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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손자로 이어진 과학사랑 헉슬리 가문

과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19세기 영국엔 과학에 몸을 바친 대표적인 명문 가문이 있었다. 할아버지 T. H. 헉슬리와 그의 세 손자인 줄리앙, 올더스, 앤드류의 과학사랑 이야기를 살펴보자.
 

T. H. 헉슬리는 헉슬리가를 과학 의 가문으로 일으켜 세운 주인공 이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아이의 할아버지는 참을 인(忍)자가 새겨진 목판을 하나 사오셨다.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간다’는, 심상찮은 글귀가 새겨진 목판이었다. 굶는 것을 밥먹듯 하던 가난 속에서도 공부 하나만 잘하면 사회적 성공이 보장되던 할아버지 시대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

비단 할아버지 시대만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튼튼한 성공의 사다리가 교육인 것을 보면, 자녀의 출세를 꿈꾸는 학부형들이 교육청 앞 길거리에서 차가운 겨울밤을 지새며 맹모삼천(孟母三遷)을 실천하는 일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1백여년 전 영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우리보다는 과학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기는 아마 영국 역사상 사회적 유동성이 가장 컸던 시기로, 특히 과학 분야에 종사하거나 과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대거 새로운 중산층으로 부각됐다. 신학자, 법률가, 의사라는 전통적 직업 대신 과학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새로운 사다리였고, 헉슬리 가문은 바로 그러한 시대에 과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부으며 과학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으로 부상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세계적으로 유 명한 SF소설‘멋진 신세계’의 작가다.



‘다윈의 불독’ 별명 얻어

T. H.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헉슬리가를 과학의 가문으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다. 시골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일곱 자녀 중 한사람이었던 그는 고작 2년 간의 학교 교육 경험만을 갖고 있었을 뿐 대부분의 학문을 독학으로 깨우쳐야 했다. 16세 때 그는 자형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차링 크로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졸업 후 곧바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해군에 입대해 래틀스네이크 호를 타고 4년 간의 항해를 떠났다.

나무상자 같이 비좁은 곳에서 1백50명 정도가 함께 지내야 했고, 더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던 기나긴 항해 기간 동안 그는 해파리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1850년 영국으로 돌아와 왕립광산학교의 지질학 강사가 됐다.

그는 이 때부터 과학 교육에 힘을 썼고 대중을 위해 과학잡지에 글을 썼으며, 과학자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헉슬리를 무엇보다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0년 영국과학진흥협회(BAAS) 옥스퍼드 모임이었다. 그는 영국 국교회 주교인 사무엘 윌버포스와 일대 격론을 벌였다.

주교가 다윈의 진화론을 비난하면서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쪽이 원숭이요? 아니면 아버지쪽이 원숭이요?”라고 비꼬며 묻자, 헉슬리는 “중요한 과학 모임에서 그렇게 우매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고 싶은가, 아니면 비참한 원숭이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차라리 원숭이를 택하겠소”라고 되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평생 몸이 약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고도 자신의 이론이 생존투쟁에서 살아남는데 전혀 손을 쓰지 못했던 다윈을 대신해, 헉슬리는 진화론의 적극적인 수호자가 됐다. 1859년 출판 직전의 ‘종의 기원’을 읽은 헉슬리는 다윈에게 “저는 발톱과 부리를 날카롭게 하고 공격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 때부터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유명한 별명을 얻게 됐다.

헉슬리는 이후 생물학의 성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 아직 생물학이라는 분야가 동물과 식물 및 광물의 종류를 분류하는 수준인 자연사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생물학 역시 과학기구를 사용해 측정과 실험을 수행하는 물리 과학의 한 분야임을 강조했다. 오늘날 생물학이 자연과학대학에 물리학 및 화학과 나란히 자리잡게 된 데는 헉슬리의 공이 컸다.

헉슬리가 비단 생물학 연구를 수행하거나 생물학을 옹호하는 측면에서만 과학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과학을 통한 사회 정의의 실현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학교교육을 거의 받아보지 못했던 그는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과학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스스로 국가적 차원의 왕립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 과학교육의 실태 조사와 정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행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생물학에 대한 열정과 과학을 통한 사회적 참여의 가풍을 만들어냄으로써 세 명의 손자들을 빼어난 과학자, 그리고 과학을 사랑한 지식인으로 키워냈다는 것이다.
 

앤드류 헉슬리는 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 예를 안았다



교수에서 영화제작자로 변신

T. H. 헉슬리가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큰손자 줄리앙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1887-1975)는 1909년 동물학 전공으로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줄리앙의 동생들인 올더스 헉슬리가 이튼 칼리지를, 앤드류 헉슬리가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은 두세대를 거치면서 헉슬리 가문이 영국의 전통적인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줄리앙은 이후 미국과 이탈리아를 돌며 강의를 했고, 1940-50년대 생물학의 메카로 떠오른 런던대 킹스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가르쳤으며, 진화론의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곧 그는 좀더 대중적인 차원에서 과학 확산을 위해 교수직을 그만뒀고, 당시 과학 영화를 제작하는 업자와 손을 잡고 자연사에 관한 영화를 제작했다.

또한 대중을 위한 과학 순회 강연을 적극적으로 실시함으로써 특히 생물학 분야와 대중을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할아버지 T. H. 헉슬리를 보면서 자랄 수 있었던 손자 줄리앙은 동물학자로 출발했고, 할아버지처럼 과학을 통한 사회 봉사를 실천했다. 1946년 유네스코(UNESCO)의 초대 사무총장이 됐던 그는 과학이 인류 사회에 가져다 줄 긍정적인 측면을 조망하느라 애썼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생학을 통한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발전 가능성까지 주장하게 됨으로써 그는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고, 과학이 가져올 우울한 미래를 경고했던 동생 올더스와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고 말았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와 노벨상 수상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옥스퍼드대를 다녔고, 전공이 영문학이었지만 결국 할아버지 때부터의 가풍을 이어 ‘원숭이와 본질’ 같이 생물학을 소재로 한 과학소설가로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Brave New World’의 작가로 유명한 그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모두 인공적으로 제조되는 미래 사회를 풍자적으로 꼬집었는데, 그가 이미 70년 전에 경고했던 미래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사실을 보면,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형제들 중 특히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차있어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으며, 다양한 방면에 폭넓은 지식을 소유했고 천재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SF라는 장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과학의 맹목적 진보가 아니라 과학의 진보가 인간 개개인의 삶에 가져올 변화, 복잡하고 파괴적으로 만드는 부정적 변화에 대한 각성이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할아버지나 형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막내 동생이었던 앤드류 헉슬리(Andrew Fielding Huxley, 1917- )는 중간에 과학연구를 중단했던 큰 형 줄리앙과 달리 평생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남아있었다.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그는 신경의 전달 메커니즘으로 나트륨 펌프를 제안함으로써 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그는 모교를 비롯해 런던대에서 실험 생물학과 생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했고, 스스로도 그리고 후학을 통해 생물학 분야의 연구에 전념했다.

1980년, 그는 꼭 1백여년 전에 그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전통 깊은 영국 왕립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17세기에 조직돼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을 배출해냈던 왕립학회는 오늘날에도 영국 과학자들의 가장 권위 있는 모임이다.

왕립학회에서는 과학계 전반의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고, 해마다 과학에서 놀라운 진보를 가져온 과학자들에게 코플리 메달을 수여하며 격려하고 있다. 앤드류는 과학연구에 투신하는 모습을 통해, 그리고 후배 과학자들을 격려하는 방법을 통해 과학사랑을 실천했다.


과학자의 내리사랑 이어질까

헉슬리 가문의 과학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적극적인 과학의 수호자로, 연구하는 생물학자로, 과학의 진보를 조망하는 과학강연가로, 우울한 미래를 경고하는 SF 작가로. 또한 그 곳곳에 면면히 흐르는 가풍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 생물학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과학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학을 통해 사회 발전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T. H. 헉슬리는 어려운 난관들을 뚫고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과학자 가문을 일으켰고, 손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과학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현재도 실천하고 있다.

줄리앙 헉슬리의 큰아들인 프란시스 헉슬리 역시 인류의 기원을 찾는 과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헉슬리 가문의 과학사랑은 계속될 것이며, 과학 명문가로의 위상에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앞으로 한 1백년쯤 지나, 아니 사회가 더 빨리 변화하니까 한 50년쯤 지나, 우리 사회가 영국 사회처럼 사회적 유동성이 감소된다면 한 분야에서 3대를 이어 종사하는 가문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과학자 할아버지와 과학자 손자 세대가 가능할 수 있을까. 예전의 영국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과학이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가 아닌데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러나 우리는 자주 듣는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에게는 인재라는 자원밖에 없다고.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또 듣는다. 과학자 아버지들이 요즈음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그네들 자식이 과학자가 되겠다는 말이라는 것을. 언제쯤 우리는 과학 분야에 대를 이어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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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조숙경 박사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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