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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세계의 해커들

적진 안방 차지해 식사수발까지 요구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해커들. 곤충 사회에도 이런 해커들이 존재한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안방을 차지한 채식사 수발까지 요구하는 뻔뻔한 해커 곤충들의 능란한 위장술을 최신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맵시벌이 조용히 개미굴에 접근한다. 굴 입구에는 수많은 병정개미들이 지키고 서있다. 맵시벌은 깊은숨을 몰아 쉰 다음 한치의 주저도 없이 개미굴로 돌진한다. 여기저기서 병정개미들이 뛰쳐나왔지만 날렵한 날갯짓으로 일차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좁은 굴 속에서는 더 이상 날개가 쓸모 없다. 이제 진퇴양난의 신세가 돼버린 건 아닐까.


개미들의 내전 일으키는 맵시벌

맵시벌이 개미굴로 들어온 이유는 뱃속에 가득 찬 알들을 위해서다. 맵시벌은 다른 곤충의 애벌레에 자신의 알을 낳는 기생벌의 일종. 알들은 애벌레를 먹고 성충으로 자라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맵시벌의 조상이 알을 낳는 곳으로 선택한 것이 개미굴에 숨어사는 부전나비의 애벌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개미굴에 침입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생태 수문학 센터의 제레미 토마스, 그래험 엘름스 박사 연구팀은 과학전문지 ‘네이처’ 5월 30일자에 맵시벌이 개미굴에서 무사히 부전나비 애벌레에 알을 낳는 비밀을 밝혀냈다. 맵시벌의 무기는 바로 개미들이 분비하는 신호물질인 페로몬을 모방하는 것. 맵시벌은 개미굴 속의 부전나비 애벌레에게 다가갈 때 우선 개미들을 끌어 모으는 유인 페로몬을 분비한다. 다음은 모여든 개미들을 쫓아버리는 신호와 함께 공격성을 유발하는 신호 페로몬을 분비한다. 이때부터 개미들은 같은 동족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서로 싸우게 된다. 맵시벌은 이 틈을 타 부전나비 애벌레에게 알을 낳고 유유히 사라진다. 말 그대로 개미들의 통신을 해킹해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이다. 미국 하버드대 베르트 휠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 교수도 1994년 펴낸 ‘개미 세계 여행’에서 개미굴에 침입하는 이들 곤충을 해커를 의미하는 ‘암호 해독자’(code breaker)라 불렀다.

맵시벌이 분비하는 가짜 개미 페로몬을 분석한 결과 6종이 밝혀졌으며 이 가운데 4종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났다. 기체 크로마토그래피 분석에 따르면 이들 물질은 알코올과 알데하이드 기가 여러개 달린 탄수화물로, 개미들이 분비하는 경고 페로몬에 비해 효과가 훨씬 오래 지속됐다. 실제 맵시벌이 가짜 페로몬을 분비한 뒤 50일이 지나도 개미들끼리 싸우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부전나비 애벌레 속에 있는 맵시벌의 알은 이 와중에 애벌레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성충이 돼 개미굴을 빠져나간다.
 

바구미와 나방 애벌레에 알을 낳고 있는 맵시벌레들



적의 손에서 자라나는 해커들

흥미로운 것은 맵시벌의 공격을 받은 부전나비 역시 이미 개미들에게 같은 해킹 전술을 사용했다는 점. 부전나비 애벌레는 몸에서 개미들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유화 페로몬을 분비해 개미를 현혹시키고 결국 개미굴 속 깊은 곳의 아기방으로 호송된다. 아기방에서 부전나비 애벌레는 개미 애벌레와 같이 일개미로부터 먹이를 제공받으며 겨울을 난다.

미국 하버드대의 피어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부전나비는 사실 개미와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공생관계에 있다. 이들 애벌레는 개미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영양분이 골고루 갖춰진 액체 먹이를 제공한다. 과학자들은 계통분류학적 연구를 통해 공생을 하던 부전나비들 중 일부가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는 기생생활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미굴에 사는 기생곤충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반날개딱정벌레다. 부전나비와 마찬가지로 반날개 애벌레들도 지나가는 개미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몸을 세워 개미의 턱을 입으로 두드리는 구걸 행위를 한다. 개미는 이내 액체성 먹이를 게워내 애벌레에게 먹이고는 입으로 물고 아기방으로 데려간다.

반날개 애벌레들이 개미의 공격을 받지 않는 데에는 개미들이 뱃속에 든 먹이를 나눠먹을 때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뿐 아니라 개미 페로몬을 분비하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실험에 의하면 갓 죽인 반날개 애벌레의 몸에 수지를 발라 분비물의 발산을 막았더니 개미들이 굴 밖으로 버리는 반면, 역시 갓 죽였으나 수지를 바르지 않아 아직 남아있는 분비물이 나오도록 한 애벌레는 아기방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기방에서 자라난 반날개딱정벌레 성충은 애벌레 때와 마찬가지로 일개미들이 뱃속 먹이를 나눠먹는 행위를 따라한다.


감옥 안에서 호의호식하는 무뢰한

개미와 마찬가지로 사회생활을 하는 꿀벌 역시 무단침입자로 골치를 썩는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벌집에서 일어나는 해킹은 세련되지 못한 우격다짐에 가깝다는 점이다.

벌집딱정벌레는 꽃가루와 꿀, 심지어 애벌레를 노리고 벌집으로 몰려든다. 1990년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 딱정벌레는 벌집에 기생하는 곤충 가운데 가장 빨리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는 이 딱정벌레를 없애는데 한 해에 3백만달러를 쓸 정도로 골칫거리다.

지난해 5월 말 독일 마틴 루터대의 피터 뉴만 교수는 남아프리카의 꿀벌이 벌집딱정벌레를 나무진을 이용해 감금시킨다는 사실을 독일의 과학저널 ‘나투르비센샤프텐’에 발표했다. 벌집딱정벌레의 몸은 벌침도 들어가지 않아 꿀벌에게는 무쇠철갑을 두른 탱크와 같다. 그래서 꿀벌이 고안해낸 것이 벌집 안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는 방법. 감옥에 다 가두지 못할 정도로 딱정벌레가 많아지면 꿀벌들은 미련 없이 집을 버렸다고 한다. 당시 뉴만 교수는 감금 행위를 모르는 미국 꿀벌을 남아프리카 꿀벌과 교배하면 벌집딱정벌레를 자연적으로 없앨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꿀벌의 감금은 그리 견고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딱정벌레에게는 손쉽게 먹이를 얻을 수 있는 비책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드대 랜달 헵번 교수 연구팀은 감금상태에 있는 벌집딱정벌레가 꿀벌의 몸짓을 흉내냄으로써 오히려 간수 꿀벌들로부터 식사 수발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 정식 출판에 앞서 나투르비센샤프텐 인터넷 웹사이트에 먼저 공개했다.

헵번 교수팀은 벌집의 한쪽 면을 투명한 판으로 만든 다음 감금상태의 딱정벌레와 간수격인 꿀벌의 행동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했다. 몰래 카메라에는 딱정벌레가 더듬이로 간수 꿀벌의 더듬이를 건드리자 꿀벌이 먹이를 토해내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다. 헵번 교수는 꿀벌의 먹이를 염색한 다음 실제 꿀벌이 토해낸 먹이가 딱정벌레로 전달됐는지를 실험했다. 그 결과 다음날 딱정벌레의 위가 같은 색으로 변해있는 것으로 나타나 실제로 꿀벌에게서 먹이를 받아먹는 것으로 확인됐다.

벌집에 감금된 딱정벌레는 먹이를 얻어먹는 것 외에도 장점이 있다. 꿀벌들은 종종 벌집을 버리고 이사를 간다. 남겨진 벌집은 밀랍 나방이나 곰팡이, 박테리아 등 다양한 생물의 먹이가 되는데, 이때 벌집 안에 미리 들어와 있는 딱정벌레가 우선권을 갖게 된다.
 

성충과 애벌레는 페로몬을 모방해 개미들의 보살핌 을 받는다. 그림은 반날개 애벌레 와 성충이 개미들의 먹이 구걸 행 위를 따라하는 모습이다.



시각과 후각 이용한 양동작전

해커들은 이처럼 상대가 자신을 같은 편으로 여기게 하는 전술을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때로는 좀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첩보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미인계’가 바로 그것이다. 곤충은 교미기에 짝을 찾는 성 페로몬을 분비하는데, 해커는 이것을 흉내내 미인계를 펼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의 존 하퍼닉, 레슬리 사울-게르센츠 박사 연구팀은 2000년 5월 미인계의 아주 독특한 형태를 발견,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모하비 사막에서 가뢰 애벌레를 관찰했다. 가뢰는 땅 속에 알을 낳는데 보통 3천마리의 애벌레가 동시에 깨난다. 애벌레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땅 속에서 기어 나와 근처 나뭇가지나 풀잎 끝으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이내 나뭇가지 끝에는 1백마리에서 많게는 1천마리의 애벌레가 솜뭉치처럼 모이게 된다. 애벌레들의 목표는 단독생활을 하는 하프로포다(Hapropoda) 속의 벌 수컷. 수펄은 애벌레들의 군집을 나뭇가지 끝에서 쉬고 있는 같은 종의 암펄로 착각하고 교미를 위해 달려들게 된다. 가뢰 애벌레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벌의 가슴에 난 털을 붙잡고 매달린다. 단독생활을 하는 벌은 모든 암컷이 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교미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가뢰 애벌레들은 이 과정에서 암펄들에 옮겨지고 결국 벌집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나뭇가지 끝에 모인 가뢰 애벌레들은 색깔이 짙은 오렌지색으로 벌과 같을 뿐 아니라 군집의 모양과 크기가 암벌과 거의 비슷하다. 게다가 암컷이 내는 성 페로몬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들이 애벌레들이 모인 것과 비슷한 모형을 세워뒀을 때는 수펄이 전혀 반응하지 않고 아직 군집을 이루기 전에도 가뢰 애벌레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보아 애벌레의 몸에서 벌 암컷이 내는 것과 같은 성 페로몬이 분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시각과 후각을 모두 속이는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곤충들이 개별적으로 상대를 속이는 것은 흔하지만 가뢰 애벌레처럼 여러 개체가 같은 목적으로 협동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보고 있다.
 

군집을 이룬 가뢰 애벌레들은 수펄과 암펄을 거쳐 벌집 에 잠입한다.



거짓 사랑으로 목숨 노리는 팜므 파탈

영화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남자를 유혹한 뒤 파멸시키는 악녀들이 종종 등장한다.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이들을 일컫는 말로 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성 페로몬을 모방하는 해커는 팜므 파탈처럼 거짓 사랑을 팔아 상대의 목숨까지 노린다.

대표적인 것이 반딧불이. 미국 플로리다대 제임스 로이드 교수는 1960년대에 반딧불이 암컷이 다른 종의 수컷이 내는 구애 신호로 내는 깜빡거림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수컷을 유인,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보통 반딧불이는 종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발광 신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작은 몸집을 가진 포티누스(Photinus) 속의 한종은 수컷이 물결 모양으로 땅에서 가까운 곳을 날며 매 6초마다 이 물결 모양의 가장 아래쪽에서 2분의 1초 동안 빛을 반짝이면서 동시에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노란색의 ‘J’자를 그리게 된다. 이때 같은 종의 암컷이 1-2m 안에 있다면 약 2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역시 2분의 1초 동안 빛을 내 응답한다. 로이드 교수는 포티누스 수컷의 구애 신호에 대형 반딧불이인 포투리스(Photuris) 속의 암컷이 응답하는 것을 발견했다. 암컷의 응답에 포티누스 수컷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이내 땅으로 내려앉는다. 포투리스 암컷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잡아 먹어버린다. 거짓 사랑에 속아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포투리스 수컷은 다른 종의 발광신호를 내고 다니는 이런 악녀를 어떻게 찾아낼까. 포투리스 수컷의 전술은 암컷이 노리는 먹이인 포티누스 수컷의 구애 신호를 흉내내는 것이다. 수컷은 응답을 보낸 암컷에게 다가가 가짜 신호를 보낸 포투리스 암컷이라는 것을 더듬이로 확인한 다음 사랑을 나눈다.

암컷의 성 페로몬을 이용, 수컷을 유인하는 또 다른 예는 볼라스 거미에서 찾을 수 있다. 볼라스 거미는 끈적끈적한 거미줄을 한데 뭉쳐 공처럼 만들어 곤충을 잡는 돌팔매로 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볼라스 거미는 이와 함께 암나방이 수컷을 부를 때 쓰는 성 페로몬과 비슷한 물질을 분비해 수나방을 사냥한다.
 

아포리드 애벌레는 개미 머리 속을 파먹고 결국 개미 목이 떨어진다.



해커 이용 해충 잡는다

과학자들이 곤충의 해킹 전술을 연구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희귀종의 보존을 위한 기초 연구의 목적. 앞서 예를 든 맵시벌이나 부전나비는 현재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종이다. 과학자들은 이들 곤충의 생태를 연구함으로써 보존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두번째 목적은 실용적 이유에서다. 컴퓨터 해커 가운데에는 컴퓨터 보안에 관계된 일을 하는 이른바 ‘좋은 해커’가 있다. 마찬가지로 곤충세계의 해커들을 해충 구제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불개미다.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 미국 남부 12개주와 푸에르토리코에서 3억에이커 이상에서 가축과 전기시설, 사람에 피해를 주고 있는 불청객이다. 미 농무부 농업연구소(USDA AR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 종류의 기생개미의 암컷은 불개미굴로 잠입, 여왕개미에 달라붙어 일개미들이 주는 먹이를 가로챈다. 심지어 기생개미는 불개미의 페로몬을 위장해 자신이 낳은 알까지 돌보게 만든다. 불개미 여왕은 알을 낳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결국 불개미굴이 기생개미 차지가 된다. ARS 연구자들은 기생개미가 불개미굴에만 잠입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다른 생물에는 피해를 주지 않고 골칫거리만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전술은 불개미 집단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 미국 조지아대의 마이클 크리거, 케니스 로스 박사팀은 불개미 사회에서 여왕개미의 수를 결정 짓는 유전자를 찾아내 지난해 말‘사이언스’에 발표 했다. 논문에 따르면 페로몬을 감지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어떤 종류이냐에 따라 일개미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만약 일개미가 하나의 여왕을 섬기는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 한마리만 남겨두고 다른 여왕개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여러마리의 여왕개미가 있는 불개미 군집은 한마리의 여왕개미가 있는 군집에 비해 개체수가 10배 이상 많아 인간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 연구자들은 여왕개미가 하나뿐인 불개미의 유전자를 복수의 여왕개미를 섬기는 집단에 퍼뜨림으로써 불개미 사회의 자멸을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이 곤충세계의 해커들을 해킹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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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 진행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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