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졸업한 삼엽충 연구자 김공룡 박사! 운 좋게 고생대학교의 신임 교수로 임용돼 드디어 자신만의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연구 환경을 꾸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화석을 찾기 위한 탐사 장비, 분석 장비, 학술 서적은 물론이고 인건비까지 모든 게 돈, 돈, 돈!
인터넷 매체나 잡지에서 기사로 깔끔하게 정리된 연구 결과만 보는 우리는, 과학 연구가 시작되기까지의 이런 긴 여정을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연구든 돈과 시간을 포함한 자원이 든다는 사실을 쉽게 잊죠.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같은 거대 과학 프로젝트든, 한 두 명의 연구자가 소소하게 진행하는 연구든, 모든 과학 연구에는 돈이 듭니다. 하지만 돈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과학 연구를 후원하려는 단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연구에 한정된 자원을 투자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를 결정하려면 매우 다양한 사안을 고려해야 하고요. 이 결정을 위해 탄생한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정책’입니다.
예전에는 어디서 과학 연구를 지원받았을까
과학자들은 어디서 연구비를 지원받을까요? 국가, 기업 같은 답이 떠오르시겠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근대 과학의 기반이 된 르네상스 시기 서유럽으로 가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크게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귀족이나 재력가에게 후원을 받아 연구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돈이 많아 취미로 연구를 하던가요.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목성 주변을 도는 위성 4개를 최초로 발견하고, 그 위성의 이름을 자신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따 ‘메디치의 별’로 지었습니다.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바치죠. 그 결과 그는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던 토스카나대공국의 궁정 수학자 겸 자연철학자로 임명돼 봉급은 물론 연구에 필요한 공간과 장비를 제공받게 됩니다. ‘메디치의 별’로 메디치 가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린 대가였죠.
재력가들은 본인의 돈으로 직접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나, 만유인력 측정 실험을 수행하고 화학, 전자기학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가 그랬습니다. 캐번디시는 사망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하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과학은 점점 더 많은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산업혁명 이후로는 산업계에서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갖추기 위해 과학기술자를 지원하기도 했죠. 과학의 중요성이 특히 급부상한 것은 상당히 최근인 제2차 세계대전 후, 1940~1950년대의 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모로 과학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과학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가장 상징적인 예는 ‘원자폭탄’입니다. 미국이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낸 원자폭탄은 일본에 투하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미국의 앞서나간 과학기술력을 만방에 보여준 사건이었죠.
20세기, 거대 과학의 부흥과 쇠락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연구 프로그램은 개인이나 재력가 한둘의 힘으로는 진행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거대했습니다. 국가 단위의 도움과 힘이 필요했죠. 이른바 ‘거대 과학’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국가는 본격적으로 과학의 후원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제조는 물론,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 같은 연구 프로그램에 엄청난 돈과 자원이 들어갔습니다. 자국이 다른 나라보다 앞선 체제라는 걸 전 세계에 보여주기 좋았죠.
냉전 기간 수없이 추진됐던 거대 과학 프로젝트는 그러나 생각보다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기초 연구에 돈을 투자한 만큼 원하는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았죠. 타당성을 의심받던 거대 과학 프로젝트들은 소련이 무너진 1991년 이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되거나 예산 삭감을 당합니다. 유명한 예가 미국 텍사스주 사막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초전도 초충돌기(SSC嘄uperconducting Super Collider)’입니다. SSC는 둘레만 약 87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리학의 표준모형이 품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란 기대를 한몸에 받았죠. 10년 동안 약 44억 달러(약 5조 7000억 원)의 비용을 들여 건설하기로 계획됐습니다. 그러나 1991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SSC는 거대한 지하 터널을 파는 작업 중이던 1993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예산이 전액 삭감되고 급기야 취소되기에 이릅니다. 사막 지하에 터널만 남겨두고 말이죠.
참고로 알아두셔야 할 점은, 이 시기 거대 과학 프로젝트가 단지 냉전이 끝나고 경쟁자인 소련이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산을 삭감당하거나 취소된 건 아니란 지점입니다. 이전부터 SSC 계획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의료, 복지, 경제 분야 등 자금 지원이 더욱 긴급한 분야를 두고 연구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SSC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상황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과학자 사회에서도 비판은 거셌습니다. 물리학자들은 SSC를 운영하는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이 오랫동안 예산을 독점적으로 썼다고 공격했습니다. SSC 덕분에 다른 유망 분야인 레이저, 응집물질, 초전도 과학 쪽으로는 예산이 돌아가지 못했다는 거죠. SSC 계획 취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과학 프로젝트의 예산 배분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과학을 돕는 과학, 과학기술정책
한국의 과학정책 방향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오랜 과학의 전통이 없었던 한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 성장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연구에 투자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시작으로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세웠고, 개발한 기술을 기업에 이전했습니다. 이런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지원 방식은 경쟁국을 따라잡기에 적합했죠. 산업에 바로 적용 가능한 응용과학기술 연구 지원은 한국 정부의 지원 방식을 대표합니다.
냉전 이후로도 국가는 과학의 중요한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군사기술 분야는 물론 첨단 산업까지, 과학이 국가경쟁력의 지표가 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자료에 의하면 2023년 한국 정부가 과학기술 개발에 투자한 예산은 31.1조 원입니다. 이 돈을 어떤 연구자에게, 어떻게 지원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과학정책 연구자들은 여러 사안을 고려해 ‘어떤 연구가 더 훌륭한가’, ‘어떤 연구가 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정책은 ‘과학을 돕는 과학’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과학정책이 어떤 연구에 예산을 지원할지 고민하는 과정을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