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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과 미생물 간의 싸움 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최신 유행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믹스’라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의 기준도 더이상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 부드러운 감성이나 냉철한 지성 같은 덕목이 아니다. 대신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특성이 혼합돼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이런 경향은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과학, 역사, 철학 등 거시적인 분류에서 자신의 영역을 고집하고, 과학 안에서도 다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으로 나눠진 분야에 따라 각기 제 갈 길을 걸었던 학문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학제간 연구가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의학, 과학과 역사,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광경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한 책들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미생물의 힘’‘전염병의 문화사’‘고통받는 몸의 역사’는 함께 읽어볼만한 책이다. 세균과 질병이 인류 역사와 문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3권의 책을 비교해서 읽어보자. “모든 학문은 통한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나쁜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름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먹는 요구르트와 치즈, 술 등의 식품을 만드는 것도 바로 이들 미생물이다.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주고,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며, 산업폐기물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 미생물의 작용 덕분이다. 또한 미생물을 이용한 생명공학 기술로 항생물질이 개발되고 있으며, 유전자 치료의 도구로도 미생물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미생물의 힘’은 75가지의 짧은 글을 통해 미생물의 특성과 행동, 그리고 인간 역사에 미친 미생물의 영향을 보여주는 책이다. 미생물에 대한 일반적인 과학상식뿐만 아니라, 미생물이 사회를 변화시킨 사례 등 역사나 문화와 관련된 풍부하고 다양한 얘깃거리가 실려있다.

‘미생물’(microbe)이란 너무 작아서 광학현미경 또는 전자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크기 0.1mm 이하의 생물을 말한다. 미생물은 지구에 있는 생명체 중 가장 작지만 큰 힘을 발휘한다. 한 예로 지구에서 가장 작은 세균의 무게는 1조분의 1그램에 불과하지만, 가장 큰 생명체인 무게 1억그램의 고래를 죽일 수도 있다. 이런 미생물의 존재가 처음 밝혀진 것은 결핵이나 콜레라 등의 원인균으로 미생물이 연구되면서부터다. 수세기에 걸쳐 유행한 천연두와 페스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콜레라와 에이즈까지, 미생물에 의한 재난으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기도 하고 인간의 역사가 뒤바뀌기도 했다.

실제로 1347년 유럽을 공습한 페스트는 4년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7천5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결과는 당시 사회와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스트균은 유럽 사회에서 의식주 확보를 놓고 다투던 인간들의 경쟁을 엄청나게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 인구 감소로 그때까지 쌓아온 부가 재분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됐으며, 이것은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발생하는 훌륭한 조건이 됐다. ‘미생물의 힘’에는 이와 같이 미생물 자체뿐만 아니라, 하나의 미생물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를 그 이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미생물은 34억6천5백만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아온 생명체로,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미생물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미생물들은 지구를 무대로 활동해왔다. 어쩌면 인간과 다른 생물들이 지구에서 사라진 뒤에도 미생물은 오랫동안 지구에 남아 또다른 생명체의 탄생과 멸망을 지켜볼지도 모를 일이다.

미생물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자’로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생물의 힘’의 저자 버나드 딕슨은 인류 최대한 적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미생물의 위대한 힘을 실험실 밖의 세계에서 찾아냄으로써,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미생물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전염병의 역사, 인류의 역사

‘미생물의 힘’은 때론 파괴적으로, 때론 긍정적으로 미생물이 인류 역사와 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책이라면, ‘전염병의 문화사’는 질병의 원인이 됐던 병원성 미생물과 의학의 역사에 중심을 둔 책이다. 이 책은 질병과 문화, 생태계와 의학, 그리고 질병의 역사와 인류 역사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도 ‘비잔틴과 몽골제국을 붕괴시킨 무서운 질병­나병과 결핵, 그리고 페스트’‘나폴레옹은 왜 러시아 정벌에 실패했는가’‘세균 사냥꾼 파스퇴르와 코흐의 등장’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라도 질병 그 자체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점에서 앞의 책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맹위를 떨쳤던 질병들이 어떻게 시작됐으며, 또 그 결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한마디로 인간과 병원성 미생물의 공존과 투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킨 홍역과 두창, 로마와 몽골제국을 강타한 흑사병, 러시아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전멸시킨 발진티푸스, 20세기초 전세계에서 2천만명을 대학살한 인플루엔자 등 병원성 미생물이 지닌 가공할 파괴력을 생물학적 연구 결과와 역사적 고증을 통해 밝혀준다.

사실 인류가 지구상에 정착한 이후 1만년이 넘는 기간동안 전염병은 전쟁이나 기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20세기에 이르러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건강과 장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해마다 여름이면 식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겨울이면 독감이 유행한다. 또한 뇌염과 출열혈, 에이즈 등 새로운 질병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어쩌면 늘 인간들은 병원성 미생물들과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질병을 극복하는 일은 결국 의학의 역사성을 제대로 파악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인간과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소 재로 한 SF영화‘아웃브레이 크’의 한 장면. 원인 모를 바이러 스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병 역반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쓴 의생활사

‘고통받는 몸의 역사’의 원래 제목은 ‘이야기가 있는 질병’이다. 이 책은 인간 삶의 곳곳에 스며있는 질병과, 그 질병을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즉 인간 삶을 중심에 둔 질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소개된 2권의 책이 과학자와 과학저술가에 의해 쓰여진데 비해, 역사학자들이 질병, 환자와 병원, 그리고 의학사에 대해 쓴 책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1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질병’은 인간 역사에서 굵직한 획을 그었던 질병에 대한 내용이다. 전쟁보다 더 참혹한 전염병과 무방비 상태로 병원균에 노출돼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2부 ‘고통받는 자의 운명’은 중세 병원과 암 환자의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3부 ‘치료를 위하여’에서는 천연두와 광견병 백신을 발견하는 과정 등 병의 치유법과 관련된 얘기를 들려준다. 4부 ‘의학, 과학과 주술의 역사’는 의술과 주술의 경계, 자연과 인체의 조화, 그리고 의학적 발견이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학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

앞의 책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페스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먼저 ‘과연 쥐가 페스트의 주범일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 중요한 사실은 쥐의 이동경로와 페스트의 발병 상황, 페스트의 발병 주기 등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이런 분석을 통해 페스트의 원인으로 쥐 이외의 다른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북부 이탈리아나 플랑드르 등 중부유럽 일대는 왜 페스트의 피해를 받지 않았는지, 또 쥐가 페스트의 원인균을 옮긴다면 14세기 이전에는 왜 페스트에 의한 특별한 피해가 없었는지 등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질병의 역사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오랫동안 수많은 병을 앓아온 태양왕 루이 14세가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을 주변 사람들의글과 회상록 등을 참고해서 쓴 일지 형식의 글 등 곳곳에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가득하다. 10명의 의사들이 나이 순서대로 왕의 맥박을 재는 장면이며, 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도망을 가는 의사 등의 모습을 읽다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당시의 과학사와 의학사, 그리고 생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200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일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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