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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명성, 과학이 만든다

31가지 기능 갖춘 만능 칼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고가인 외국 브랜드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상품을 가리켜 흔히 명품이라 부른다. 명품은 보통 상품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명품이 현재의 위치를 차지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명품이 유행이다. 명품만 고집하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명품족’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다. 그런데 과연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들은 보통 상품과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것일까. 혹시 가격만 비싼 건 아닐까.

사실 현재 명품 반열에 오른 브랜드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1백년 정도의 역사는 기본이다. 더욱이 상품을 처음 선보인 당시에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명품 속에는 과학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재 명품이 대부분 고가라는 점도 사실이다. 이는 명품의 가격에 그동안 쌓아올린 브랜드의 가치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가의 명품에 집착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다.

하지만 명품이 좀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정관념을 깨고 땀흘리며 연구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름의 교훈을 간직한 이유다. 시대를 앞서나간 명품들을 감상해 보자.


버버리 BURBERRY
 

버버리 트렌치 코트


실용성 때문에 더욱 멋스런 코트 봄, 가을과 같은 환절기.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서늘해지면 얇은 천으로 된 코트가 제격이다. 흔히 바바리라 불리는 코트를 걸치면 빗물이 잘 스며들지 않으면서도 바람이 잘 통해 쾌적하고, 허리에 벨트를 묶으면 활동하기도 편하다. 더욱이 예전 할리우드 영화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나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의 우수어린 연기를 빛낸 소품으로 사용됐을 정도로 디자인이나 소재가 멋스럽다. 최근 영화에서도 탐정이나 스파이, 비즈니스맨이라고 하면 으레 바바리를 입고 등장한다.

바바리라는 이름이 체크무늬로 유명한 패션의 명품인 ‘버버리’(Burberry) 상표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브랜드를 상표에 상관없이 특정 옷 형태를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것일까. 본래 기능을 따져 비를 피한다는 의미에서 레인코트라는 괜찮은 이름이 있는데도 말이다.

버버리가 레인코트의 ‘대명사’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토머스 버버리다. 패션 브랜드 버버리의 창립자인 그는 수십가지를 발명해 특허를 받은 발명가이기도 하다. 버버리가 살던 19세기 말 레인코트는 모두 고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연히 뛰어난 방수 기능을 자랑했지만 여간 무겁고 불편한 게 아니었다. 통풍도 잘 안돼 하루 종일 입고 있으면 온몸이 빗물 대신 습기와 땀에 젖었다. 고무로 된 레인코트의 단점을 온몸으로 느낀 그는 직접 방수옷감 개발에 착수했다. 그의 목표는 빗물이 잘 스며들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바람이 잘 통하는 직물의 개발이었다.

다양한 시도 끝에 버버리는 마침내 날실과 씨실을 직각으로 조밀하게 짠 후 화학수지로 방수가공해 만든 옷감 ‘개버딘’(gabardine)을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1901년 버버리의 레인코트가 등장하자 시장은 벌컥 뒤집혔다. 버버리가 특허를 받은 직물로 된 코트는 가벼워 활동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방수, 방한, 통기성이 뛰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이 공식 군복으로 버버리의 코트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에도 버버리 코트는 참호(trench)에서 나온 이름인 트렌치 코트라 불리기도 한다.

계절이나 유행에 구애받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을 받는 코트 버버리.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입어야 했던 레인코트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면서, 평소에도 활동적으로 입을 수 있도록 만든 발명품이다. 실용성을 추구한 발명가의 땀방울이 명품을 만든 셈이다.


페라가모 FERRAGAMO
 

편안한 구두를 만들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한 페라가모


푹신한 카펫 걷는 느낌 주는 구두 1955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7년만의 외출’을 보면 뉴욕 지하철의 송풍구에서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한 여성의 스커트가 날리는 장면이 있다. 전세계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여성의 이름은 마를린 먼로. 전설이 된 이 장면에서 그녀의 각선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 소품은 하얀 샌들이었다.

영화에서 먼로가 신은 샌들을 만든 사람은 살바토레 페라가모다. 그가 만든 브랜드 ‘페라가모’(Ferragamo)는 현재 최고의 명품 구두를 상징하고 있다. 페라가모가 명품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라가모는 1898년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에 태어났다. 몹시 가난했던 그는 형제들이 신을 구두를 직접 만들었는데, 특별한 재주를 보였다. 결국 16살의 페라가모는 본격적인 구두 제작에 뜻을 품고 동경하는 스타들이 즐비한 미국 할리우드로 떠났다. 할리우드에서 구두 수선과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페라가모는 당시 유행하던 구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뻣뻣한 소재로 꼭 죄게 만들어진 구두가 발을 학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라가모는 무엇보다 발이 편안한 구두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페라가모는 자신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UCLA에 진학해 인간 해부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에서 사람이 똑바로 서있으면 체중이 약 4㎠정도의 면적에 불과한 발바닥 중심으로 쏠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그때까지 구두들이 뒷굽과 복숭아뼈 부분을 지탱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페라가모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철저히 발을 위한 구두를 만들었다. 발바닥의 형태에 맞게 밑창을 만들어 착용감을 높이고,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신발 속에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걸을 때 신발 안에서 발이 앞으로 밀리지 않는 장치를 발바닥 부분에 만들었다. 페라가모의 이런 새로운 기술들은 구두 속에서 발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준다.

소재면에서의 시도도 상식을 뛰어넘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물자가 부족해지자 페라가모는 비닐종이와 낚싯줄을 이용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구두를 만들었다. 들판에 널려있는 짚이나 코르크를 굽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가죽으로만 구두를 만들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페라가모의 구두를 신으면 맨발로 푹신한 카펫 위를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최고로 편한 구두가 최고의 명품으로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다. 페라가모 구두에는 “디자인은 흉내낼 수 있어도 결코 그 편안함은 따라할 수 없는 구두를 만들겠다”는 철학을 갖고 인간의 발을 연구하며 한 평생을 살다간 구두장이의 고집이 담겨있다.


루이비통 ROUIS VUITTON


가장 갖고 싶은 핸드백 상표 루이비통은 여행용 가방으로 명성을 쌓았다. 루이비통 가방의 직육면체 모양은 당시 상 식을 뛰어넘는 시도였다.


고정관념을 깬 직육면체 여행가방 여행의 즐거움은 커다란 가방을 꺼내놓고 물건을 차곡차곡 쌓는 일에서 시작된다. 더욱이 그 가방이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라고 한다면 즐거움은 몇배 커진다.

사실 ‘루이비통’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요즘 여성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핸드백 브랜드, 그리고 머릿글자인 L과 V가 꽃, 별 무늬와 섞여져 반복되는 독특한 캔버스 무늬다. 그런데 명품 핸드백의 상징인 루이비통은 처음에는 여행용 가방으로 명성을 쌓았다.

1821년 프랑스 앙쉐라는 작은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비통은 어릴 적부터 나무 다루는 일을 보며 자랐다. 나중에 나무 다루는 기술이 가방 제작에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14세가 되던 해 무작정 파리로 떠난 그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가방을 만드는 사람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가방공장에서 루이비통은 의상들을 구김이 가지 않도록 꾸리는 일도 했다.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선 수십m나 되는 천을 늘어뜨린 화려한 드레스가 유행했는데, 이런 귀부인이 여행할 때는 수십개의 가방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여행 가방은 윗부분이 둥그렇게 돼 있어 관리하는데 상당히 불편했다.

1854년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연 루이비통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방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캔버스천으로 만든 직육면체의 여행용 가방을 개발했다. 당시 궤짝이나 만들 때 사용하는 사각 디자인으로 여행 가방을 만든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런데 이 디자인의 가방은 궤짝처럼 몇개라도 손쉽게 겹쳐 쌓아올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가방을 보관하기도 편했고, 쌓아올린 가방에 옷걸이를 걸 수도 있었다. 곧 루이비통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모았고, 이후 여행 가방의 표준이 됐다.

한편 루이비통이 가방을 만든 시기에 여행 수단으로 주로 배를 이용한 항해가 이용됐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는 끔직한 사고가 간혹 생겼다. 이 때문에 루이비통은 구명용으로 쓸 수 있도록 부력을 이용해 물에 뜰 수 있는 구조로 가방을 설계했다. 또 본 열쇠가 아니면 절대 열 수 없는 특수 자물쇠가 달린 가방도 선보였다.

여행자의 편의뿐 아니라 안전까지 생각한 여행 가방으로 명성을 쌓은 루이비통. 현재 루이비통은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브랜드의 가치절하를 막기 위해서 한사람이 구매할 수 있는 양을 한정시킨다. 최고급 가죽으로 최고의 장인들이 아직도 손으로 가죽을 자르고, 틀을 만들어 징을 박으며, 바늘로 가죽을 꿰맨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 없이 튼튼한 것은 당연하다. 세월이 가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가방 루이비통이 명품이 된 이유다.


티파니 TIFFANY
 

보석 세공의 명가 티파니. 보석에 대한 제대로 된 이 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욱 눈부시다.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석 1961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지금까지 사랑받는 명작 중 하나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우울한 날이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보석매장 ‘티파니’(Tiffany)로 달려간다. 이후 티파니 제품이 담겨있는 독특한 모양의 블루박스는 전세계 여성들이 받고 싶은 꿈의 선물상자가 됐다.

영화를 통해서 볼 수 있었던 티파니 제품은 최고의 보석을 상징하는 명품이다. 한 예로 지난해 월드시리즈를 재패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김병현이 받은 우승반지도 티파니에서 세공했다는 이유만으로 1천만원이 넘어간다.

보석처럼 밝게 빛나는 타파니의 역사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뉴욕에 첫 은세공품 매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빅토리아시대의 우아한 취향을 한껏 누리던 당시 미국은 보석류를 거의 유럽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티파니는 직접 제작에 뛰어들어 과감히 단순한 형태로 세공품을 만들었다. 이것은 곧 아메리칸 스타일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모은다. 당시 티파니가 선택한 은순도 925/1000가 미국의 법정 은순도가 됐다. 1878년 파리국제박람회에서 기술을 인정받아 미국회사로서는 최초로 금메달을 받으면서 티파니는 명품 반열에 올랐다.

보석시장에서도 티파니는 명성을 이어간다. 티파니는 다이아몬드의 크기만을 중시하던 당시 인식을 바꾸면서 광채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알려주었다. 보석 가치의 개념을 바꾼 티파니의 연마법은 곧바로 세계보석시장의 새로운 기준이 됐다.

티파니 제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86년 선보인 ‘티파니 세팅’으로 불리는 다이아몬드 육지(六肢)세팅술이다. 백금으로 된 6개의 발을 이용해 다이아몬드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만드는 방법으로 현재까지 결혼반지처럼 소중한 반지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 티파니 세팅이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는 다이아몬드를 통과한 빛이 다시 반사돼 최대한의 광채가 나도록 광학을 고려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티파니의 역사는 근대 보석의 변천사와 보석 기호의 변천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석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가치가 제대로 발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든 명품 티파니. 그래서 티파니는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보석이라 불린다.


지포 ZIPPO
 

지포라이터를 발명한 조지 블레이스델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 ‘찰칵’하는 맑은 금속성의 파열음. 은은히 풍겨오는 기름 냄새. 투박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크기. 담배를 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라이터의 명품 ‘지포’(Zippo)다. 사실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에게도 지포라이터는 그리 낯선 물건이 아니다. 지포라이터만큼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은 없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다이 하드’에서는 납치한 비행기로 유유히 달아나는 악한들을 지포라이터 하나로 폭파시켜버린다. 이 외에도 액션이나 전쟁영화에서 지포라이터에 불을 붙여 휘발유가 가득한 곳으로 던지는 장면은 수도 없이 나온다. 날아가면서 라이터가 빙빙 돌더라도 불은 신기하게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폭발 장면이 이어진다.

사실 지포가 라이터의 명품으로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쌓아올려온 전설 때문이다. 한 예로 미국 클리블랜드 서부의 한 호수에서 잡힌 물고기의 배속에서 발견된 지포라이터가 단 한번만에 불이 켜졌다는 일화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켜지고, 또 뚜껑을 닫기 전까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을 지닌 지포는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은 부적처럼 지포라이터를 몸에 지녔다. 군인들이 광적으로 지포를 갖고 싶어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지포증후군’이란 용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군인들이 지포에 집착한 이유는 절대 꺼지지 않으며 어둠에 빛을 선사하는 불꽃이 따듯함과 함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포는 전장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매끈한 케이스는 거울로 사용할 수 있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깡통을 데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솔린이 세는 적군의 탱크를 공격하는 하나의 무기였다.

지포의 명성은 193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공장에서 조지 블레이스델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뚜껑에 경첩을 달아 여닫을 수 있고, 심지 주변에 구멍뚤린 철판을 둘러 바람 속에서도 켜지는 라이터를 선보였다. 마모가 잘 되지 않도록 철을 제련해 발화바퀴를 만들고, 오래 쓰는 심지를 만들기 위해 구리선을 집어넣는 노력도 있었다.

지포라는 이름은 블레이스델이 당시 최고의 발명품이었던 지퍼(Zipper)의 이름에서 따와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품질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그는 제품의 평생보증을 약속했는데, 실제 초창기 제품이 지금까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빅토리녹스 VICTORINOX

녹슬지 않는 예리한 칼 예전 TV에서 방영되던 외화 ‘맥가이버’에서 맥가이버는 조그마한 주머니칼 하나로 모든 위기를 헤쳐나갔다. 맥가이버의 손재주를 빛나게 한 다용도 주머니칼은 ‘빅토리녹스’(Victorinox). 세계를 정복한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브랜드다. 브랜드 이름은 개발자인 칼 엘스너의 어머니인 빅토리아와 스테인리스 강철을 뜻하는 이녹스를 합쳐 만든 것이다.

빅토리녹스의 나이프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세기 말. 당시 스위스는 칼 제조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군용칼은 독일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방용칼을 만들어 팔던 칼 엘스너는 군용칼을 스위스 기술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1884년 공장을 차렸다.

칼 엘스너는 군용칼의 첫째 조건인 견고한 칼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최고의 품질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열처리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빅토리녹스의 유사품이 많아도 결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예리함까지 흉내내지 못하는 이유다. 결국 1891년 스위스 육군에 인정을 받아 군용으로 결정되면서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빅토리녹스를 상징하는 로고인 흰 십자가와 방패도 스위스군대의 상징물이다.

빅토리녹스가 명품으로 자리잡는데는 견고함과 함께 놀라운 기능도 한몫했다. 사용자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기능은 치밀한 내부의 디자인에서 나온다. 한 예로 빅토리녹스 중 ‘스위스 챔프’는 칼, 캔 오프너, 가위 등의 31가지 기능에 바늘과 실, 밴드 등이 들어있다. 무게는 불과 1백85g이지만 64개의 부품을 배치한 것으로 4백50번의 제작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또한 유연하게 움직일수 있도록 적절한 스프링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과 압력까지 세세하게 맞춰져 있다.

견고함과 놀라운 구조의 미학을 자랑하던 빅토리녹스는 1921년부터 스테인리스 강철을 사용하면서 절대 녹슬지 않는다는 신화를 만들어갔다. 1931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기 담금질 생산 설비를 완비해 더욱 빼어난 품질을 선보였다.

현재 빅토리녹스는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사람에게 대통령이 주는 기념선물로 사용되고,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선에 파일럿의 장비로 실리고 있다. 항공사고가 발생했을 때 수술칼 역할까지 소화하는 실용품이면서, 미 뉴욕 현대예술박물관에 전시된 예술품이기도 하다. 칼의 명품 빅토리녹스를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이유다.


몽블랑 MONTBLANC
 

가치를 쓰는 만년필 몽블랑


가치를 쓰는 만년필 1990년 10월 3일, 동서냉전의 상징물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과 동독의 메지에르 수상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일 조약서에 서명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두 수상이 사용했던 펜이 바로 ‘몽블랑’(Montblanc)이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나 국가의 수장들이 서명할 때면 어김없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아든다. 그 상표는 항상 몽블랑이다. 몽블랑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을 상징하고 있다.

만년필의 명품 몽블랑의 역사는 190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휘스, 라우젠, 잔보아가 조그마한 만년필 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필기구를 만들겠다는 공통된 꿈을 갖고 있었다. 몽블랑 제품에 새겨진 로고는 유럽 최고봉인 알프스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을 상징하고, 펜촉에 새겨진 4810이라는 숫자는 몽블랑의 높이다. 유럽인들이 몽블랑 산에 대해 갖는 자부심처럼 최고의 만년필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고집이 만년필에 담은 셈이다.

그렇다면 몽블랑은 보통 만년필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1924년 출시된 ‘마이스터스턱’(Meisterstuck)을 살펴보자. 이 제품은 처음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사랑받는 만년필이다. 우선 만년필의 외형이 손에 꼭 잡히도록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돼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년필을 써보면 왜 몽블랑인지를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정교한 펜촉 때문이다.

펜촉에서는 항상 많지도, 적지도 않은 가장 알맞은 굵기의 잉크가 흘러나온다. 이 펜촉은 금을 사용해 1백50여 단계의 철저하고 엄격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몽블랑의 명성을 일궈낸 펜촉은 현재까지도 오직 함부르크의 장인들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그래서 만년필 한자루를 만드는 데만 6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최고의 소재를 엄선해 수작업으로 생산되는 만년필. 그리고 모든 만년필에 대한 전문가의 필기테스트. 몽블랑은 여러모로 대량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산업사회와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이 만년필의 명품 몽블랑만이 지닌 진정한 매력이다. 정교한 펜촉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 기술자의 땀방울이 담긴 몽블랑은 필기구가 아닌 예술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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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홍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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