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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정예 후보물질 대거 선발

자연계 만물 합성에 도전한다

신약개발의 첫 단추는 얼마나 다양한 화합물을 어느 만큼 갖고 있는가이다. 기존의 전통적 유기합성법의 한계를 극복해 후보약품의 풍부한 저수지 역할을 하는 조합화학.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다양한 신물질을 창출하는지 알아보자.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옛날부터 인류공통의 소원이었다. 더욱이 생활 여건이 향상된 요즘, 건강은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유전체학(게노믹스)와 단백질체학(프로테오믹스)를 중심으로 한 생명공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최근에는 새로운 약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신약개발은 물질의 합성, 약효검증, 세포와 동물의 독성테스트, 임상시험을 거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의 신약이 개발되기 위해 소요되는 기간은 최소한 10년. 약 2만개의 후보물질 중에서 고르고 고른 하나의 화합물을 상품화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여기에서 가장 어려운 관문은 약효를 지닌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기존의 합성기술은 하나의 화합물을 합성해 이 물질에 대해 약효를 검증하는 반복적인 시행착오 과정을 거쳤다. 이 때문에 많은 인내와 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존의 신물질 합성방법의 비경제성과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합성기술이 개발됐다. 바로 ‘조합화학’(combinatorial chemistry)이다.
 

분리된 셀마다 각각 다른 반응을 거쳐왔기 때문에 최종화합물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다.



전통에 대한 혁명적 도전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1998년 연말 특집호에서 그해 과학계의 10대 연구성과 중 하나로 ‘조합화학 합성기술’을 선정했다. 조합화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시에 많은 화합물이 섞일 수 있도록 조합(combination) 개념을 도입해 한번에 다양한 화합물을 대량으로(factorial) 합성하는 신기술이다. 고전적 합성법이 A와 B를 섞어 A-B라는 하나의 생성물을 만든다면, 조합화학은 ${A}_{n}$과 ${B}_{n}$을 동시에 섞어 수많은 다양한 ${A}_{n}$-${B}_{n}$ 화합물을 만든다.

신약개발에 있어 성공의 관건은 얼마나 다양한 화합물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냐에 좌우된다. 수많은 다양한 화합물을 갖고 있다면 그 중에서 신약 후보물질을 발견할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고, 따라서 신약개발 기간은 앞당겨지기 때문이다. 최근 선진제약회사들은 다양한 화합물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가지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 전략 중 핵심기술이 바로 조합화학이다. 조합화학을 이용하면 한번에 다양하고 많은 수의 화합물 라이브러리(library)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화학자는 연금술시대부터 지금까지 목표화합물 한개를 합성하려면 두가지 원료 A와 B를 물이나 유기용매에 균일상태로 넣고 A-B를 결합시켜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록펠러연구소의 메리필드 교수는 달랐다. 1960년대 초, 수개의 아미노산을 연결해 펩티드 합성을 연구하던 메리필드 교수는 액체상태에서 반응을 시키는 것보다 고체 표면에 원하는 아미노산을 하나씩 붙여나가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균일한 용액상 반응에서는 한번에 여러가지 원료를 넣고 반응시키기 때문에, 얻어지는 수많은 화합물 중에서 원하는 목표화합물만 분리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고체 표면을 이용하면 반응이 끝난 뒤 반응용액 속에서 원하는 화합물이 붙어 있는 고체만 들어내면 되므로 분리가 쉽다. 메리필드 교수의 고체상 합성기술은 지난 1백년 이상의 용액상 반응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었다. 이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메리필드 교수는 198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조합화학을 이용하면 자동화된 기계를 통해 한번에 수백 번의 화학반응을 시킬 수 있다.



신물질 기하급수적 증가

‘메리필드의 혁명’ 이후 신물질 합성법 분야에서는 기존의 액체상 합성법 대신 고체상 합성법에 대한 기술적 연구가 진행돼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됐다. 특히 1990년 이후 게노믹스, 프로테오믹스 등 생물산업의 혁명적 발전은 신약개발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화합물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런 연구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합성개념이 필요했고, 이때 탄생된 합성법이 조합화학이다. 1990년대 조합화학 개념이 도입된 후 고체상 합성법에 대한 기술적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어 현재는 80% 이상의 조합화학 기술이 고체상 유기합성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고체상 유기합성기법이란 화학반응을 수행하기 위한 반응 매개체로 고체를 이용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 기술은 다시 반응과정에 따라 혼합분리법과 평행합성법으로 분류된다. 이 두가지 방법 중 조합화학의 개념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방법이 혼합분리법이다.

혼합분리법은 이름 그대로 화합물을 혼합하고 분리하는 과정을 반복해 새로운 물질을 대량으로 합성한다. 혼합과 분리의 과정이 반복되는 횟수에 따라 생성되는 신물질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혼합분리법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자.

비드(bead)라고 불리는 조그만 구슬같은 플라스틱 표면에 원하는 화학물질 A, B, C를 붙인 뒤 세가지 비드를 분리한다. 이 세가지 비드에 각각 A, B, C를 다시 혼합시킨다. 이제 혼합된 풀(pool)에는 AA, AB, AC/ BA, BB, BC/ CA, CB, CC의 세가지 화합물 군이 존재한다. 이 각각의 화합물 군을 다시 A, B, C와 반응시키면 총 27개의 새로운 화합물이 만들어진다. 반응 과정이 무척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이 모든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돼 있기 때문에 사람은 단지 실험과정만 설계하면 된다.

단시간 안에 다양한 화합물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혼합분리법은 조합화학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이 애용돼 왔다. 하지만 혼합분리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혼합분리법에 의해 생성된 수많은 화합물은 마지막 과정에서 모두 같은 풀에 섞이므로 원하는 화합물만 분리해내기 어렵다. 또한 원하는 화합물을 골라냈다고 해도 이 화합물이 어떤 반응경로를 거쳐왔는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합물의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생리활성 검사 후 신약후보로 선정되더라도 후보물질의 화학적 구조분석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이래서야 애초에 조합화학을 도입한 이유, 즉 신약개발의 기간 단축이라는 목적에 맞지 않는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화학자는 혼합분리법의 실험과정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코드내장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혼합분리법의 각 과정마다 일종의 ‘표식’을 남겨 최종 산물이 어떤 반응을 거쳐왔는지 알게하자는 아이디어다. 코드내장법 중 단연 돋보이는 기법은 ‘나노칸’(nano Kan)방법이다.
 

조합화학이 생기기 전 대부분의 화학합성은 두가지 화합물 을 섞어 원하는 목표물질이 나올 때까지 수백-수천번의 시행 착오 과정을 거쳤다.



마이크로칩 동원해 반응과정 추적

나노칸 방법은 혼합분리법의 반응 매개체로 이용되는 비드 속에 마이크로칩을 내장시켜 각 반응단계를 기억시키는 방법이다. 기억용 칩을 폴리에틸렌 등의 고분자 지지체로 밀봉한 다음, 이 마이크로 튜브 자체를 반응 매개체로 이용한다는 생각이다.

나노칸 방법을 이용할 때는 혼합분리법에서 반응이 끝난 뒤 각각의 반응에 대한 정보를 비드 속에 내장된 마이크로칩에 기억시킨다. 물론 이 과정은 자동화된 기계로 이뤄진다. 각 반응단계의 인식은 레이저로 칩의 특정부위에 표식을 남기는 방식을 이용한다. 이 인식과정을 거치면 아무리 많은 반응단계를 거치더라도 최종산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반응단계를 역추적하면 최종 화합물의 화학구조도 쉽게 알 수 있다.

목적화합물의 화학구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기법은 혼합분리법의 나노칸뿐 아니라 평행합성법을 이용해도 된다. 혼합분리법이 조합화학의 개념, 즉 다양한 화합물을 대량으로 만드는 합성법이라면, 평행합성법은 최종 화합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반응공정을 추정하기 위해 특화된 방법이다.

신약개발을 위한 신물질 합성에는 많은 수의 다양한 화합물을 무작위로 합성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특정질환에 약효가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화합물의 후보군을 집중적으로 합성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비만 치료제의 후보물질에 반드시 페놀기가 포함돼야 한다면 평행합성법을 이용, 페놀기가 포함된 후보물질을 수천-수만개 만들어 후보물질을 검색한다. 나노칸 방법을 이용해도 되지만 마이크로칩이 내장된 비드는 가격이 비쌀 뿐더러 자동화된 실험장비를 갖추기도 어렵다. 평행합성법은 이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후보물질을 만들 수 있다.

평행합성법은 각각의 분리된 셀 속에서 화학반응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각 반응공정을 알기 쉽고, 최종산물의 화학구조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반응공정 후 최종산물의 정제와 처리가 간편하다. 하지만 역시 다양한 화합물을 대량으로 합성하기에는 적합치 않으며 반응시간도 혼합분리법보다 많이 소요된다.


다시 전통으로 회귀

조합화학 합성기술은 지금까지 신약개발의 첫단추인 다양한 화합물 확보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지난 1980년대 이후에는 화합물을 분석하는 기술이 발전했고 컴퓨터를 이용해 화합물이 어떤 구조를 가져야 활성을 띠는지를 밝히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분자조합 기술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이는 곧 고체상 유기합성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져 조합화학의 기반기술로 응용돼 왔다.

그러나 현 단계의 고체상 화학반응 기술로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을 합성할 수 없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아미노산은 R형과 L형의 두가지 이성질체가 있다. 이성질체란 마치 거울에 비친 손같이 둘의 모양은 똑같지만 결코 겹쳐질 수 없는 물질을 말한다. 즉 분자식은 동일하더라도 3차원 입체구조가 달라 물리·화학적 성질은 물론 생물학적 약효도 다르게 나타난다. 자연계에는 아미노산뿐 아니라 생물학적 활성을 나타내는 수많은 유기화합물이 다양한 형태의 이성질체로 존재한다.

또한 현재의 조합화학으로는 반응 중간체를 확인하고 이를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화합물 라이브러리의 순도를 떨어뜨리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많은 유기화학자와 생물화학자는 1990년 중반 이후부터 고체상 유기합성기술을 이용한 조합화학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합성기술을 개발해 왔다. 하지만 결국 복잡한 유기물질은 합성할 수 없었다. 다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전통적인 용액상 합성기술을 또 한번 부활시킨 것이다.

최근의 이런 전통적 유기합성으로의 회귀 경향은 컴퓨터화학, 단백질 구조분석, 고효율약효검색(HTS, High Throughput Screening) 등의 신약개발 기반기술과 융합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 결과 2000년 초부터는 신속성을 강조하는 고체상 반응기술을 이용한 조합화학과, 정확성을 표방하는 전통적인 용액상 합성기술의 결합이 시도되고 있다. 바로 ‘고효율유기합성’(HTOS, High Throughput Organic Synthesis)기술이다. 1992년 조합화학이 대두된 이후 지난 10년 동안 합성기술의 발전이외에도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합성, 분리·정제·분석 기술의 발전, 화합물의 물성과 정보를 관리하는 장비의 발전으로 전통적인 유기합성 실험실의 자동화에도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신속성의 조합화학과 정확성의 자동화된 전통적인 유기합성 기술이 결합해 고효율유기합성 기술이 탄생했다.

자연계는 완벽하고 치밀한 원리를 근간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자연계의 사실과 형태는 계산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 단계 기술로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합성할 수 없다. 하지만 조합화학과 고효율유기합성이 상호 연계될 머지 않은 미래에는, 지구의 모든 물질이 합성될 것이며 이에 따라 신약개발의 역사는 다시 쓰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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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공영대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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