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닷컴버블’이라는 시기가 있었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던 인터넷이 일반인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PC통신으로 퍼지던 시기. 수많은 연결을 통해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되던 시기다. 마샬 맥루한이 말했던 ‘지구촌’이 처음 실현됐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폭발했다. 당연히 버블이 발생했다.
당시 기술과 네트워크의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 도전과 탐욕은 계속해서 자본과 뒤얽히며 새로운 것들을 등장시켰다. 현재 활성화된 비즈니스 모델이 대부분 이때 탄생했다. PC를 중심으로 기업들이 형성한 시장은 어느 정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닷컴버블 당시 개발자들의 몸값은 폭등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었고 통신사의 카르텔이 굳건했던 시대다. 닷컴버블은 환상으로 끝났다. 수많은 회사가 버블과 함께 사라졌다.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디지털 혁명이 이어지는 것은 다음 세대로 미뤄졌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같은 소수의 소프트웨어 거인이 시장을 지배했다. 다른 기업들은 거인의 하청업체로 전락했다. 업계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가장 말단이었던 중소기업 개발자들은 낮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엄청나게 야근했다. 몸값 역시 하락했고 3D업종으로 전락했다.
스마트폰이 이끈 개발자 전성시대
새로운 시대는 손 안에 들어가는 작은 기기로부터 시작됐다. 2007년 애플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시장은 완전히 변한다. 과거엔 통신사라는 거대기업의 허락 없이는 휴대폰에 들어가는 서비스나 기능을 만들 수 없었다. 스마트폰의 ‘스토어’는 통신사와 휴대폰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카르텔을 완전히 부쉈다. 잘 만든 애플리케이션(앱) 하나가 거대 기업이 될 수도 있는, 진정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네이버나 카카오 등 새로 등장한 IT기업이 기존 대기업을 위력적으로 넘어서기 시작했다. 정해진 수순으로 대기업의 하청업 정도로 인식되던 개발자의 지위도 달라졌다. 아이디어와 기민한 실력을 가진 스타트업이 활약하면서 초봉 6000만 원도 현실이 됐다.
특히 코로나19로 비대면 서비스가 급격히 늘면서 개발자 수요가 늘었다. 개발자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됐다. 개발툴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신입 개발자라도 성실하기만 하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그들의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이 많아졌다.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는 회사 설립 이후 2년 정도가 지나면 옥석이 가려진다는 특징이 있다. 개발 초기에는 개발 속도와 비즈니스 구현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개발에 가속도가 붙는 시점에서는 안정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회사가 안정되고 대규모 개발조직이 운영되는 시점이 되면 구루(스승)급 개발자도 덩달아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게 된다. 판교 중심의 ‘네카라쿠배당토’의 연봉 2억 개발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닷컴버블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현재 치솟는 개발자의 몸값이 거품이라는 시각도 있다. 과거 닷컴버블 때처럼 개발자 처우가 급변할 수 있다는 우려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이 잦아들고 투자가 급감하면서, 개발자 수요도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다. 개발자 몸값이 폭락할 가능성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과도기적 인터넷 기술에 너무 많은 것을 융합했던 닷컴버블 시절과 지금은 분명 다르다. 당시 버블의 대표 사례로 꼽혔던 ‘부닷컴’ 의 경우, 너무 공격적으로 빠르게 자금을 소진한 것과 인터넷 속도 등 기술적인 이슈를 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물론 이 경험을 토대로 아마존이라는 걸출한 쇼핑몰이 탄생했으니 ‘실패’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과거 닷컴버블 시대의 중심에는 개발자가 없었다. 환상만을 이야기하던 몽상가들이 기술적 배경 없이 비즈니스를 기획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개발 경험이 풍부한 젊은 세대, 현장 경험이 많은 시니어 개발자들이 있고, 모든 개인 사용자들은 스마트폰을 직접 사용하는 초연결의 사회다. 닷컴버블 시대와는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악재는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선진국에서 풀었던 자금은 인플레이션을 불렀다. 금리는 오르고 증시는 하락하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세계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기름, 식량 등 수많은 자원을 효과적으로 공급하고 관리하기 위해 IT 기술은 더 많은 영역으로 침투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IT 중심의 투자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반도체나 자동차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로 효율을 증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의사보다 높은 연봉도 이상하지 않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숫자는 지금도 부족하고, 앞으로 더 부족해질 거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기존 시스템이 만든 학위나 전문가 시스템의 인증 방식을 넘어선 상태다. 마치 과거 외과의사가 이발사 같은 전문기능공 취급을 받았던 것과도 유사하다. 마취와 살균, X선 등 과학 발전이 이들을 현재 의사의 범주에 들어가게 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도 단순히 화면을 만드는 코더에서 시작했지만, 과학적 방법론과 인공지능(AI)을 다루는 시대가 오면서, 지식 그 자체를 다루는 숙련된 전문가 집단으로 진화했다.
소프트웨어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의사 면허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숙련된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사람을 대신해 외과 수술을 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것도 가능해졌다. 특히 약을 활용하는 데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 의료전문가의 역량을 넘어선 지 오래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의사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거나, 더 많이 인정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다.
컴퓨터학과 안 나온 개발자가 늘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컴퓨터공학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만 활용되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전공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는 자신이 가진 전문지식이나 경험 등에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을 적용해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비전문가 출신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늘고 있는 이유다.
현재 소프트웨어 시장은 인공지능처럼 미래의 가치를 증폭하는 기술에 집중돼 있지만,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연구도 필요하다. 소프트웨어 기술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엔지니어나 기술자들이 더 필요하다. 다만 이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개발자는 기업에서 부서를 옮기듯 회사를 넘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 스타트업 역시 어떤 개발자가 들어와도 빠르게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많은 스타트업이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고 공통적인 개발 환경을 갖추는 이유다.
사회는 앞으로 개발자를 더 많이 원할 거다. ‘개발자가 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 흰머리 개발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필자소개.
신현묵. ‘개발에 있어 형식에 얽매이는 행위야말로 삽질이다’라고 소프트웨어 개발을 한문장으로 정의하는 40대 흰머리 개발자. 온라인 게임 개발, 스타트업 개발자, 중견기업 CTO 등 다채로운 경험을 가진 20년 내공의 개발 전문가다. 저서로는 ‘백세코딩’이 있다.
※용어정리
닷컴버블 : 1995년부터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며, 빠르게 생겨난 IT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던 현상. 2001년부터 수많은 IT기업이 파산하며 주가가 다시 폭락했다.
네카라쿠배당토 :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뱅크의 줄임말로 국내 주요 IT기업을 이르는 신조어. 최근 공학 전공 대학생들에게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으로 꼽힌다.
부닷컴 : 세계 각국에 의류를 판매한다는 명목으로 1998년 설립된 부닷컴은 초기에 LVMH그룹, JP모건 등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았지만, 기술적 문제에 부딪혀 개설 6개월 만에 사이트를 폐쇄하고 파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