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여름. 컴퓨터는 무려 40-60℃의 고열로 타오르는 심장을 품고도 몸 안쪽에 매달린 소형 선풍기 두어개 만으로 잘도 버텼다. 기계란 우리가 더 많은 출력을 바라면 바랄 수록 다량의 에너지를 빨아 들여 열이라는 찌꺼기를 뱉어낸다. 근래에는 CPU 이외에 그래픽칩, 심지어 하드디스크까지도 열 받는다며 보채댄다.
이들 구성원들이 짜증 내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이들을 시원하게 해줘야 하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PC 활용의 의무가 돼 버렸다. 기계의 열을 그대로 방관해보자. 몇분 못가서 컴퓨터는 횡설수설하거나 조용히 뻗어 버린다.
● ● 기계가 으레 택하는 가장 손쉬운 피서법은 ‘공냉’이다. 천막 뿐인 영세 공업소에 커다란 선풍기가 휭휭 돌고 있는 풍경은 공냉의 간소함과 보편성을 일깨워준다. 냉각의 역사는 공냉의 타당성을 곳곳에서 설득력 있게 증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사막 전투에서 공냉식 엔진 전차를 이끄는 독일군은 수냉식 엔진 전차를 거느린 영국군을 이겼다. 전투 손상에 잘 견디고 튼튼한 공냉식 엔진이 한몫을 한 것이다. 오리지날 폭스바겐 비틀과 포르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공냉주의자들이었다. 마쓰다 스포차카의 로터리 엔진은 오늘날까지도 공냉의 핏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 ● 그러나 공냉의 가슴 뜨거워지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날 공냉 PC의 자화상은 한심스럽다. 냉각팬에 낀 시커먼 먼지 때는 기판 위에 죽어있는 바퀴벌레 이상으로 혐오스럽다. 무엇보다도 공냉의 가장 큰, 그리고 뜻밖의 폐해는 바로 소음이다. 고요한 밤 적막을 깨는 ‘윙’하는 컴퓨터 특유의 냉각팬 소음. 기계는 자기 좀 시원하겠다고 사람들의 귀를 괴롭히고 있다. 번잡해서 후보에 올라보지도 못한 수냉을 일반 PC에서 주목받게 한 그 일등 공신은 소음인 것이다.
● ● 일본 히타찌에서 제안한 수냉 노트북은 부동액을 섞은 물을 순환시켜, CPU 등에서 발생하는 열을 방출시킨다. 물은 컴퓨터 본체에 내장한 두께 15mm의 펌프에 의해 지름 3mm의 알루미늄관을 분당 1mL의 속도로 순환한다.
액정 패널 뒤에는 자동차처럼 ‘라디에이터’(radiator)가 배치되고, 알루미늄 파이프는 노트북 구석구석을 돌아 체내의 열을 흡수한다. 냉각수를 순환시키는 펌프의 소비전력은 냉각팬이 소비하는 전력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약 2W이다. 상용화의 물꼬가 트인 것이다.
● ● 수냉 PC에서 소음은 공냉식의 30%인 약 10dB까지 줄어든다. 여기에 근래의 하드디스크들은 유체 베어링 덕분에 하드디스크 특유의 긁어대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냉각팬의 소음마저 사라진 지금,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컴퓨팅의 리듬이 돼 버린다. 이제는 수냉이 된 뉴비틀과 포르쉐의 신형 911 운전자라면 가슴을 울리던 공냉 엔진의 고동을 그리워할지는 모르나, 컴퓨터 팬의 회전음에 특별한 추억 따위 있을 리 없는 우리들에게 수냉으로 포장된 근대성은 그저 반가운 일이다.
● ● 사실 냉각 마니아의 꿈과 열정은 이보다 더 웅장하다. 냉장고, 에어컨에나 쓰는 냉매와 컴프레서를 이용해 빙점 이하까지 냉각시켜 버리는 초냉각 시스템들은 이미 3-4년 전부터 CPU의 성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려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아이템이다. 프레온가스로 CPU를 완전 차폐해 컴퓨터를 냉장고화하는 기가 막힌 피서법인 것이다. 그런데 수냉이든 기화든 이러한 첨단 냉각장치에도 불안함은 있다. 파이프가 터져 물이라도 새는 날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 ● 또 다른 대안은 없을까. 선풍기마저 꺼진 열대야, 우리를 잠재우던 대나무 돗자리의 시원함을 생각나게 하는 제품이 있다. 기계를 위한 돗자리, ‘방열 매트’가 그것이다. 열을 빨리 흡수하고 금방 식는 성질을 가진 특수 물질을 채운 이 패드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열 전도율이 높은 알루미늄 필름이 열을 흡수해 패드 속 특수물질로 전달한다. 바닥 온도가 48℃(최고 70℃까지도 올라간다)인 노트북이 5분 안에 30℃ 이하로 냉각된다. CPU에 붙어 있던 시원해 보이던 철판방석 ‘히트싱크’를 컴퓨터 전체로 확장한 셈이다.
● ● 그러나 잠시 원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이렇게 더위를 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애초에 더위를 잘 타는 체질로 태어나야만 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열 받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열을 내야하는 것인지 테크놀로지 스스로 자각해 보는 것이다.
● ● 마치 항온 동물이 적정 체온을 유지하 듯, 열을 내는 부품을 분산하거나 진짜 더워서 참지 못할 경우에만 팬을 돌리면 된다. 군살을 뺀 균형 있는 삶을 영위하자는 발상은 모름지기 모든 움직이는 것들의 이야기다. 냉각수를 갈러 PC샵에 들려야하는 나날은 어느 누구도 바라는 미래가 아닐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