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벗이 돼온 동물이 있다. 진돗개, 삽살개에서부터 이름 없는 종류의 개까지. 바로 한국의 토종개다.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한국 토종개의 기원은 어디일까.
약 1만4천년 전 늑대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 최초의 가축인 개가 탄생했다. 그 후 여러 야생동물이 가축이 돼 다양한 형태로 인간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늑대의 본능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개는 사람과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이한 존재다. 개 이외에 어떤 동물이 인간의 생각을 미리 읽고 이에 대해 의식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겠는가. 지구에 생존하는 수많은 동물 중에서 오랫동안 개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친구라 불리는 이유다.
우리 조상의 친구로서 함께 한반도에 살아온 개를 한국의 토종개라 부른다. 지금까지 이들이 어디로부터 유래됐는지 학술적으로 그 기원을 따져보는 일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시도된 적이 없다. 다만 진돗개는 고려 말 몽고의 침략기간 동안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몽고 기원설과 중국 남쪽 지방에서 들여왔다는 남방 기원설 등이 혹자들에 의해 근거 없이 주장됐다.
그러나 최근 유전학의 여러 방법들이 발달하면서 그동안 풀 수 없던 이 같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게 됐다. 필자는 현대 생물학적 방법으로 한국 토종개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가 다양한 결실을 얻으면서, 올 12월에는 미국 유전학회지에 최근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고유품종 지킨 토종개
토종개란 한 지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며 오랫동안 우점종으로 살아남은 개 집단을 총칭한다. 한국 토종개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는 상당히 뜻깊은 일이다. 우리민족만 갖고 있는 동물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라는 의미뿐 아니라, 그들을 길러온 우리민족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도 간접적으로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한국 토종개의 한반도 유입 경로를 아는 것은 우리 민족의 주류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 토종개의 범주에는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적응해 살아남은 온갖 형태의 개가 다 포함될 수 있다. 언뜻 토종개라면 진돗개와 삽살개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품종으로 구분되지 못한 종류도 많다. 사실 일명 잡견 또는 똥개라고 불리며 무시되면서 역사의 격변기에 사라져버린 수많은 개들이 토종개의 대부분을 이뤘다고 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모피로 쓰기 위해 견피 수집을 국가정책으로 추진하면서 많은 우리 개들이 희생됐다. 해방 후 서양문물의 도입과 함께 유입된 외국개들과의 광범위한 교잡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토종개의 대부분이 그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잡종화되지 않고 고유품종으로 보존된 토종개 집단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 징표로서의 가치가 인정돼(일본의 아끼다견과 닮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돗개와 뒤늦게 우리 정부에 의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삽살개가 이들이다. 이들은 형태의 다양성은 많이 잃어버렸지만 토종개로서의 유전자 구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진돗개와 삽살개는 한국개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한 유전자 자원으로서 가치가 크다.
혀 속에 담겨있는 정보
현존하는 여러 지역의 토착 개들과 혈연적 유사성을 비교해 가장 인척관계가 가까운 개가 어떤 개들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과거 서식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일본, 시베리아, 사할린, 에스키모개들과의 혈연관계를 따져본다. 개의 외적 형태 중에는 혈연적 연관관계를 유추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특징적 부위가 있다. 혓바닥에 있는 검푸른 반점인 ‘설반’과 개의 이마로부터 코로 내려오는 두개골의 안면 곡선인 ‘액단’이 바로 그것이다. 개 집단 중 설반을 가진 개가 어떤 빈도로 나타나는지, 또 액단이 깊고, 얕은 개가 어느 정도 빈도로 출현하는지에 따라 남방유래인지 북방유래인지 유추할 수 있다.
혀에 나타나는 설반은 개의 생존과 적응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계통탐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삽살개, 진돗개, 제주개와 같은 한국개의 경우 불과 2% 내외에서 설반이 발견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몽고 등 북방계통의 개들이 한국개처럼 설반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만, 인도네시아 등의 남방계통 개에서 발현빈도가 높아 뚜렷이 구별된다. 일본개 중에서 아끼다견, 기주견 등에서는 발현빈도가 낮으나, 북해도견과 갑배견 등에서는 높다. 이를 미루어보면 한국개는 아끼다견이나 기주견과 같은 북방계통의 혈통을, 북해도견과 갑배견은 남방계통 개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개골 앞이마가 꺾이는 각도인 액단도 지역에 따라 개들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각도가 큰 경우 액단이 뚜렷하다고 하는데, 뚜렷할수록 가축화 진행 정도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액단은 개의 진화적 유연관계 추정에 쓰이는 중요한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액단이 뚜렷하면 북방견이고, 얕은 개들은 남방견이다. 실제로 인도개와 동남아개들의 95% 정도가 얕은 액단을 지녔다. 이에 비해 삽살개와 진돗개, 제주개 등 거의 모든 한국 토종개들은 모두 뚜렷한 액단을 갖고 있다. 일본개도 한국개처럼 액단이 뚜렷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 남쪽 끝의 유구 지방과 북쪽 끝단의 북해도에서는 얕은 액단의 개가 많이 발견된다. 유구견의 경우 50%가 액단이 얕은 개이고, 북해도견의 경우는 18%가 중간 정도의 액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국개는 중부 일본개와 함께 북방견의 혈통으로, 일본열도 남북 끝단의 개들은 남방견 혈통이라 추정할 수 있다.
배달민족의 단일성 간접 증명
혈액 속에는 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있다. 이 중에는 기능은 같으나 구조가 조금 달라서 분자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다형단백질’이 있다. 여러 종류의 다형단백질을 잘 선택해 각 개들이 어떤 다형단백질을 갖는지 조사한 후 통계처리를 해보면 개 품종간의 혈연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필자와 함께 연구했던 일본 다나베 교수는 아시아 토종개 30여품종을 포함한 50여품종 4천여마리 개의 혈액단백질 다형을 분석해 개들의 혈통적 연관 관계를 밝혔다. 연구에 활용된 단백질들은 16가지인데, 4천여마리 개에 대한 16가지 단백질의 다형을 전기영동법으로 조사했다. 이를 통해 16장의 아시아지역 개의 분포 지도가 만들어졌다(그림 1).
연구 결과 혈통이 지리적으로 연관돼 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한국개들은 에스키모개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일본 남서부 지역 개들이 한국개들과 혈연적으로 비슷한 양상이나 남북 양단으로 갈수록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구된 16가지 단백질들로부터 얻어진 16장의 그림들을 모아 함께 분석해 최종 결과를 얻었다(그림 2).
진돗개, 삽살개, 제주개 4백여마리가 포함된 연구결과는 우리 토종개들의 혈연적 연관에 대해 흥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삽살개, 진돗개, 제주개의 유전적 거리를 분석한 결과, 세 품종 간의 혈연관계가 다른 나라 어떠한 품종들보다도 서로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위 대부분의 개 품종들과 혈연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한국개 집단의 특수성도 함께 보여준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배달민족인 우리민족의 단일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다.
결정적 증거는 DNA로 밝히다
한국개의 기원을 밝히는 결정적인 연구는 DNA를 이용하는 ‘초위성체 분석’이다. ‘초위성체’란 2-6개 염기 서열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부위를 말한다. 전체 염색체 위에 약 5-10만 곳에 존재하는데, 염색체상에 비교적 고르게 산재돼 있다. 그런데 같은 장소의 초위성체라도 개체나 품종에 따라 반복횟수의 차이가 나 반복염기서열의 크기가 다르다. 따라서 초위성체 염기서열을 PCR(중합효소 연쇄반응)법으로 증폭한 후, DNA를 크기에 따라 분리하는 전기영동법을 사용하면, 그 차이를 조사할 수 있다.
초위성체 분석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고 신뢰할 수 있어 유전자지도를 작성할 때 표식 마크로 널리 쓰인다. 뿐만 아니라 친자감별, 개체확인 등에 유전자 지문이란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혈연이 가까울수록 초위성체 염기서열의 동질성이 크기 때문에 혈연 관계를 알 수 있다. 품종 간 또는 개체 간에 다형을 보이는 초위성체 부위를 여러개 선정해 활용하면 품종 간 혈연 비교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필자는 9종의 초위성체를 이용해 아시아 지역 토착개 11품종 2백11마리를 대상으로 연구해 이들 간의 유전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아시아 토착개 집단 상호 간의 지리적 관계, 그리고 집단 간 교잡이 있은 후에 어떠한 그룹으로 나눠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그림 3).
연구결과 대체로 아시아의 토착개는 서식하고 있는 지역을 기초로 한 관계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한국개인 진돗개와 삽살개가 한 그룹, 일본개인 기주견과 아끼다견, 북해도견이 각각 같은 그룹을 형성하는 등 한국·일본·중국개들은 서로 혈통적으로 분리됐다. 여기에서 한국개는 비교적 비슷한 방향성과 수치를 가지는 등 유전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내용은 우리 토종개들이 북방견인 사할린개와 에스키모개들과 동일 그룹으로 묶인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개의 경우 다양한 분포로 흩어져있다. 즉 일본개는 남방계와 북방계가 섞인 유전자 구성을 하고 있어, 이를 통해 그 기원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연구 결론은 하나
개의 진화적 연관 관계를 보여주는 형태 특징인 액단과 설반의 출현빈도를 볼 때 한국개는 북방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남방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개와 구별되며, 삽살개, 진돗개, 잡종토종개 공통의 특징으로 드러났다. 혈액단백질과 초위성체 분석 결과 역시 북방견인 에스키모개와 우리 토종개들이 밀접한 관계임을 확인시켜줬다.
최근에 행해진 이와 같은 일련의 연구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겉모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삽살개와 진돗개는 유전적 배경이 대단히 흡사한 토착개 집단이며, 이들의 조상은 북쪽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이 북쪽에서 남하해 한반도에 유입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그림 4).
한반도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축화 된 개가 유입된 시기는 북방인들이 남하하기 시작한 1만년 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주민들의 유입 때마다 외래 개들이 주민들과 함께 들어왔을 터이며 먼저 유입된 개와 혈통이 섞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교역과 이주를 통해 이방인들이 이 땅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배달민족으로 그 특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땅의 기후풍토에 잘 적응하게 된 북방유래의 고유 토종개들의 집단도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