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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사람이 주인 되는 인터페이스 꿈꾼다

사용자 생각대로 따라오는 컴퓨터

인간은 필요에 의해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 덕분에 생활의 편리가 극대화됐다. 하지만 왠지 기계의 요구에 내가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왜 그럴까. 컴퓨터와 인간의 인터페이스에서 정답을 찾아보자.

기계는 합목적(合目的)적이다. 기계란 본디 일정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되고 생산되는 도구를 뜻한다. 객관적이며 합리적으로 설정된 목적이야말로 기계에게 의미를 부여해왔고, ‘목적이 합리적으로 설정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명확한가’ 라는 질문은 기계의 지속적인 존립이 확보됐는지의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여타 계산기와 다른 길을 걷게 된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 목적의 다변성에 있다. 컴퓨터가 지닌 프로그램 가능성과 그 조작 얼개인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에 따라 어떤 도구로도 탈바꿈될 수 있는 보편성의 근간이 된다. 급기야 컴퓨터라는 단어가 ‘기산(起算)하다’라는 ‘Compute’로 이뤄진 점은 쉽사리 망각되고 유니버설(universal)한, 즉 ‘보편적인 만능 기계’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통하게 된다(1930-40년경 컴퓨터라는 영단어가 ‘계산하는 사람’을 칭했음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기계에 보편성이 부여되고 그 목적의 변경이 보장될 때 이 기계들을 ‘컴퓨터’라 부르는 것이다.

증기기관 일화에서 시작된 인터페이스

우리는 컴퓨터를 구매할 때 컴퓨터가 지닌 잠재적인 보편성을 함께 사들인다. 화면 너머로 내면의 사고를 투영하며,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컴퓨팅은 이미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휠을 돌리고 기어를 넣는 기계적 행위보다는 상상하며 끄적거리는 인간 본연의 행위에 오히려 가깝다. 컴퓨터는 생물학적 의식을 넘어 확장하고 싶은 인간 욕구의 최전선이며, 또한 한없이 유니버설해지고 싶은 모든 기계의 이상형인 것이다.

인간과 기계,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은 이 두개체, 두세계가 부딪히는 곳이 바로 인터페이스다. 이 두세계는 지난 한세기 동안 접경에서 때로는 대립을, 때로는 공존을 모색하며 성장해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컴퓨터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인간, 그리고 인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컴퓨터의 발자취와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한 치열한 밀고 당김을 통해.

인터페이스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백50년 전 어느 증기기관의 일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의 시조로 혹자는 주판을, 혹자는 파스칼의 계산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터페이스를 두개체의 접경, 즉 두물체가 대화하는 접점과 방식에 관한 말이라고 이해한다면 주판이나 계산기와 같은 산술도구들은 인간이 이들 도구를 통해 자기 두뇌와 대화할 뿐이다. 이야기를 들어줄, 그리고 명령을 받을 상대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말하는 ‘컴퓨터’와는 거리가 있다.

프로그래밍과 인터페이스라는 컴퓨터 속성의 가능성을 처음 보여준 것은 우리가 근대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라 칭송하는 찰스 바베지의 ‘엔진’이다. 기관(Engine)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바베지가 설정한 동력은 증기 등의 원시적 동력이었다. 18개의 휠과 3개의 축으로 움직이는 기관의 모습은 19세기의 정서를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야심에 비해 당시의 기술이 얼마나 미성숙했는지 일깨워준다. 미비한 기술의 한계 탓인지 바베지의 변덕스러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첫번째 엔진 계차기관(Difference Engine)은 미완에 그친다. 그러나 그 차기 버전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은 시인 바이런의 외동딸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에게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영예를 가져다 준다.

그녀를 기리는 ‘에이다’(ADA)라는 프로그래밍 언어까지 후일 만들어질 정도의 기정 사실이지만, 그녀가 최초의 여성 프로그래머일지는 몰라도 그녀를 조수로 썼던 바베지가 당연히 최초로 프로그램을 짰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호사가들이 컴퓨터 역사에 그럴듯한 우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를 그 위치에 앉혔다는 짓궂은 견해다.

어쨌거나 그녀가 바베지와 함께 최초의 프로그래밍이라는 위업에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썼던 인터페이스는 일종의 천공카드(punch card)였다. 이 아이디어는 1801년에 자카드가 직조산업에 혁명을 불러일으키며 개발한 자동방직기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직물의 무늬를 짜기 위해 틀에 구멍을 뚫듯 에이다는 구멍을 뚫어 기계에게 할 일을 알려줬고 자신의 논리를 시험했다. 무척이나 원시적으로 보이는 이 ‘공예’는 실은 극히 최근까지 벌어진 일이다. 1970-80년대 대학에서 전산을 공부한 사람들은 구멍이 뚫린 수십, 수백장의 천공 카드를 컴퓨터실로 가져가다 쏟아버려 그 순서를 다시 재배열하려 혼이 난 무용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홀러리스라는 역무원은 통계국의 고민을 해결할 아이디어로 천공카드를 제시하고, 1894년 터뷸레이팅 머신(Tabulating Machine)사를 설립한다. 후일 IBM이라 불리는 회사의 탄생이었다.
 

인간은 주판이나 계산기와 같은 신술도구를 통해 자기 두뇌와 대화한다. 두물체가 대화하는 접점과 방식을 인터페이스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은 우 리가 말하는‘컴퓨터’의 시조가 될 수 없다.


구멍뚫기에서 타이핑까지

구멍뚫기로 시작한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다. 그리고 역시 놀라운 관성에 지배된 채 변하지 않는다.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을 조작하기 위해 사용자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또는 쭈그리고 전선을 바꿔 이어야 했다. 그 뒤를 이은 거대한 쇳덩이 컴퓨터들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배열된 수많은 스위치 배열로 대화를 해야 했다. 지금은 고전 SF 비디오에서나 찾아 볼만한 풍경이 당시의 컴퓨팅 환경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텔레타이프를 이용한 인터페이스이다. 오늘날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키보드 기반의 컴퓨터는 바로 이 텔레타이프 시절에 그 성공이 가늠된 셈이다. 우리가 사용중인 쿼티(QWERTY) 키보드는 원래 기계식 타자기 타이피스트들의 빠른 타자 속도로 인해 타자기가 고장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비효율적으로 만든 고육지책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텔레타이프는 키보드가 박힌 컴퓨터의 원조가 됐다는 면에서 큰 공헌을 했지만, 한줄 보내고 결과를 받는 식으로 컴퓨터와 인터페이스를 했다.

그 후 브라운관을 갖춘 터미널이 등장한다. 터미널은 대형 컴퓨터와 연결하기 위한 장비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갖춰 오늘날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요소를 완성하게 된다. 터미널은 화면 단위로 컴퓨터와 인터페이스를 하는 현대 컴퓨팅의 토대가 된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하이텔과 천리안 등의 컴퓨터 통신은 이 방식을 사용해 왔으며, 우리가 ‘이야기’와 ‘새롬데이터맨프로’와 같은 프로그램을 터미널 에뮬레이터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커서가 깜박이고 명령어를 입력하면 수많은 녹색 글자들이 스크롤되며 뒷배경의 검은 화면에 사용자의 얼굴이 반사되는 전형적인 풍경은 바로 이러한 인터페이스가 빚어낸 장면인 것이다.

애플 2와 IBM PC와 같은 초창기 PC가 이러한 인터페이스를 답습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터페이스가 지닌 관성은 실로 지대하기에 여전히 우리는 쿼티 키보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애플 매킨토시 탄생시킨 GUI의 충격

1979년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 스티브 잡스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그 충격은 후일 그의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세가지를 보여줬다. 그렇지만 첫번째 것에 정신을 잃은 나머지, 다른 두가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한 하나는 오브젝트 지향 언어였다. 또다른 하나는 네트워크 컴퓨터 시스템이었다. 나는 오로지 첫번째 것, GUI(Graphical User Interface)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만약 나머지 두가지 것에도 신경을 썼다면 21세기에 임박해 비로소 자바와 인터넷으로 개화한 이 개념들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진다. 여하튼 그의 정신을 잃게 한 개념이 불과 얼마 후 애플 매킨토시로 잉태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책상과 그 위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상징화해 표현하려는 개념, 그리고 이들이 각각 독립적이며 화면상에 배열 가능한 ‘윈도’로 표현돼 컴퓨터 내에 존재하는 ‘책상 위의 사물들로 상징되는 기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 즉 사용자와 인터페이스로 작용한다는 개념은 실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또한 동일한 개념이 불과 얼마 전에 출시된 윈도XP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점은 이 오래된 인터페이스의 현대성을 나타내준다.

무엇보다도 GUI의 등장은 컴퓨터의 기계적 면모를 중화시키는 호르몬 역할을 했다. 기계로서의 컴퓨터는 공학의 상아탑에 갇혀 있었다. 튼실한 공학적 소양을 지닌 ‘엔지니어’들을 위한 기계였던 것이다. 에니악의 인터페이스가 회로의 직접 변경이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봐도 알 수 있다. 키보드 터미널의 등장은 컴퓨터의 사용감을 현저히 향상시켰지만, 여전히 화면 가득한 메시지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컴퓨터 능력이 별도로 요구됐던 것이다. 즉 컴퓨터가 컴퓨터의 입장에서 뱉어낸 메시지를 ‘인간의 지능과 교육을 통해’ 해석해 다시 컴퓨터의 입맛에 맞게 ‘인간의 지능과 교육을 통해’ 변환해 전달한다. 즉 GUI 이전은 컴퓨터의 응석을 받아주기 위해 인간이 컴퓨터를 더 많이 이해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GUI는 기계를 추상화했다. 컴퓨터는 “이 연필 아이콘으로 문서 작성 기능을 쓸 수 있습니다”라고 그림을 통해 알려줌으로써 친절을 베푼다. 인간은 전자공학이 아닌 인간이 그 동안의 생애를 통해 체득한 지식을 토대로 컴퓨터에 액세스할 수 있게 된다. 복잡한 키 조합을 암기하지 않더라도 마우스를 움직여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GUI는 컴퓨터의 저변을 넓히는데, 바꾸어 말해 컴퓨터를 더욱 보편적인 대상을 위한 더욱 보편적인 기계로 만드는데 한몫을 한 셈이다. 오늘날 공학자가 아닌 일반인 모두가 인터넷의 혜택을 입게 된데 GUI가 제공한 ‘시각적 은유’(visual metaphor)의 역할이 더할 나위 없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보편적인 대상을 위한 더욱 보편적인 컴퓨팅. 이 큰 흐름의 원류에는 GUI가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 컴퓨터를 만 드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만인을 위한 컴퓨터

UD라고 줄여서도 부르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다시 말해 보편적 디자인이란 새로운 운동이 21세기와 함께 유행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나 생애를 통해 신체적·지적으로 능력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점을 감안해 누구에게나 쓰기 쉬운 기기나 환경을 디자인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특히 ‘배리어 프리’(Barrier-free)나 ‘액세서빌리티’(Access ibility)와 같은 움직임은 장애인, 노인 등 행동 약자들이 사용하기 쉽게 기기를 설계하고 설정하기 위한 터를 닦았다. 그러나 배리어 프리는 지나치게 장애인을 배려한 나머지 그들을 고립시킬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한 기능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배리어’, 즉 장애가 있음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UD는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설계를 하자는 발상이다. 장애인에게 이롭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이로운 것이기에.

보편적이기를 원했던 GUI 인터페이스는 젊고 건강한 평균적인 일반인들에게는 편리했지만, 그 반대급부가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숙련된 사용자에게는 익숙한 ‘더블클릭’도 노인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의 작은 글씨들은 누구에게나 편하지만은 않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음성 출력 시스템의 실현에서 GUI 환경이 과거의 텍스트 기반 시스템보다 결코 수월할 리 없다. UD의 입장에서 볼 때 GUI는 여전히 특수한 대상을 위한 특수한 컴퓨팅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만인을 위한 설계라는 UD의 개념이 의외의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 있음을 목격하는데, 그 곳은 바로 모바일의 분야이다. 모바일 컴퓨팅은 건강한 일반인에게도 많은 제약을 선사한다. 키보드는 한 손가락으로만 쓸 수 있고, 충분한 정보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화면으로 이뤄져 있다. 이러한 환경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UD로 이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핸드폰에 한 손가락으로 한글을 입력하는 ‘천지인 한글’이나 ‘eZ 한글’과 같은 기술은 수족이 불편한 이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견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 같은 UD이지만, 배려가 아닌 보편적 필요의 입장에서 노력하면 많은 어려움이 해결됨을 모바일의 예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하려는 목적에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터페이스의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성과 함께 무선 네트워킹 기능을 겸비한 제품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 서 컴퓨터는 브라운관의 GUI를 벗어나 새로운 경지로 점프할 준비를 하 고 있다. 컴퓨터는 그래픽 이미지나 문자뿐만 아니라 소리와 움직임을 정 보로 처리하면서 인간 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생활의 일부로

갈라진 것은 합해짐을 꿈꾸기 마련이다. 둘이 태생과 속성이 다르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동화 의지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컴퓨터와 인간도 그러한 동화 의지를 느끼는 것일까. 컴퓨터 속의 세계와 현실 세계 간의 갭을 최소화해,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미 도처에서 샘솟고 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실세계 지향(Real World Oriented) 인터페이스와 퍼베이시브(Pervasive) 컴퓨팅이다.

컴퓨터의 존재에 주눅들지 않고 직감적으로 이들과 상호작용하려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컴퓨터는 있는 듯 없는 듯 자기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장면. 도처에 인터페이스가 있지만 동시에 어떠한 인터페이스에도 속박되지 않는 컴퓨팅. 컴퓨터 저편의 현실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며(Real World Oriented), 컴퓨팅이라는 경험은 보편적인 수준을 넘어 사방에 충만해지는(Pervasive) 생활.

무선 네트워킹과 극도로 고도화된 휴대성을 무기 삼아 지금 컴퓨터는 브라운관 안의 GUI를 벗어나 새로운 경지로 점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단순 그래픽 이미지나 문자뿐만 아니라 소리와 움직임을 유용한 정보로 처리하는 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이는 UD의 관점에서 더욱 편리한 컴퓨팅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행동에 적절한 반응으로 피드백을 해주는 지능적인 컴퓨팅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주인을 인지하는 컴퓨터는 과연 공상과학만의 일일까.

지금까지의 컴퓨터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해왔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 언제나 그들은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수많은 옵션과 설정을 본의 아니게 암기해야 한다. 생산적이기 위해 도입한 컴퓨터에 얽매여 어느새 그들의 뒤를 봐주는 후견인이 돼버린 것이다. 우리 자신, 인간의 신체를 돌아보자. 호흡, 심박동, 소화와 같은 중요한 생명유지 활동조차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자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인간은 컴퓨터에도 이러한 자율성을 기대하지 않으면 곤란한 단계에까지 와버렸다. 컴퓨터는 어느새 인간의 중요한 활동의 한부분이 돼버렸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슴 설레며 구입한 첫번째 컴퓨터라면 온갖 정성을 쏟아 부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를 둘러쌀 수많은 컴퓨터들, 여러분의 생활에 침투할 수많은 컴퓨터들의 집사 노릇을 자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벌써 자율 컴퓨팅(Autonomous Computing)의 연구는 그 결실을 보고 있다. 자가 치유와 같은 기능은 이미 상당히 유용한 경지에 이르렀다. 인간과의 인터페이스에 의존하지 않는 컴퓨터, 굳이 인터페이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컴퓨터는 현실로 훌쩍 다가 왔다. 컴퓨터는 인간과 같은 환경에서 유기체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항상성을 인체의 자율 신경계에서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컴퓨터 사이의 접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오랜 친구 사이의 일처럼 조용하고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 마치 오랜 사귐을 되돌아보듯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귀찮은 듯. 우리는 컴퓨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혜택 받은 이들만 컴퓨터와 대화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귀찮아질 때도 있다. 우리는 컴퓨터를 어디에나 데리고 다니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구속되기는 싫어진다. 우리는 컴퓨터가 혼자 놀기 바란다. 그렇지만 필요할 때 곁에 있기를 바란다.

백작부인은 기름칠하고 구멍까지 뚫어가며 컴퓨터와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컴퓨터를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그리운 남 같지 않은 친구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한 세기를 컴퓨터와 함께 뒹굴었기 때문일까. 이제야 드디어 편해진 친구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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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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