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위해 혈액검사를 하려면 주사기로 피를 뽑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인체에 빛을 쪼여 투과된 빛을 측정하는 생체분광학이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화장실에 앉아 건강검진까지 가능케 해줄 생체분광학을 만나보자.
병원에서 겪는 괴로움 중 하나가 주사기로 피를 뽑는 일이다. 따끔한 통증도 그렇고 붉은 피를 본다는 것 자체가 생각만해도 싫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를 뽑을 때 눈을 감거나 이를 지긋이 악물고 딴 곳을 본다. 꼭 통증만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 부위로 질병에 감염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된다. 또 쓰다 남은 주사바늘이나 혈액을 처리하는 일도 골치다.
만약 피를 뽑지 않고 혈액 속의 성분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혈액검사와 관련된 지금까지의 모든 우려들을 단번에 날려보낼 것이다. 주사기 없이 혈액 분석을 가능케 하는 기술인 생체분광학이 주목받는 이유다.
빛깔을 나눠 생체를 분석한다
분광학이란 빛깔을 나눠 분석하는 학문이다. 빛은 여러가지 빛깔로 이뤄져 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눈에 보이는 무지개 빛은 물론 자외선이나 적외선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빛깔도 포함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깔이라 해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얘기다. 뱀은 적외선을 볼 수 있고, 곤충인 벌은 자외선을 구별할 수 있다.
빛을 원자나 분자에 쪼이면 부딪쳐서 흡수(또는 투과)되거나 산란된다. 반대로 흡수되거나 산란되는 정도를 분석하면 원자나 분자의 특성에 대해 알 수 있다. 분광학의 기본 원리다. 빛의 파장에 따라 독특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실제 분광학에서는 여러 파장에 대해 연구한다.
생체분광학은 생체조직이나 인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생체조직이 대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분광학과는 달리 몇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피부나 장기와 같은 생체조직에는 단백질 등 분자량이 큰 물질이 많으며, 여러 성분들이 섞여 있다. 따라서 원자나 분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이 벌어진다. 빛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생체조직은 매우 불균일한 매질이어서 반사와 굴절을 수없이 거쳐 산란이 아주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울러 생체조직은 빛이 쪼여졌을 때 마르거나, 단백질 변성 같은 손상을 쉽게 받는다. 따라서 분석하는 빛을 낮은 세기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가시광선을 사용하는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자외선이나 적외선 대역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욱이 생체의 대부분은 물로 돼 있는데, 물은 자외선이나 적외선 대역의 빛을 잘 흡수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서 샘플을 투과하거나 반사하는 양이 적다. 낮은 강도의 빛을 사용하는데다 그마저도 흡수돼 버리기 때문에 분석할 수 있는 빛의 양이 아주 적은 것이다.
손톱에 빛 쪼여 산소포화도 측정
이런 문제점들을 잘 해결하는 것이 최근 생체분광학의 중요한 포인트다. 생체분광학에서는 복잡한 스펙트럼을 분석하기 위해서 빛이 생체조직을 지나가는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통계방법을 동원한다. 또 미약한 신호도 놓치지 않고 측정하기 위해 정밀계측기술도 적용되고 있다.
혈액 속에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적혈구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해 동맥을 통해 산소를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동맥에서 헤모글로빈이 얼마나 산소와 결합돼 있는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돼 있는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생체분광학을 이용하면 손톱 위에 빛을 비추고 손가락을 투과한 빛을 측정하는 간단한 과정을 통해 헤모글로빈이 얼마나 산소와 결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산소와 결합하고 있는 헤모글로빈이 몇%가 되는지(산소포화도)를 알려주는 기기를 펄스옥시미터(pulse oximeter)라 한다.
펄스옥시미터의 원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파장 4백-1천nm에서 산소와 결합돼 있는 산화헤모글로빈(Hb${O}_{2}$ )과 산소와 결합하고 있지 않은 환원헤모글로빈(Hb)의 흡수 스펙트럼을 살펴보면 6백60nm의 적색 빛에서는 산화헤모글로빈의 흡수도가 산소와 결합하고 있지 않은 환원헤모글로빈의 흡수도보다 낮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근적외선의 빛인 9백40nm에서는 반대로 산화헤모글로빈의 흡수도가 환원헤모글로빈보다 높다. 따라서 이 두가지의 빛을 손톱에서 비춰서 투과된 빛의 비율을 구하면 산화와 환원의 비율인 산소포화도(%)를 구할 수 있다(그림).
혈액 속의 빌리루빈이란 성분을 측정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빌리루빈은 정상적으로는 혈액 1백cc당 1천분의 0.2-1.2g이 들어있다. 이 수치가 높아지면 얼굴이 누렇게 되는 황달 현상이 일어난다(특히 신생아들에게 잘 나타난다). 이 경우 빛을 앞이마에 비춰 반사돼 나온 빛을 측정 분석하면 빌리루빈의 양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다.
산소포화도나 빌리루빈 측정과 같은 예들은 생체분광학의 가장 간단한 사례다. 좀더 복잡한 경우에는 많은 파장을 이용하거나 다른 기법들이 활용된다. 예를 들면 짧은 레이저펄스를 쪼였을 때 분자구조에 따라 레이저펄스의 뒷부분이 길어지는데, 이를 이용해 거꾸로 분자의 상태를 아는 방법이 가능하다.
한편 빛을 쪼였을 때 쪼인 빛과는 다른 파장의 빛이 검출된다. 새로 생긴 파장들은 매질의 성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검출된 파장으로부터 매질의 성분을 추정할 수 있다. 생체 조직은 빛을 받으면 형광을 내는데, 이 형광 스펙트럼으로부터 생체조직의 특성을 살필 수도 있다.
시약 필요 없는 생화학 검사
세계적으로 피를 뽑지 않는 혈액 분석기술을 연구하는 이유가 아프지 않고 편하게 측정하기 위한 것이 전부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다. 사실 생체분광학을 주목하는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혈당량을 자주 체크해야 하는 당뇨병의 경우를 살펴보자.
당뇨병 환자는 혈당량을 측정하기 위해 손가락에서 피를 뽑은 다음 스트립에 떨어뜨려 색깔의 변화를 관찰한다. 여기서 스트립은 화학약품이 묻어있는 작은 헝겊조각을 말한다. 그런데 미국 통계에 따르면 개인이 쓰는 채혈식 혈당계의 가격은 2백달러 정도지만 1년 간 사용하는 스트립의 비용은 1천달러에 이른다. 이 비용은 환자에게 큰 부담이 된다. 이런 혈당 측정과 관련된 세계시장은 연간 약 46억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분석장비의 경우에도 혈액, 뇨 등 체액분석을 할 경우 특정 성분을 검사하기 위해 화학약품이 필요하다. 효소반응이나 기타 화학반응을 일으킨 다음 측정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흔히 시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시약 비용은 병원 임상분석 비용의 50-60%에 이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는 셈이다.
피를 뽑지 않는 무혈 혈액분석은 이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할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현 단계에서는 채혈은 하되 시약을 사용하지 않는 무시약 분광학 진단방법이 곧 실용화될 수 있어 세계적으로 연구중이다. 무시약 혈액성분 진단은 시약이 들지 않는 장점 이외에 여러 성분들을 한꺼번에 측정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아침마다 간단한 건강 체크
혈액을 뽑지 않고 인체에 빛을 쪼여 투과된 빛을 측정해 얻는 생체분광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빈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빈혈을 앓고 있다.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기 전까지 자신이 빈혈인지 아니면 다른 증상인지 잘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빈혈을 알려면 피를 뽑아 검사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빈혈인 것을 알고 있어도 빈혈의 정도가 얼마나 되고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생체분광학 방법이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정상인에게 혈액 1백cc 당 1.2-1.8g 정도 들어있는데, 이 양이 모자라면 빈혈이 된다. 최근 피를 뽑지 않고 빈혈을 측정할 수 있는 병원용 장비의 시제품이 미국에서 선보였고, 필자가 소속된 기관에서도 개인용으로 쓸 수 있는 소형기기를 개발했다.
세계적으로 당뇨병 환자를 인구의 3%로 추정하고 있다.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젊은층은 물론 심지어는 어린이까지 층이 넓어지고 있다. 당뇨병은 혈액 속의 포도당이 많아져서 생긴다. 포도당은 우리 몸에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꼭 있어야 하는 성분이다. 그런데 많아지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항상 포도당 수치를 측정하고 인슐린을 투입해 포도당 수치를 조절해야 한다. 생체분광학 분야에서 포도당을 측정하기 위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진행중인데, 조만간 결과물이 나올 전망이다.
향후에는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앉아서 건강상태를 모니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화장실을 개인의 건강을 점검하는 장소로 구상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오늘의 혈당, 콜레스테롤, 혈압, 혈뇨의 수치가 어떤지 본인이 용변을 보는 사이 측정된다. 모든 데이터는 인터넷을 통해 병원 주치의에게 전송되고, 만약 이상이 있으면 경고 메시지와 함께 조처 방안을 알려줄 것이다.
미래학자 제프리 피셔 박사가 예견했던 피를 뽑지 않고 혈액검사를 하는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생체분광학 기술이 자리잡고 있다.
직장 건강검진 피 안뽑고 가능
삼성종합기술원 메디컬응용팀에서는 생체분광학의 중간단계로 혈액은 뽑지만 시약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팀이 관심 갖는 주제 중 하나인 생화학검사를 살펴보자. 병원에서 검진을 받을 때 생화학검사 항목으로 혈액 속의 여러 성분의 농도를 측정하는데 이를 생체분광학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혈액을 채취한 다음 혈구(적혈구, 백혈구, 혈소판)를 분리해 액체인 혈청만 추출했다. 그런데 가시광선 대역에서 생화학검사 항목 성분들의 특징이 잘 나타나지 않고, 헤모글로빈의 흡수와 산란이 크다. 이 때문에 적외선을 사용해 측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적외선도 문제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 몸의 약 60%를 차지하는 물이 적외선을 흡수하면서 피크(peak)가 되는 파장을 여럿 만들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분석에 방해가 되는 이런 파장을 줄이기 위해 샘플의 두께를 50μm 정도로 얇게 만들었다.
생체분광학으로 측정한 결과 흡수 스펙트럼이 서로 겹쳐서 단일 성분의 고유한 파장을 찾기 어려웠다. 연구팀은 복잡한 스펙트럼을 분석하기 위해 다변량통계분석이란 통계방법을 동원해 생화학 검사에서 측정하는 항목들을 예측해보았다.
생화학 검사 항목은 총단백질, 알부민, 글로불린, 총콜레스테롤, 고비중 리포단백질(HDL) 콜레스테롤, 트리글리세라이드, 포도당, 요소질소(BUN), 요산 등 총 9가지다. 콜레스테롤류와 트리글리세라이드는 심혈관계, 단백질, 알부민, 글로불린은 간기능, 포도당은 당뇨병, 요소질소는 신장 기능, 요산은 통풍과 관련이 있어 중요하다.
특정 성분을 추정하기 위해서 가장 알맞은 파장의 대역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다른 성분들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측정하고자 하는 성분의 농도만을 잘 측정할 수 있는 파장의 대역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연구팀은 이런 대역을 선정하는데 컴퓨터 분석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그 결과 요소질소와 요산을 제외하고 7가지 생화학 검사 항목에 대해 임상에서 요구되는 정확도를 충족시킬 정도로 농도를 추정하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직장이나 학교에서 건강검진 시 생체분광학이 생화학검사를 대체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