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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물에 만족하지 않은 인공효소 개척자 서정헌

밥을 먹고 2시간이내에 일어나는 소화, 이산화탄소를 몸밖으로 배출하는 호흡, 새로운 세포 만들기와 같은 생명현상은 효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신이 만들어준 그 효소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간이 새로운 효소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출발선 위에 서정헌 교수가 있다.

“아! 참, 오늘이 화이트데이라 사탕을 딸아이들한테 선물했어야 했는데, 깜박했네요.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았는데 나도 사탕을 줘야죠.” 국내에서 바쁜 사람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서정헌 교수(52, 서울대 화학과)가 딸이야기에 갑자기 희색을 띠며 하는 말이다. 서교수는 자녀들이 지금 수학을 어디 배우는지, 요즘 무슨 소설을 읽는지,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자녀들이 토끼를 키우면 자신의 취미도 토끼를 키우는 것으로 바꾸는 그런 아버지다.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에 “좋아하니까 하는 거죠, 뭐”라며 별스러울 것 없다는 표정이다.

서교수가 고3인 쌍둥이 딸들에게 ‘도깨비 방망이’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녀들이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차려 뭐든지 해줘서 생긴 별명이다. 그래서인지 쌍둥이 딸들은 아버지를 1점도 모자라지 않는 1백점 아빠라고 자랑한다. 인공효소이론을 확립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유기화학자라곤 믿기지 않는 얘기다.

유전자 조작의 손과 발 제한효소

지난 2월 15일자 ‘네이처’지에는 전세계 사람들을 집중시킨 인간게놈프로젝트에 대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그 결과 자체도 방대하지만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제부터 열릴 ‘포스트게놈 시대’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게놈의 정보를 이용해 여러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고 이로부터 질병의 원인 분석에서 치료까지를 담당하게 될 포스트게놈 시대.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사람, 언제 어떤 질병에 걸릴지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어떤 질병이든 치료가 가능한 세상, 그야말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하던 일들이 펼쳐질 시대가 바로 포스트게놈 시대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인공제한효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60년 스위스의 생물학자 베르너 아르버는 대장균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기를 공격하는 개체의 DNA를 자르는 효소, 즉 제한효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후 제한효소는 DNA라는 거대한 분자를 연구할 수 있을 만큼 작게 조각내는데 쓰였다. 그리고 이 제한효소는 오늘날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유전공학의 손과 발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제한효소가 발견된 당시에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불린 까닭이다.

만약 눈과 입은 엄마를, 코는 아빠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유전자 조작을 하려면 눈, 코, 입의 모양을 결정하는 부위의 유전자를 잘라내야 한다. 즉 원하는 특정 부위의 유전자를 찾아 딱 잘라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DNA를 조각내는 제한효소를 쓰면 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제한효소는 염기순서를 4개 내지 8개를 인식한다. 사람의 유전자 중 원하는 부위를 잘라내려면 제한효소는 염기를 적어도 17개 정도는 인식해야 한다. 기존의 제한효소로는 우리가 원하는 부위를 잘라낼 수 없다는 얘기다. 현존하는 제한효소로 유전자를 자르면 원하지 않는 조각이 10만개는 나오게 된다. 현재의 수준에서는 포스트게놈 시대의 밑그림인 유전자조작은 공상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다행히도 신은 한 과학자에게 이 문제를 풀 기회를 줬다. 그가 바로 인공제한효소를 제안하고 만든 서정헌 교수다.

30년 전 대학원 1학년 학생의 꿈

효소는 한마디로 인간의 생명현상을 유지시켜주는 단백질이다.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화학적인 현상이다. 이런 화학적인 반응들이 시험관 안에서 일어나면 무척 느리다. 그런데 생체 안에서는 시험관에서 보다 10억배 또는 1조배 정도 가속화돼 일어난다. 바로 효소가 있기 때문이다. “효소가 없다면 멸균상태에서 단군할아버지가 먹은 고기를 지금도 볼 수 있을지 몰라요. 다행히 효소가 있으니 밥먹고 2시간 정도면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탄수화물은 포도당으로 분해되는 것이죠.”

알려진 것만 2천5백여가지가 넘는 우리 몸속의 효소가 하는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예를 들면 호흡과정에서 생기는 이산화탄소는 혈액을 통해 폐에서 몸밖으로 배출돼야 하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탄산무수화 효소(carbonic anhydrase)다. 이 효소는 1초에 60만개 정도의 이산화탄소와 물을 반응시킨다. 그러면 이산화탄소는 탄산이온으로 바뀌고 혈액에 녹아 정맥을 통해 폐로 수송된다. 또 몸속에서 일어나는 산화반응의 결과로 생긴 과산화수소를 1초에 9만개 정도를 분해하는 것도 카탈라아제라는 효소다. 화학반응이 일어나도록 하는 활성화에너지를 낮춰 반응속도를 높이는 효소는 한마디로 생체에 존재하는 촉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효소는 화학 공장에서 쓰이는 촉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학반응을 빠르게 일으키고, 1백만명의 군중속에서 애인을 골라내는 것 이상으로 반응에 참여할 물질을 정확히 가려낸다”며 효소 예찬론을 편다.

그런 효소를 어떻게 인공적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1971년 미국 시카고대 유학시절 대학원 1학년말에 있던 연구계획 발표에 인공효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제안했어요. 당시에 교수들이 상당히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했어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인공적인 합성을 통해 효소의 특성을 재현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꿈이 30년 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효소는 신이 만든 것이니까 그것과 경쟁하면 안돼요. 대신 효소의 특징을 살리거나 효소가 할 수 없는 것을 만들면 돼요”라고 덧붙인다.


신의 선물에 만족하지 않은 인공효소 개척자 서정헌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하지만 그가 인공효소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은 1990년대 초부터다. 그 전까지는 적은 비용으로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못하는 것, 안하는 것을 주로 공략했어요. 일종의 틈새시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기화학, 무기화학, 생화학, 생물학이 다 걸쳐 있는 분야를 찾았던 거죠. 그게 바로 효소의 모형이었어요.” 이렇게 돈과 노동력이 많이 들지 않아도 좋은 논문을 낼 수 있는 연구를 하던 그는 1990년대 들어 연구 여건이 좋아지면서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연구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매달린 것이 아이디어창고 속의 보물이었던 인공효소였다.

1970년대부터 인공효소에 대한 개념은 있었지만 그 수준은 낮았다. 미국에서 항체에 촉매기능을 부여한 항체효소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서교수는 1992년 미국 화학회가 발간하는 ‘어카운트 오브 케미컬 리서치’(Account of Chemical research)에 금속이온의 촉매작용을 이용한 인공효소의 제작 방향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다. 화학자라면 누구나 논문을 내기 원하는 잡지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서교수의 논문이 실린 것이다. 그 후 서교수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동시에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DNA를 자르고, 정제하고 분석하는 것을 비롯해 모든 새로운 과정을 직접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맞는지 1998년부터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며 미소를 띤다.

현재 그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인공효소를 개발해 산업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가 만든 단백질 분해 인공효소는 노약자를 위한 특수 음식이나 콩단백질을 분해해 만드는 간장을 얻는데 유용하게 쓰일 전망이다. 또 인공제한효소도 좀더 효율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지만 실험실단계에서는 만들어진 상태다.


신의 선물에 만족하지 않은 인공효소 개척자 서정헌


짓고땡과 곰곰이 생각하기

그러고 보면 그가 달려온 시간은 매우 숨가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편안한 미소가 말해주듯 그는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삶속에서 실천한다. 실제로 같은 학과의 동료면서 부인인 백명현 교수(52)는 “거짓말 같지만 여태껏 한번도 바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세상에 마음에 안드는 것이 없는 분이어요. 늘 보면 저렇게 느긋한데 언제 일을 할까 싶어요”라면서 이것이 서교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평한다. 이것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움 이면에는 뛰어난 집중력이 숨겨져 있다. 서교수는 부인인 백명현 교수가 골똘히 일하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일을 빨리 처리한다. 실제로 그는 “집중력이 강해서 남들이 5시간, 10시간에 하는 것을 1시간에 하는 능력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니까 곧 놀아야 돼요. 지금도 보면 남들 하는 일의 서너배는 빨리 하고 서너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요.”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온 것일까.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예전에 5형제였는데, 내방이 따로 있나? 학교 갔다 오면 아무데서나 숙제 빨리하고 놀러 나가야 하죠. 그러니까 주변이 시끄럽든, 방이든, 마루든 상관않고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된 거죠, 뭐”하며 웃는다. 그러면서 자기방이 있는 아이들이 집중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가장 바쁘다는 서울대 연구부처장을 맡았을 때도 논문 내고, 대우총서 쓰고, 책 읽고, 회의하고, 결재하는 1인 다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아무데서나 집중할 수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교수는 자신의 집중력이 혼자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장기, 오목, 바둑, 짓고땡 같은 게임을 통해 길러진 것이 아닌가라고 덧붙인다. 특히 어렸을 때 마당에서 아저씨들이 하던 노름의 일종인 짓고땡을 보고 화투 5장 중에서 3장으로 10이나 20을 만드는 걸 연습한 후론 아무리 어려운 셈이라도 금방하게 됐다고 한다. 따지고 생각하기를 즐기게 된 계기치고는 참 재미있는 얘기다.

서교수는 뛰어다니고 운동하는 것보다 곰곰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제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때는 지겨운 회의에 참석할 때라고 말한다. 관심사도 아니고 특별히 할 말도 없는 의례적인 회의에 가면 서교수는 발동이 걸린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하나씩 꺼내 정리하기에는 더할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하는데도 요령이 있다고 귀띔한다. “여유로운 평상시에 큰 것을 생각해놔야 해요. 큰 제목과 작은 제목들은 잡아놔야 표와 그림도 그리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취미생활 하면서 월급받는 사람

학기가 시작된 요즘 서교수는 신입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자질은 충분하니까 자신감을 가져라. 아직까지는 기회가 없어서 그랬지, 세계 일류가 되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봐도 대학교 1학년의 시기가 가장 중요했다고 말하면서 학생들 인생의 전성기가 50대와 60대 후반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기 위해 지금 열심히 하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서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수학을 못하면 과학을 안하려는 요즘 청소년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학이 뭔가를 분석하고 꼼꼼히 따지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수학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수학을 못하더라도 오목이나 장기를 잘 둔다든지, 바둑을 잘 두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면 얼마든지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봐요”라며 학교 수학 성적만 갖고 과학을 좋아하는데 포기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동시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자녀들에게도 늘 하는 말이다. “대개 공부하면 지겹다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것도 많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공부는 취미다. 취미 생활하는데 월급도 받고 얼마나 좋으냐?”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선택은 본인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제자들에겐 뭘 하든지 세계 최고가 되라고 말한다. 이것은 “선생님께서는 제자 한명을 사막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키우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세요”라고 말한 하상수씨(박사과정)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보다 완벽한 제자를 원하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생들이 힘들지 않을까 했더니 김만주 교수(포항공대 화학과)는 “선생님은 학생들한테만 노력하라고 하지 않으세요. 당신 스스로 그만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배우는 거죠”라고 말한다.

서교수는 “똑똑한 학생이 잘 되는 것도 보람이지만 나로 인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 제자를 두는 것이 더 큰 보람이죠”라며 과학자인 동시에 교육자의 모습을 지닌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서교수는 제자들에게 성격 좋고, 예의를 다해 대해주며, 학생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면 제자들은 초긴장상태로 접어든다. 큰 소리는 치지 않지만 그 행동 자체가 몹시 불만족스럽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레고 조각 맞추는 즐거움

세계의 과학자들은 21세기 화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성배 중 하나로 인공효소를 꼽았다. 유럽 연합 국가의 6-7개 대학이 연합해서 공동연구를 하는 것을 비롯해 요즘 전세계적으로 인공효소에 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정헌 교수가 있다. 서교수는 앞으로 주문제작형 인공제한효소를 만들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암이나 에이즈를 일으키는 유전자의 특정부위만을 잘라내고, 혈액 속의 유전자로 미래에 갖게 될 질병을 예측할 수 있는 DNA칩에 필요한 인공제한효소를 제작하려고 한다.

사실 그의 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공효소로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탄산가스를 빛을 이용해 환원시켜 메탄올로 만들고, 산과 들의 풀을 가수분해시켜 포도당으로 만들며, 버려지는 단백질을 분해해 사람에게 유용한 아미노산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류의 에너지·환경·식량문제를 청산할 청사진을 인공효소로 그리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공상과학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어린아이가 레고 조각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새로운 그 무언가를 만드는 심정으로 인공효소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이 그의 가슴 속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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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장성환 기자
  • 장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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