 검사를 수십만번은 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소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순탄하던 인생에 갑자기 먹구름이 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에 교수로 채용될 예정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대학내 갈등으로 그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실망한 황 교수는 일본 훗카이도대에 연구원으로 떠났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았다. 그는 일본에서 인공 수정 기술을 익혔다. 이 경험이 훗날 복제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만일 그때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면 황 교수는 지금쯤 평범한 수의사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는 1986년 귀국해 현재까지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는 생명과학의 보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 사랑하다 과학자 됐어요”

황 교수는 1999년 2월 국내 최초로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키면서 단숨에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다. 1997년 영국 로슬린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복제양 ‘돌리’가 태어나면서 당시 복제동물은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황교수는 당시 영국, 일본, 미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복제 동물을 출산시켰다.

황 교수의 연구는 당시 거의 모든 신문의 1면 머릿기사와 방송의 첫 기사로 장식됐다. 황 교수가 그날 기사를 쓴 기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데 방송을 본 식당 주인이 황 교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할 정도였다.

이후 황 교수는 한우 ‘진이’ 등 다른 복제소를 계속 출산시켰고, 최근에는 유전자를 바꾼 복제 돼지를 선보였다(아쉽게도 태어난지 이틀만에 죽었다). 그는 현재 장기이식용 복제 돼지, 백두산 호랑이 복제 등을 연구하며 한국의 복제 동물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이 복제 동물 연구에서 세계에 뒤쳐지지 않는 것도 상당 부분 황 교수의 노력 덕분이다.

지금이야 ‘동물 복제’하면 황 교수가 첫손에 꼽히고 이 분야의 연구에 대한 지원도 많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교수는 “복제소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많이 힘들고 앞이 불투명했다”고 털어놨다. 연구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결과가 나올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학생들과 함께 죽자살자 매달렸다.

한때 그의 실험실에서는 ‘무박삼일’ 실험이 잦았다. 이틀 밤을 안자고 실험에 매달리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중간에 쓰러졌다. 그럴 때면 링거를 맞고 잠시 쉬다가 다시 실험에 매달렸다. 다행히 그 학생들이 현재 국내외의 좋은 자리로 많이 진출했고, 우수한 성과로 언론을 장식한 이들도 있다.

영롱이가 태어났을 때 황 교수는 어미소에서 영롱이를 받아내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했다. 몇 년 동안의 고생 끝에 성공한 복제 동물 탄생이 너무나 기뻐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최근 복제 돼지가 태어났을 때에도 황 교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돼지가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 어린아이처럼 “살았다, 살았어”라고 소리치며 새끼 돼지를 껴안았다.
 

황우석 교수 실험실은 새벽부터 문을 연다. 황교수 는 지금도 누구보다 열심히 실험에 몰두한다


99년 국내 첫 동물복제 성공

그의 실험실은 ‘고생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황 교수의 실험실은 새벽 6시면 잠에서 깬다. 황 교수와 다른 교수 3명은 매일 6시 30분께 회의를 연다. 본격적인 실험은 7시에 시작된다. 실험에 앞서 황 교수는 매일 4시 30분에는 집에서 나와 1시간 가량 목욕과 단전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학교에 온다.

학생들도 여간 부지런하지 않다. 새벽부터 시작해 하루에 세번씩 도축장을 들락거린다. 황 교수의 제자들만큼 도축장과 친한 학생들도 드물다. 오전 11시쯤 되면 새벽 도축장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무언가 잔뜩 실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수백개가 넘는 소와 돼지의 난소들이다.

황 교수와 학생들은 바로 난소에 주사기를 꽂아 싱싱한 난자를 뽑는다. 조금이라도 빨리 건강한 난자를 빼내야 복제 실험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황 교수와 학생들은 거의 말도 하지 않는다. 다 끝나고 나면 어느덧 점심 시간이 훌쩍 넘는다. 황 교수는 대개 9시쯤 학교를 떠나고, 12시를 넘어 잠자리에 든다.

주말? 황 교수에게는 평일보다 더 바쁠 때다. 경기, 충북 등에 있는 농장들을 방문해 소와 돼지들이 잘 자라는지 둘러본다. 복제돼지나 복제소를 임신하고 있는 대리모들이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일이 취미”라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황 교수는 결혼하고 가족과 한번도 놀러간 적이 없다고 했다. 올해 처음으로 부인이 “우리도 물놀이 한번 가자”고 해 무척 미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도 가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도 당분간 힘들 것 같다고 털어놨다.

“너무 연구에만 매달리시는 것 아닌가요?”

황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생명과학은 과학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학문입니다. 부모 형제가 죽어 가는데 비가 온다고, 몸이 좀 힘들다고 연구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과학의 보람은 돈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소가 설 자리 만들자

황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동물 복제 기술이 우리 소에 새로운 힘을 주기를 기대했다.

“소는 5천년 동안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한 동물입니다. 솔직히 우리 축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원유값이 비싼 곳이 한국입니다. 그러나 생명과학을 이용하면 다양한 기능성 우유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외국 우유 보다 우리 우유가 더 경쟁력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소가 설 자리가 다시 생깁니다.”

황 교수는 복제소로 유명해지기 전만 해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농촌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소를 돌봤다. 몇년 전 기자가 황 교수를 만났을 때 새로 산 그의 차는 소똥 냄새로 가득했다. 그는 공기정화기를 달아도 효과가 없다며 웃었다. 그를 잘 아는 농민들은 황 교수를 ‘소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소와 농민에 대한 황 교수의 사랑은 요즘에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향해 있다.

그는 한달 전 유전자변형 복제돼지가 태어났을 때 기자에게 “장기이식용 복제돼지가 7-10년 정도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도 다른 과학자들보다 조금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만났을 때에는 “더 빨리 해야겠다”며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이식용 돼지 꼭 개발할 것

복제돼지 출산을 발표한 뒤 서울의대에서 공동 연구 요청이 왔단다. 그곳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의 실태를 들으니 쉬고 있을 틈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황 교수 스스로 죽을 뻔한 병(병명을 밝히지 않았다)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어 환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 애틋하다.

그는 매일 하루에 네번씩 혼자서 사색을 한다. 자신 밑에 있는 연구원과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위해서다. 황 교수는 그들에게 ‘기’를 주면서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고 말했다.

물론 황 교수는 연구도 열심이다. 그는 지금도 복제돼지와 호랑이에 대한 인공수정은 자신이 직접 다 하고 있다.

워낙 어려운 작업이라 노련한 자신이 해야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제소에 대한 인공수정도 절반은 직접 한다.

“얼마전 집안도 훌륭하고 성적도 뛰어난 중학생 4명이 실험실을 찾아왔어요. 실험실에 오기 전에는 법관이나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었어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생명과학자의 보람에 대해 이야기해 줬더니 나중에 모두 생명과학자가 되겠다고 이메일을 보내왔어요. 이공계 기피를 극복하려면 과학자들에 대한 대우도 개선해야 하고, 장학금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과학의 의미와 보람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과학의 참모습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걸어온 길

1953년 충남 부여 출생
1977년 서울대 수의학과 졸업
1982년 서울대 임상수의학 박사
1984-86년 일본 훗카이도대 객원연구원
1986년- 현재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1997년 서울대 동물병원장 역임
1999년 국내 첫 복제소 ‘영롱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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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이만홍
  • 김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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