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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별 맞춤약물 제조시대 개막

알약 하나로 젊음을 되찾는다

알약 하나로 수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꿈의 신약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약과는 달리 환자의 유전적 특성과 환경에 꼭 들어맞는 맞춤약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약이 약속하는 미래의 패러다이스로 함께 가보자.


올해 고3이 된 화정(18, 가명)은 요즘 매사 의욕이 없고 항상 피곤하다. 늘 걱정이 앞서며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이유없는 죄책감이 들어 학교조차 다니기 힘들다. 병원 진단 결과 초기 우울증 증세. 고3이라는 심리적 압박감이 스트레스로 작용해 허무하고 우울한 상태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담당 의사는 4종의 화학약물을 함께 투여하면 완치율이 높다며 화정의 부모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화학치료를 시작하자마자 병은 더 악화됐다. 없었던 두통과 구역질이 생겼으며 가끔 발작과 졸도 증세를 보인 것이다.

화정이 갖고 있던 다른 질병이 증세를 악화시켰는지, 아니면 화학약물이 부작용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약

화정이가 병원 치료를 받기 얼마 전, S의료원 유전자클리닉 의사들은 ‘CYP2D6’유전자에 문제가 있으면 화학약물 ‘프로작’의 대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로작은 미국 일라이 릴리사에서 개발한 항우울약으로, 뇌에서 신경흥분을 담당하는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세로토닌은 신경세포 말단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데, 우울증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세로토닌의 분비가 적다. 따라서 신경흥분을 이웃 신경세포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만약 신경말단에서 방출된 세로토닌의 일부가 다시 처음 방출부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신경흥분을 고스란히 이웃 신경세포에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한 약이 프로작이다. 프로작은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우울증 환자를 기분좋게 만든다.

하지만 프로작은 모든 우울증 환자에게 약효를 나타내는 만능약이 아니다. 약물이 체내에서 약효를 나타내려면 특정효소에 의해 분해된 다음 질환부위로 운반돼야 한다. 프로작의 경우, 이 작용을 하는 효소는 CYP2D6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화정이의 CYP2D6 유전자는 정상인에 비해 염기 하나가 바뀌어 정상적인 효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용법에 맞게 프로작을 복용하더라도 분해되지 않은 프로작이 체내에 계속 쌓였고, 결국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CYP2D6 유전자에 변이가 발생할 확률은 인구의 0.05%로 화정은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담당 의사는 화정의 DNA에 맞는 치료법을 적용했다. 화학요법제에서 프로작을 빼고 치료한 결과, 화정의 증세는 차츰 호전됐고 요즘은 학교생활에도 적응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이처럼 유전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치료를 받아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치료제에 중독될 수 있다. 이를 밝혀낸 것은 ‘약리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쾌거다. 약리유전체학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와 DNA칩 같은 신기술, 그리고 전통적 의학을 결합해 환자의 유전적 특성에 맞는 치료법을 제시한다.
 

염기 하나 바뀌어 달라진 운명



염기 하나 바뀌어 달라진 운명

화정이처럼 유전자 염기 한두개가 바뀌어 유전적 운명이 달라지는 현상을 ‘단일염기변이’(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DNA가 99.9% 같다. 30억개의 염기 가운데 0.1%, 즉 3백만개의 염기가 사람마다 다르다. 이것이 바로 눈과 피부색, 인종, 생김새, 체질, 질병의 감수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개인과 인종마다 다른 단일염기변이는 약리유전체학이 주목하는 주된 연구대상이다. ‘천식’이라는 병을 치료하는 대신 환자 개인의 특성에 맞춰 약효는 최대로 발휘하고 부작용은 없애는 개인약물 요법이 등장할 것이다.

약리유전체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뿐이 아니다. 개인마다 다른 유전적 특성에 맞춰 약물이 제조된다면 삶의 질은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약리유전체학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다. 최근 의약학자들은 약리유전체학을 이용, 개인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나만의 약’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약

최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획기적으로 연장됐다. 하지만 단순히 수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명이 연장된 만큼 노화와 함께 찾아오는 암, 심장병,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환 역시 급격히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굳이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성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머리가 보기 싫게 벗겨진다면 긴 인생이 그다지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최근 신약개발의 주요 목표는 길어진 수명을 좀더 활력있고 유쾌하게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신약을 개발하는데 맞춰져 있다. 이 약은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의미에서 ‘라이프 스타일 약’(lifestyle drug)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개인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유전자가 다르며 속한 인종이 틀리다. 따라서 어느 한 약으로 이런 질병을 일괄적으로 치유하기는 힘들다. 최근에는 약리유전체학을 이용, 개인의 조건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 약을 개발해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약리유전체학으로 개발중인 신약 중, 가장 주목을 끄는 분야는 치매다. ‘21세기 질환’이라고 불리는 치매(dimentia) 또는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은 오늘날 85세 이상 노인의 절반 정도에서 나타난다. 이 병의 비극은 기억을 잃게 되고, 언어능력이 마비되며, 웃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평생의 아름다운 기억이 모두 깜깜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치매 극복의 열쇠

지금까지 밝혀진 치매의 원인 중 한가지는 21번 염색체에 있는 아밀로이드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다. 아밀로이드 유전자는 ‘아밀로이드 전구단백질’(APP)을 만드는데, 이 단백질은 뇌에 존재하는 시냅스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냅스는 우리 뇌의 신경세포가 정보를 주고받는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틈새다. 이 시냅스를 관장하는 것이 APP다.

정상인의 APP는 자신의 기능을 마친 뒤, 대개 ‘알파 시크리테이즈’(α-secretase)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돼 대사된다. 하지만 치매환자의 APP는 ‘베타 시크리테이즈’(β-secretase)에 의해 분해돼 ‘베타 아밀로이드 펩티드’라는 물질을 만든다. 이 물질은 치명적인 독성물질로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파괴한다. 치매가 발생하는 이유다.

치매 원인이 밝혀짐에 따라 치료제도 여기에 맞게 개발됐다. 지금까지 개발된 대부분의 치매 치료제는 베타 아밀로이드 펩티드 생성을 억제하거나 이것의 독성을 방지하는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이들 약물은 일부 치매환자에 대해 효과가 일시적이고 미약하며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상태다.

왜 그럴까. 여기에 의심은 품은 학자들은 치매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해결의 열쇠는 약리유전체학에서 제시됐다.


치매 극복의 열쇠



밝혀진 또다른 원인

많은 의약학자들의 연구 결과, 치매의 새로운 원인이 밝혀졌다. 어떤 특정 그룹의 치매환자는 보통 치매환자에 비해 모양이 조금 다른 APP를 가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따라서 이 환자의 APP는 베타 시크리테이즈에 분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베타 아밀로이드 펩티드도 생성되지 않고, 결국 치매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 이 환자들은 전형적인 치매증상을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서울의대 서유헌 교수는 이 의문을 풀었다. 그는 특정 그룹의 APP는 베타 시크리테이즈에 의해 분해되지 않지만, ‘감마 시크리테이즈’(γ-secretase)에 의해 분해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분해 결과 ‘C단 단백질’이라는 물질이 생기는데, 이 물질은 베타 아밀로이드 펩티드보다 10배 이상 독성이 강하며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파괴한다.

서교수의 이같은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잇달아 소개됐으며, 치매의 새로운 주범을 밝혀 획기적인 치매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교수는 “서양인 위주의 치매 치료제는 동양인인 한국인에게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과는 유전적 환경이 다른 우리는 한국인의 유전적·인종적 특징에 맞는 우리만의 약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교수는 치매치료제로 서양에서 널리 이용되는 타크린과 아리셉트에 비해 높은 약효를 보이면서 독성이 적은 ‘DHED’(항콜린에스터라제)라는 약물을 천연물에서 추출하는데 성공, 현재 임상시험을 실시중이다.
 

최근에는 자신의 유전적 특성에 맞춰‘나만의 비아그라’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중이다. 이 약은 기존의 비아그라보다 효 능이나 부작용 면에서 좀더 뛰어난 효과를 나타낼 전망이다.



체질에 맞춘 한국형 비아그라

질병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를 없애주는 신약도 약리유전체학을 이용,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 분야는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다. 기존의 발기부전 치료제는 미국 화이자사가 개발한 비아그라가 가장 잘 알져져 있다. 비아그라는 출시되자마자 21세기 ‘기적의 명약’으로 불리며 ‘고개숙인’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비아그라는 투통, 얼굴 화끈거림, 심장에 대한 부담 등 여러 부작용을 보였다. 이에 따라 전세계 제약회사들은 비아그라의 부작용을 없애고 그들의 유전적 특징에 맞는 ‘그들만의 비아그라’를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대열에는 국내 제약회사도 적극적으로 참여중이다.

한국형 비아그라 개발의 선두주자는 동아제약이다. 기존 비아그라보다 효능이나 부작용 면에서 좀더 뛰어난 발기부전 치료제 ‘DA-8159’를 개발해 임상실험중이며, 2003년 시장 출시를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국내 한의업계에서도 한국형 비아그라 개발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연구개발중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체질에 따른 처방을 해온 한의학은 어쩌면 약리유전체학이라는 개념이 별반 새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초신경과 혈관확장을 촉진시키는 한약재료를 이용, 환자의 체질에 맞게 처방하는 한국형 비아그라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되지 않을까.

약리유전체학을 이용,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또다른 신약개발은 대머리 치료제와 비만약분야에서활발히이뤄지고있다. 기존의남성 탈모증 치료제는 지난 1997년 미국 머크사가 개발한 프로페시아가 가장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프로페시아는 중간정도의 탈모환자에게만 효과가 있으며, 일부 복용환자는 발기부전, 성기능 감퇴의 부작용을 보였다. 따라서 최근에는 환자의 체질과 유전적 환경에 맞춰 새로운 대머리 치료제를 개발중이다.

또한 날씬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신약연구분야에서는 기존 비만약인 제니칼과 리덕틸의 부작용을 개선해 ‘나만의 비만약’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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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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