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영어발음 때문에 혀 수술까지 한다는 얘기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영어에 민감한지 보여준다. 정말 미국인처럼 발음을 잘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최근 서울의 일부 부모들이 자녀의 영어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서 혀의 아래 부분을 수술해준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내의 신문방송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한 이야기다. 혀밑 수술을 통해서라도 영어의 발음을 잘하게 하려는 부모들의 도를 지나친 영어학습열 때문에 서울의 유명병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보도는 한마디로 우리를 민망하고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정말 혀를 수술하면 영어발음이 잘나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전혀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나이 들어 영어를 습득한 사람들 중에도 영어를 본토인 같이 잘하는 경우가 있다. 또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사용국가에 가서 자라고 교육을 받고 온 사람들은 본토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어발음을 한다. 오히려 영어발음이 스며든 우리말을 하는 일이 많다.
혀밑 수술은 발음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수술을 잘못하면 혀끝의 탄력이 떨어져서 정상적인 발음 습득에 장애를 받을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영어발음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발음의 과학을 통해 알아보자.
신비로운 발음기관 혀
음성학(Phonetics)은 언어학의 한 분야로서 언어의 발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이와 입술, 혀, 목젖, 성대, 인두, 비강 같은 발음기관을 어떻게 움직여서 어떤 소리를 어떻게 낼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때문에 소리의 생성부터 음파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된다.
발음기관 중 혀는 그 움직임과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둥글거나 길게 모양을 바꾸고, 전진 또는 후퇴하거나 상하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발음기관이다. 혀에 움직임을 줄 때마다 새로운 소리를 발음할 수 있는데, 인간의 언어에서 쓰이는 소리의 90%는 혀의 동작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아, 이, 우, 에, 오, 어, 으, 애’ 같은 우리말의 모음은 모두 혀의 동작으로 구별돼 발음되며, 영어에서 쓰이는 12개의 단순모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입안에서 생성되는 [t, d, k. g, s, z, n, r, l]와 같은 자음 역시 혀의 정교한 동작이 없으면 날 수 없는 소리이다. 결국 ‘입술소리’ [b, p, m]와 ‘입술-이 소리’ [f, v]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발음이 혀의 동작에 달려있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예부터 말을 함부로 하거나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는 사람은 혀가 문제라고 했다. 실제로 영어의 tongue이나 프랑스 말의 langue는 원래 혀를 뜻하는 동시에 말, 즉 언어를 의미하고 있다. 영어의 language도 혀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사람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영어발음을 하기 힘든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 외로 간단하다.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소리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소리를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정확하게 판별할 수 없기 때문에 발음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영어에서 bet과 bat은 전혀 다른 발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이 두소리의 차이를 판별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다. 왜 bet과 bat은 미국 사람에게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귀에서는 똑같은 소리로 들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이 bet과 bat을 구별해 소리를 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듣는 훈련도 없기 때문이다. 상당히 민감해보이는 인간의 귀이지만 언어체계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달, 딸, 탈이란 세 단어를 들려주었을 때, 발음을 구별하지 못해 의미를 혼동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영어를 쓰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세계적인 음성학자인 영국 런던대의 모 교수조차 ‘딸’을 ‘달’과 ‘탈’과 구별해 듣지 못한다. 영어라는 언어에는 딸에 상응하는 발음이 없기 때문에 발음을 해본 적이 없고 따라서 정확히 판별해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모든 소리 가능
문제를 정리해 보자. 영어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발음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영어발음이 잘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발음을 해보지 않았던 것, 즉 우리말 체계에 있지 않은 것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인위적으로라도 혀의 동작을 조절하면서 영어에만 있는 발음을 해봄으로써 귀가 판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영어발음을 익히기 위해서는 혀의 조음 동작부터 알아야 한다.
음성학적으로 세상의 어떤 언어든 혀를 움직여 발음하지 못할 소리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까다로운 영어발음 소리는 [r]과 [l]이다. 영어의 [l]소리는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혀의 양옆을 터서 그 사이로 숨이 나가면서 나는 혀옆소리이고, [r]은 혀끝을 윗잇몸 뒤쪽으로 약간 말아 올린 채 내는 소리이다. 이 방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영어의 [r]과 [l]을 발음할 수 있다. 혀밑 수술의 목적은 이 두소리를 잘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혀끝을 위로 약간 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음을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말의 발음을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r]과 [l]에 해당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예를 들면, ‘아리랑’이라는 말에서는 ‘ㄹ’이 모두 영어의 [r]에 가까운 소리로 나며, ‘발달’이란 말의 ‘ㄹ’은 모두 [l]에 해당하는 소리로 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이 두가지 ‘ㄹ’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두 소리가 낱말의 첫소리로서 발음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는 rain/lane과 같이 [r]과 [l]이 같은 첫 자리에 나타나서 대립하기 때문에 뜻을 구별시키지만 우리말에서는 이런 대립이 없다. 다만 모음 사이에서는 ‘ㄹ’이 [r]로 나고 낱말이나 음절 끝에서는 [l]로 난다. 그러니 두가지 소리가 다 발음되기는 하나, 소리나는 자리가 다르고 쓰임이 달라서 뜻을 구분하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음운대립이 없어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사람의 경우에는 일본어에서 [l] 발음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l/r]을 구별하고 발음하는 능력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부족하다.
길은 있지만 쉽지 않다
영어발음을 정확하게 내는 방법을 익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어도 미국인처럼 영어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영어발음을 정확히 할 수 있으면서도 모국어 습관 때문에 생소한 발음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말을 하면서 혀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일일이 의식하기는 너무 힘들다.
우리말을 할 때 혀가 자유자재로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혀가 길을 익혔기 때문이다. 영어발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어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혀가 움직이는 새로운 길을 익히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영어의 음성체계를 면밀하게 대조해 한국인에게 어려움이 큰 항목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필자는 대학과 학회, 방송에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의 발음에 관한 이론과 실기 지도를 많이 해온 바 있다. 지난 2월에는 초중고 영어 담당 교사를 위해 표준 영어발음연수를 실시했다. 그러나 발음 훈련을 통해 제대로 된 발음을 익힌 후에도 다시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혀가 새로운 길을 완전히 익히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서울말을 배우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영어를 잘못 배운 경우가 많다. 말은 입으로 소리내 귀로 듣는 소리말과, 눈으로 보는 글자 중심의 글말로 나뉜다. 언어가 사용되는 정도 등 여러 면을 고려하면 소리말을 배운 후 글말을 배워야 순서가 맞고 습득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 소리말을 제쳐두고 글말에만 역점을 둬 배워왔다.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조차도 똑같은 교육을 받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리말에 힘쓸 여유와 환경을 주지 않는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 속에서 학생과 교사가 똑같은 피해자가 된 셈이다.
오늘날 영어 열풍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영어 교육에서 발음은 가장 중요한 난제로 꼽히고 있다. 영어발음을 제대로 하는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발음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듣기 훈련을 하고 나서 발음훈련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